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긴장과 희열 (2)
회식이 끝나고 계산을 하러 나갔던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이용철 과장이 벌써 계산을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젠 꼬박꼬박 월급도 탔지만, 사실 쓸 시간도 없다.
“마취를 준 이유는 뛰어나서가 아니라 환자에 대한 네 열정과 마음 때문이야. 평생 잊지 마라.”
이용철 과장의 말이 여운처럼 가슴속에 남았다.
다음 날 정식으로 마취과에서의 근무가 끝났다.
이제 응급실이다.
서울에서의 경험과 그동안 배운 것들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걱정이 앞섰다.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인턴이 배울 수 있는 일은 한계가 명확했다.
더구나 2주 연속으로 근무해야 한다. 윤서연은 응급실을 돈 적도 없었다. 그나마 마취과를 돌며 체력을 많이 회복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일요일 오후.
간만에 푹 잔 김지훈이 상쾌한 기분으로 윤서연과 당직실에서 만났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가뜩이나 얼굴 보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아직도 초짜 티가 팍팍 났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동안 서비스 파트를 주로 돈 까닭이었다.
구미 응급실은 서울과 기본적인 면은 같았지만, 인턴에게 주어진 권한이 훨씬 많았다. 이는 일의 강도가 세지는 것은 물론 그만큼 책임도 뒤따른다는 의미였다.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병력을 토대로 최대한 정확하게 임프레션(impression:가 진단)을 내려야 한다. 서울은 딱 여기까지였고, 이후는 전공의의 몫이었다.
구미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임프레션에 맞는 검사를 시행하고, 결과까지 나온 후에 해당되는 과에 노티(notify:보고)를 한다. 응급 상황이 벌어져도 전공의가 부족한 까닭에 인턴끼리 해결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다.
쉽게 돌아갈 수 있는 요령이나 방법은 없었다.
“지훈아, 나 어떡하지? 겁나.”
윤서연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걱정 마. 일단 돌면 다 하게 돼 있어. 그래도 알고 시작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차근차근 해 보자. 나도 모르는 게 많으니까 겸사겸사 같이 배우고 말이야.”
김지훈이 응급실에서 주로 보는 질환들을 따로 정리했다.
윤서연의 질문이 쏟아졌다.
“장염하고 감기 환자는 이렇게 오더를 내면 돼?”
“응. 외상도 의외로 간단해. X-ray는 뭘 찍어야 하는지만 알면 반은 된 거야. 드레싱하고, 부목 대는 건 일하면서 배워도 충분할 거야.”
“그럼 아뻬처럼 수술이 필요한 질환이나 중한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해?”
김지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소한 경험조차 있고 없고는 정말 큰 차이였다.
‘일주일을 둘이 돌아야 하는데, 정말 큰일 났네. 이거 죽었다고 복창해야 하나?’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김지훈은 최대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하나하나 대답을 했다. 가끔 응급실로 나가 직접 사진이나 오더를 보며 설명까지 했다. 웬만하면 한두 시간 내에 끝날 일이었지만, 꼬박 3시간이 넘도록 끝이 나질 않았다.
“뭘 그렇게 오래 하냐? 당직실 전세 냈어?”
응급실을 도는 동기들까지 짜증을 냈다.
윤서연이 얼굴을 붉히자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다들 피곤하다는 것은 알지만, 인수인계를 하는 자리다.
“자세히 하면 좋지.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데 뭘 짜증까지 내. 그리고 서연이가 이번에 응급실 처음 돌잖아, 인마.”
동기가 입맛을 다시며 힐끗 째려보았다.
“어차피 돌면 다 해.”
“그걸 누가 몰라? 근데 우린 휴가 때문에 둘이 돌잖아. 셋하고 둘은 하늘과 땅 차이야. 알면서 왜 그래.”
“알았어. 미안해, 인마.”
틱틱거린 것이 미안했는지 동기들이 머리를 맞댔다.
그 덕에 한숨 돌린 김지훈이 물끄러미 윤서연을 보았다.
‘일은 일이고, 서연이는 또 어디서 자나? 어후! 분위기까지 묘해지면 안 되는데.’
이중으로 다가오는 부담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대략적인 인수인계가 끝났다.
시간이 꽤 걸려 끼니때를 놓쳤다.
윤서연이 미안해하며 밥을 산다고 했다.
