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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2화 (72/1,329)

제1화 누구나 다 깨지면서 배운다 (2)

분명 자신과 전진우가 실수를 했다.

환자가 죽는다면 과실 유무를 떠나 명백한 의료 사고다.

999명을 살려도 단 1명의 환자를 놓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의사에겐 0.001프로에 불과한 일이지만 당사자인 환자와 보호자에겐 100프로다.

불가항력이기 전에는 환자의 치료를 확률로 따질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전진우가 들어왔다.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선생님, 괜찮을까요?”

“괜찮아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 병원 밖에서 문제가 생겼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씨팔! 멀쩡했는데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네.”

욕까지 터졌다.

환자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책망이었다.

“제가 더 열심히 봤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자빠져 잔 건 나야. 문제가 생겨도 일단 노티를 했으니까 넌 뒤로 빠져. 괜히 나서지 마. 환자가 무사하기만을 바라자.”

전진우의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런 상황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환자의 목숨이 걸린 일을 두고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얼마 후, 내과 과장이 들어왔다.

김지훈과 전진우가 벌떡 일어났다.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진우, 어떻게 된 거야?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안 거야? 그리고 너 김지훈 맞지. 어떤 환자에게 집중해야 하는지 아직도 몰라? 어떻게 두 놈이 다 환자를 놓쳐?”

“죄송합니다, 과장님.”

내과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전진우, 이런 환자 처음 봤어?”

“아닙니다.”

“그런데도 놓쳤어? 저런 환자들 평소 조금씩 출혈을 하다 갑자기 터진다는 거 몰라? 조금만 더 늦었으면 죽었어, 인마. 어떻게 환자에게 고마워해야 하냐? 재수 없었으면 환자는 물론 니들까지 다 다쳤어. 의사도 되기 전에 옷 벗기 싫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이 자식들아.”

죽음이란 말이 섬뜩했다.

환자의 목숨을 다루는 일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의사에게 주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새삼스레 느꼈다.

“이 자식들을 그냥. 후우! 일이나 못하면 기대나 안 하지. 니들은 달라야 될 거 아냐? 괜찮은 놈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고를 쳐?”

고개만 푹 숙인 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환자 볼 거면 옷 벗고 나가, 이 새끼들아.”

내과 과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혼이 났다.

환자가 죽을 뻔했으니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훅훅 숨을 몰아쉬던 내과 과장이 입술을 깨물며 김지훈과 전진우를 노려보았다.

“전진우, 김지훈,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믿어도 되겠지. 왜 대답이 없어?”

그제야 목소리가 조금은 진정이 됐다.

“예, 과장님.”

대답을 하는 김지훈과 전진우의 안색이 어둡기만 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내과 과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잊지 말고, 나한테 혼났다고 서운해하지 마. 설렁설렁 일하면 환자를 다 떠넘기니까 사고를 칠 일도 없지. 사고 쳐 봐야 별것도 아니고. 원래 열심히 하는 놈들이 사고를 더 치는 법이다. 그래서 니들에게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하면 더 사고를 친다니?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과 과장이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려운 말이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눈에 보이는 증상을 100프로 믿지 마. 공연히 병력을 듣는 것이 아니야. 가족이나 환자가 과거에 어떤 병을 앓았는지, 그리고 지금 위험 요소는 무엇이 있는지 잘 파악해야 돼. 그래야 실수를 줄일 수 있어.”

정확한 지적이었다.

알코올 중독인 환자에게 궤양이 발생했다.

내원 전까지 술을 멈추지 않았다. 합병증이 발생할 위험이 급격하게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드물다고는 해도 천공만이 아니라 출혈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너희들이 환자를 한두 명 보는 게 아니잖아. 모든 환자에게 집중할 수는 없어. 그럴 필요도 없고. 하지만 이번 환자의 경우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해.”

그 순간 무엇인가가 강하게 머리를 내리쳤다.

중환자실에서 변상훈 과장에게 배웠던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중한 상태이거나 위험이 예견되는 환자에겐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한다.

