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누구나 다 깨지면서 배운다 (1)
다양한 환자가 응급실에 오지만, 대부분은 통상적인 질환이었다. 감기나 배탈 등이 심해 오는 환자들은 기본적인 치료만 받고 귀가했다.
그 덕에 두 번째 응급실을 도는 김지훈은 슬슬 요령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벼운 질환으로 내원한 환자에게까지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가는 몸이 2개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자신감까지 붙고 있었다.
급성 복통 환자가 내원했다.
최근 보름 새 두 번째 위경련이 발생해 응급실을 찾은 환자였다. 환자를 진찰하던 김지훈이 가벼운 실랑이를 벌였다.
“술 좀 끊으세요. 술로 간하고 위를 다 망쳐 놓는데, 약을 먹으면 뭐 해요.”
“선생님은 술 안 드십니까?”
“저도 먹죠. 솔직히 좋아해요. 그렇다고 몸을 망칠 정도로 먹지는 않아요. 위궤양이라도 발생하면 몇 달 동안 약 드셔야 합니다.”
“내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안 아프게만 해 주쇼.”
환자가 얼굴도 보지 않고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내과에 노티를 했다.
내과 전공의 전진우가 내려왔다.
급성 위염으로 진단하고, 투약과 수액 치료를 시행했다.
전진우도 술 좀 그만 마시라는 경고를 했지만, 환자는 코웃음만 쳤다. 알코올 중독 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전진우 선생님, 궤양이 발생한 거죠?”
“증상으로는 그렇지만, 내시경을 해 봐야 확실히 알지.”
“소주를 매일 서너 병씩 마신다는데, 어떻게 몸이 버티는지 모르겠어요.”
“의외로 잘 버티는 사람 많아. 그래도 술을 끊어야 하는데, 강제로 입원을 시킬 수도 없고. 나도 답답하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원을 권하던 전진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까지 완강하게 거부를 했다.
배만 아플 뿐인데 왜 입원을 해야 하냐고 도리어 소리를 질렀다.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술 빼고는 우려할 만한 일도 없었다.
얼마 후, 위경련이 사라진 환자가 말짱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래도 몸 상태는 아직 좋은 모양이네.’
김지훈도 곧 그 환자를 잊었다. 중한 환자들이 몇몇 내원했지만, 특별한 문제 없이 일주일이 거의 다 지났다.
윤서연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섰다. 이제는 어엿한 응급실 인턴다웠다. 둘이 돌아야 하는 휴가 시즌이 아니었다면 자기 몫을 단단히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김지훈은 이미 쉰내가 풀풀 나는 파김치가 된 후였다. 오프도 없이 6일 가까이 응급실을 돌았다. 윤서연이 아니더라도 밤낮까지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토요일 새벽.
모처럼 한가했다. 그러나 주말 응급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이럴 때 빨리 자 두어야 한다. 당직실로 들어가던 김지훈이 응급실 문 열리는 소리에 콧등을 찡그렸다.
‘그럼 그렇지.’
아무리 한가해도 환자는 온다.
다만 띄엄띄엄 올 뿐이었다.
이런! 알코올에 찌든 바로 그 환자다.
배를 부여잡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또 위경련이 온 모양이었다. 이미 경험한 환자였기에 김지훈이 빠르게 환자를 보았다.
다시 검사를 해야 한다는 말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화요일에 피 뽑았는데 뭘 또 뽑습니까? 그냥 안 아프게만 해 주이소.”
“환자분, 어제하고 오늘이 다른 게 사람의 몸입니다. 화요일이 아니라 어제 했어도 필요한 검사는 해야 합니다.”
“그거 해야 돈만 많이 나오지, 치료는 똑같지 않습니까? 어차피 인턴 선생이면 아무것도 못하는데 빨리 내과 선생이나 불러 주쇼.”
환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 몸은 어제 다르고, 오늘 또 다르다. 다시 설명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솔직히 인턴이라고 무시하는 말에 기분도 안 좋아 더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사람한테는 인턴은 의사도 아니구나.’