거절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훈아, 뭐 먹을래?”
“얼큰한 김치찌개, 좋다.”
윤서연의 입가에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마냥 좋은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부담스러운 눈길을 피하기 위해 밥을 먹으면서도 응급실 얘기를 했다.
다행히 윤서연이 겁을 먹은 덕분에 별 탈 없이 넘어갔다.
식사 후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지훈아, 지난번에 내가 한 말 말이야.”
“응? 그래, 왜?”
한 번 더 같은 말이 나오면 정말 근무하기가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순간 당황한 김지훈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허둥댔다. 윤서연의 눈가에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네가 일하는 데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아. 우린 동기고, 좋은 친구는 충분히 될 수 있잖아.”
정말 다행이었다.
“그럼. 지금도 우린 좋은 친구지.”
김지훈이 웃으며 윤서연의 어깨를 툭 쳤다.
훗날 어떤 관계가 될지는 모르지만, 좋은 친구로 남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월요일 아침, 응급실에서의 근무가 시작됐다.
두 번째지만 여전히 긴장되고 떨리는 시간이었다.
응급실 간호사들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샘이 도니까, 둘이 돌아도 안심이 돼요. 정말 다행이에요.”
“나 2주 연장 도는 거 알죠? 쉴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쉬게 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내 몸도 버팁니다.”
“걱정 마세요, 샘. 근데 체력하면 샘 아니에요?”
“내가 무슨 로봇인 줄 아네. 그건 그렇고, 윤서연 선생님은 처음이니까 많이 도와줘요. 초반만 잘 넘기면 나보다 더 잘할 선생님이에요.”
“그래요? 윤서연 쌤, 파이팅!”
기분 좋은 말에 윤서연의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곧 첫 환자가 들어왔다.
외래에서 진료하는 시간대에는 외상 환자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운동하다가 발목을 삔 14살짜리 중학생이었다.
우측 발목 염좌라는 임시 진단하에 X-ray 오더를 내렸다.
옆에서 김지훈을 지켜보던 윤서연이 물었다.
“다친 발목은 오른쪽인데, 왜 양쪽을 다 찍어?”
“만으로 13살이잖아. 나이에 비해 체격이 좋지만, 아직 성장 판이 닫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양쪽을 비교하지 않으면 성장 판이 열린 걸 보고 골절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거든. 덩치가 아무리 커도 15살 정도까지는 보호자에게 설명하고 반드시 양쪽을 찍어. 그래야 안전해.”
“그렇구나.”
잠시 후, 발목 사진이 나왔다.
김지훈이 윤서연과 함께 사진을 보며 의견을 나눴다.
단순 염좌로 진단하고 정형외과에 노티를 했다.
마침 수술이 없어 최성훈이 콜을 받았다.
응급실로 내려온 최성훈이 X-ray를 확인하자 김지훈이 윤서연의 팔을 끌었다. 인턴의 일이 끝났다고 넋을 놓으면 배우는 것도 없었다.
“선생님, 골절은 없죠?”
“응, 그냥 삔 거네. 지훈아, 성장 판 간격 좀 봐라. 얘도 키 엄청 크겠다.”
“얼마나 클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앞으로 많이 클 거라고 짐작만 하는 거지. 환자는 어디 있어?”
김지훈은 최성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윤서연이 눈을 반짝였다. 김지훈이 엑설런트하다는 소리를 왜 듣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훈아, 환자가 통증이 생각보다 심해서 스플린트(splint:부목)를 대야 하는데, 한번 해 볼래?”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제가요? 주시면 감사하죠. 근데 저 처음 대 봅니다.”
“그래? 그럼 스플린트는 뭘 대야 돼?”
“발목이니까 쇼트 레크(short leg:단 하지) 스플린트를 댑니다.”
“석고 붕대는 몇 겹이야?”
“쇼트 레그는 7겹, 롱 레그(long leg:장 하지)는 9겹, 팔은 각각 5겹과 7겹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케이. 해 봐.”
김지훈이 환자의 다리 길이에 맞춰 석고 붕대를 7겹으로 겹쳤다. 물에 담갔다 꺼내 꽉 짠 후 환자의 다리에 댔다.
최성훈이 뒤에서 김지훈의 어깨를 잡고 함께 부목을 댔다.