어떤 의사도 환자를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그마한 위험 요소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바로 의사였다. 하기에 경험 많고 노련한 의사들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김지훈은 말을 잃었다.

응급실 분위기까지 착 가라앉았다.

‘모든 환자에게 집중해야 한다면 응급실이 아니더라도 며칠 못 가서 쓰러지겠지. 최대한 정확하게 판단하고, 필요한 환자에게 집중해야 한다.’

환자를 보는 방식이 확실하게 달라져야 했다.

감기처럼 가벼운 질환은 초진을 한 후 중간에 한 차례 정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대신 남는 시간을 중증 환자나 주의를 요하는 환자들에게 쏟는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주의를 요하는 환자를 구분해 내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었다.

꾸준히 노력하고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유석재가 응급실에 들렀다.

“김지훈, 너 제대로 깨졌구나. 그런 실수를 했는데 당연히 깨져야지. 일반 외과를 할 놈이 그런 환자를 놓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석재가 이런 말을 하다니, 솔직히 서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기까지 했다.

“뭐, 불만 있어? 얼굴이 영 아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긴, 이렇게 깨지면서 배우는 거야. 진우나 나나 수도 없이 깨졌어, 인마. 1년차는 다른 줄 아냐? 인턴 때보다 더 깨져. 그래도 그 덕에 같은 실수는 좀처럼 안 하게 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깨진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유석재의 말에 내심 안도하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환자는 어떻게 됐을까?

“선생님, 수술은 잘됐나요?”

“출혈은 잡았는데 위를 절반이나 잘랐다. 과장님도 궤양이 너무 큰 데다 위치까지 안 좋아서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시더라. 뭔 놈의 술을 그렇게 먹었는지 몰라. 1년 내내 마셨대.”

“회복은 잘되겠죠?”

“퇴원할 때까지 중환자실에서 못 나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태가 안 좋은가요?”

“알코올 중독인데 좋을 리가 있어? 간도 간이지만 며칠 내에 발생할 금단 증상이 더 문제야. 그것 때문에 일반 병동에는 못 올라가. 나중에 시간 되면 중환자실에 가 봐. 술 먹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거다.”

‘이런 환자를 무심코 지나쳤다니, 혼나도 싸네.’

“정말 정신 똑바로 차리고 환자 봐야겠네요.”

김지훈의 심각한 표정에 유석재가 나직하게 웃었다.

“지훈아, 우린 애송이야. 위의 연차나 과장님들이 괜히 있는 줄 알아? 배워야 할 게 산더미야. 모르는 거 있으면 배우고, 실수를 하면 왜 했는지 알아 가면서 고수가 되는 거야. 이혁민 선생님도 완벽하게 환자를 볼 수 있는 의사는 없다고 그러시더라.”

맞는 말이었다. 이제 인턴일 뿐이다.

실수를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번 일은 쓰디쓴 약이었다.

김지훈이 조금은 웃음을 되찾았다.

‘깨지면서 배우고, 그래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내가 특별한 놈도 아니고. 나 때문에 응급실 분위기까지 나빠졌네. 이래선 안 되지.’

혼자 일하는 곳이 아니다.

우울한 기분은 동료들의 실수를 유발할 수도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마음 깊숙이 새긴 후 무거운 기분을 툴툴 털어 냈다.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의사가 되는 길은 정말 멀고도 험했다.

***

일요일 저녁, 윤서연이 조심스럽게 당직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자고 있던 김지훈이 간신히 눈을 떴다.

“그 환자 때문에 신경 많이 쓰는 것 같던데, 이제는 괜찮지? 아까 유석재 선생님이 환자 많이 좋아졌다고 그러더라.”

환자 얘기가 나오자 잠이 확 깬 김지훈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괜찮아. 똑같은 실수만 안 하면 되지. 이상한 냄새 난다고 안 들어오더니, 무슨 일이야?”