결국 아무 검사도 하지 못하고 노티를 했다.
전진우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복통 이외에는 다른 문제를 의심할 상황도 아니었다.
전과 동일한 오더를 낸 전진우가 당직실로 향했다.
“제산제하고 진경제 섞어서 수액 달아 줘요. 호전되면 집에 보내고. 그리고 미안한데, 당직실에서 좀 잘 테니까 한 시간 이따가 깨워 줘요.”
왕왕 있는 일이었다.
경증 질환이거나 환자가 완강히 검사를 거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의사에게 있었다. 다소 찝찝했지만 수액을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의 증상이 다소 호전됐다.
김지훈이 다른 환자를 보다 슬쩍 환자를 살폈다.
별문제 없어 보였다.
간호사들에게 손짓을 하고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전진우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구미 역시 내과 1년차에게 가해지는 업무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김지훈도 곧 꿈나라로 달려갔다.
수액을 맞으며 안정을 찾던 환자가 화장실을 간다고 나갔다. 10분 정도 지나도 돌아오질 않았지만 으레 있는 경우라 간호사들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밖에서 보호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간호사 한 명이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환자가 바지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릿하면서도 역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급히 스트레치카를 끌고 와 환자를 응급실로 옮겼다.
간호사들이 달라붙었다.
환자의 바이탈을 체크하며 동시에 환자의 옷을 벗겼다.
바지 뒷부분에 까만색 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경험 많은 간호사가 한눈에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빨리 샘들 깨워.”
병명에 상관없이 당장 치료를 요하는 응급 상황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김지훈이 눈을 떴다.
“김지훈 샘, 전진우 샘, 큰일 났어요. 빨리 나와 보세요.”
김지훈이 큰일 났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복통으로 내원한 환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의식에도 문제가 생겨 간호사의 말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일이에요?”
간호사가 환자에게서 벗겨 낸 바지를 가리켰다.
“샘, 환자가 화장실에서 쓰러졌어요. 이게 방금 전 환자에게서 벗겨 낸 바지예요.”
짜장면 색깔처럼 까만 설사가 잔뜩 묻어 있었다.
환자의 팬티까지 벗기자 끈적끈적하고 까만 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김지훈과 허겁지겁 따라 나온 전진우가 크게 놀라며 동시에 소리쳤다.
“멜레나(melena:까만색 설사)?”
소화기 어디선가 출혈이 있었다는 징후였다.
환자의 의식이 흐려지고 바이탈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상당한 양의 출혈이 분명했다.
저혈량성 쇼크가 발생하기 직전이었다.
전진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지훈, 엘튜브 하고 소변 줄 끼워. 간호사, 수액 라인 추가로 잡고, 피 시켜요.”
의식이 저하되면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탓에 환자의 팔다리를 묶었다. 김지훈이 소변 줄을 끼운 후 소변이 잘 나오는지 확인했다.
“선생님, 소변이 거의 안 나옵니다.”
전진우가 수액 라인에 달린 조절기를 열어 수액을 쏟아부었다. 어떻게든 환자의 예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저혈량성 쇼크는 막아야 했다.
환자의 협조를 기대하기 힘들어 엘 튜브를 꽂기가 쉽지 않았다. 전진우가 환자의 머리를 잡고, 김지훈이 수차례 시도를 한 끝에야 간신히 엘 튜브를 넣었다.
“이리게이션(irrigation:세척).”
가장 시급히 확인해야 하는 것은 출혈 부위다.
멜레나로 불리는 흑색 변은 상부 위장 관(식도에서 소장까지)의 출혈을 의미한다.
혈액이 소장을 통과하면서 소화되거나 오랜 기간 장 속에 정체되었을 때 빨간색이 검게 변한다.
대부분 식도 정맥류가 터지거나 위궤양이 진행되면서 위산이 주변 혈관을 녹였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멜레나 발생 시 위에 엘 튜브를 넣어 출혈 여부를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한다.
주사기에 식염수를 채우고 위세척을 시행했다.
위 내용물을 뽑아낼 때마다 검은 핏덩어리가 잘게 쪼개진 채 줄줄이 딸려 나왔다.
일단 위나 식도에 출혈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이 됐다.
이제 위 속에 가득 찬 핏덩어리들을 제거하면서 환자의 바이탈을 확실히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 응급으로 내시경을 시행해 정확한 출혈 부위를 확인하고 막을 수 있다.
김지훈이 위세척을 하는 동안 전진우는 바이탈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연락을 받은 윤서연이 왔을 때 마침 피가 도착했다. 곧 수혈이 시작됐고, 윤서연이 혈액 주머니를 짰다.
대량으로 수액과 피를 투여한 결과, 환자의 바이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했다.
아직은 다소 흐릿하지만 의식까지 돌아왔다.
한 시간 이상 위세척을 했다.
선지처럼 검은 핏덩어리들 대신 빨간 피가 섞여 나왔다.
전진우의 오더에 간호사가 아이스 워터(Ice Water)를 가져왔다. 위에 들어간 찬물은 혈관을 축소시켜 출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손이 시릴 정도로 위세척을 지속했지만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환자를 살리려면 당장 출혈을 확실히 막는 방법밖에 없었다. 시간을 확인한 전진우가 외래로 향했다.
“지훈아, 과장님께 노티 하고 올 테니까 환자 잘 봐.”
김지훈이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언제부터 출혈이 있었던 거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일차적인 책임은 모두 의료진에게 있다. 제대로 검사를 하지 않은 일부터 환자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것까지 모두 마음에 걸렸다.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잠시 후, 전진우가 내과 과장과 함께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과 과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환자 내시경실로 옮겨. 빨리.”
응급으로 내시경 검사가 시행됐다.
출혈로 인해 내시경 화면이 온통 빨갛게 보였다.
내시경에 연결된 관으로 위를 세척하며 간신히 시야를 확보했다. 직경이 3센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궤양이 보였다. 그 옆에 가느다란 동맥 하나가 노출된 채 피를 뿜고 있었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직경이 불과 2~3밀리미터도 안 되는 가는 동맥이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두려움에 소름이 돋았다.
“클립(Clip).”
내과 과장이 가느다란 줄에 달린 집게를 이용해 동맥 결찰을 시도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혈관을 직접 잡을 수는 없었다. 만일 완전히 끊어지기라도 하며 자칫 더 큰 출혈을 야기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동맥이 주행하는 주변부를 클립으로 잡아 출혈을 막아야 한다. 눈을 감고 동맥을 찾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궤양이 너무 컸다. 주변부가 심한 염증으로 인해 너무 쉽게 찢어졌다. 대여섯 개의 클립을 박았지만, 심장 박동을 따라 동맥에서 피가 퍽퍽 쏟아졌다.
한 시간이 넘게 필사적으로 시도했지만 내시경으로는 불가능했다. 상황이 더 급박해졌다. 결국 흠뻑 땀에 젖은 내과 과장이 내시경을 뽑았다.
“일반외과에 연락해.”
환자를 다시 응급실로 옮기고, 내과 과장이 보호자에게 상태를 설명했다. 곧 박경일 과장과 유석재가 도착했다.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수술을 결정했다.
“석재야, 스케줄 올려. 바로 열어야 한다고 전해.”
불과 30분도 안 돼 환자가 수술실로 향했다.
“선생님, 괜찮을까요?”
“걱정 마, 인마. 피 잡는 건 우리가 전문 아니냐.”
김지훈의 걱정스러운 말에 유석재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김지훈이 당직실 침대에 주저앉다시피 쓰러졌다.
유석재의 말은 위로조차 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환자가 어떤 상태였는지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모든 환자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잖아. 환자는 괜찮을까? 혹시 저러다 죽는 건 아냐?’
온갖 생각이 스쳤다.
환자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점점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