“어제 오늘 밥도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먹을 것 좀 사 왔어. 이거 먹어.”

윤서연이 까만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하더니 시내까지 가서 사 온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웬 거야? 피곤할 텐데 잠이나 더 자지.”

“고마워서. 덕분에 편하게 돌았고, 배운 것도 많았어. 현수랑 돌 때는 훨씬 수월할 것 같아.”

윤서연의 마음이 고마웠다.

‘몸은 힘들었어도 네가 일과 감정을 확실하게 구분해 줘서 나도 정말 고맙다.’

잠시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부산을 떨었다.

“그게 왜 내 덕이야? 다 네 능력이지. 나도 덕분에 편하게 돌았어. 야! 냄새 죽이네. 그런데 어떡하지? 난 줄 게 없네.”

“맛있게만 먹으면 돼.”

“고맙다, 잘 먹을게. 정말 맛있겠다.”

윤서연이 밝게 웃다 말고 코를 찡그렸다.

“청소 아줌마한테 부탁 좀 해.”

“뭘?”

“이상한 냄새가 너무 나. 남자들만 자서 그런가?”

김지훈이 코를 킁킁댔다.

음식 냄새 말고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후각이 이렇게 다른가?

하긴 그동안 흘린 땀이 얼만데, 냄새가 배긴 뱄을 것이다.

김지훈이 딴청을 부렸다.

“휴가 잘 갔다 와. 그간 받은 스트레스도 확 풀고.”

“고마워.”

윤서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여느 때처럼 마지막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신현수가 돌아왔다. 신나는 휴가를 떠나야 할 윤서연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신현수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다.

***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다.

다신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까지 있었다.

정말 새로운 각오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신현수!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언제부턴가 결코 지고 싶지 않은 상대가 돼 있었다. 같은 과를 지원했고, 동기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자타가 공인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며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일주일간 누적된 피로가 가시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신현수는 반드시 넘고 싶은 라이벌이었다.

근무가 이어졌다.

함께 도는 동기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둘이 서니까 정말 힘들더라. 잘해 보자.”

신현수가 묘한 표정으로 엉뚱한 말을 했다.

“사고 날 뻔했다며?”

“들었어? 불안해서 죽는 줄 알았다.”

“조심해. 그게 서로를 위해서 좋겠지?”

말이 좀 이상했다.

‘서로를 위해서 그게 좋다고? 이게 무슨 뜻이야.’

살짝 기분이 나빠진 김지훈이 인상을 쓰자 신현수가 모른 척하고 돌아섰다.

‘열심히만 하면 욕 안 먹는 의사는 되겠지. 하지만 최고가 되려면 남들보다 뛰어난 지식이 있어야지. 그래야 확실한 판단을 하지 않겠어? 수술도 경험이 많은 놈이 결국 잘하게 되는 거야. 실력을 쌓기 위해 휴가까지 반납하고 왔는데, 나 없는 사이에 한계를 보였다니 아쉽네. 내게 실수는 그걸로 끝이야.’

수술에 서툴렀던 것과 환자를 죽일 뻔한 일은 차원이 달랐다. 비록 일주일이지만 개인 종합 병원에서 수술까지 경험하고 왔다. 이제는 누구를 더 확실하게 주시하게 될지 분명했다.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최고에게만 관심을 주니까 말이다.

하나둘 환자들이 응급실로 내원했다. 윤서연과 돌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듀티(Duty)와 백듀티(Back Duty)의 의미도 없었다. 최대한 상황에 맞춰 일을 해야 했다.

역시 신현수였다.

빠른 판단하에 임프레션(임시 진단)을 내리고 적절한 검사를 냈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노티를 한 후 결과를 기다렸다.

대부분의 경우 임프레션과 진단명이 같았다. 다르다고 해도 감별 진단에 속하는 경우였다. 이 정도면 전공의들조차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해. 정말 엑설런트하네.’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신현수의 뛰어난 일 처리 능력과 지식을 보며 김지훈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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