“엄지발가락하고 무릎 중앙에서 고관절까지 일직선이 되도록 부목을 대면 돼. 그렇지, 그렇게.”
비교적 간단한 술기지만 정확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부목으로 인한 불편함까지 덜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 김지훈이 차트를 확인했다.
염좌 환자의 치료와 투약까지 머릿속에 새겼다.
“서연아, 봤지? 일단 인수한 대로 노티는 정확하게 해야 돼. 선생님이 내려오시면 환자에게 안내하고, 궁금한 거 있으면 틈을 봐서 물어봐.”
“안내까지 해야 돼?”
“원래 안 해도 되는데, 그래야 빨리 배워. 하나라도 더 빨리 알면 팔다리가 편해져. 그게 좋지 않겠어?”
김지훈의 말에 윤서연이 또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덧 오후가 지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환자들이 슬슬 늘어나 김지훈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윤서연에게는 가벼운 환자부터 맡겼지만, 처음부터 빠른 해결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열심히 환자를 보고, 간호사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기분이 좋은지 김지훈의 얼굴이 밝았다.
‘원래 똑똑한 데다 열심히 하니까 금방 익숙해지겠네.’
새벽 2시가 넘어가자 잠시 소강상태가 지속됐다.
지금이 바로 잠을 자야 할 때였다.
당직실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은 모르지만, 함께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다 고개를 저었다.
‘에휴! 방법이 없네. 당직실에서 같이 잘 수는 없지.’
“서연아, 한가할 때 숙소에 가서 자. 환자 몰리면 바로 연락할게.”
“난 아직 괜찮은데.”
“지금이야 그래도 내일은 어떻게 할래. 일주일 내리 달려야 한다. 일단 넌 숙소에서 자고, 난 당직실에서 자는 게 좋겠어.”
잠시 고민을 하던 윤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의 말대로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환자는 질리도록 볼 것이다.
윤서연이 숙소로 가고 난 후에야 김지훈도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스르륵 잠이 들려는 찰나,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에 깜짝 놀라 깼다.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역시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고개를 흔들며 잠을 쫓은 김지훈이 환자를 보았다.
띄엄띄엄 환자가 왔다. 윤서연을 부르기에는 상황이 애매모호했다. 결국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밤을 새웠다.
이른 아침, 윤서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응급실에 들어섰다.
“환자가 꽤 있었네. 왜 안 깨웠어?”
“그게, 환자들이 이렇게 오면 꼭 둘이 볼 필요가 없거든. 서연아, 내 덕에 잘 잤지?”
“응, 고마워.”
“그럼 오전은 네게 맡긴다. 난 좀 잘게.”
잘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자야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란 말이 맞았다. 김지훈은 머리에 베개가 닿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다.
시간은 노력하는 의사의 편이었다.
새로이 각오를 다진 김지훈은 물론 윤서연까지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낮에는 주로 윤서연이 환자를 보고, 밤에는 김지훈이 맡기로 했지만 가끔은 경계가 모호해졌다.
환자가 몰릴 때는 당연히 둘 모두 근무를 서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윤서연이 적응을 하기 시작하자 한결 편해졌다. 역시 기본을 갖추고 노력하면 적정한 보상이 따랐다.
은근히 일이 많은 데다 주로 근무하는 시간이 반대인 덕에 윤서연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가끔 서운해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김지훈은 지금이 훨씬 편했다.
환자가 없을 때도 식사를 같이하는 경우가 없었다. 윤서연이 아직도 구내식당 음식을 꺼렸기 때문이다.
‘나야 이게 더 마음이 편하지만, 웬만하면 식당에서 밥을 먹지. 내년에는 외부에서 밥 먹을 시간이 아예 없을 텐데. 부잣집 딸이라서 그런가, 입맛이 참 까다롭네.’
점점 마음에 드는 구석이 많아졌지만, 반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윤서연과 단둘이 있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다.
김지훈이 잠시 시간을 내 고경아에게 전화를 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대화가 이어졌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편했다.
6년을 보아 온 동기보다 이제 세 달 남짓 된 고경아가 더욱 편하다니, 정말 의아한 일이었다.
‘여자는 여자고, 일은 일이다. 이제 주 초반인데, 슬슬 지치네. 밤낮이 바뀌어서 그런가?’
간간이 크게 기지개를 펴도 온몸이 찌뿌듯하기만 했다.
밤낮이 바뀐다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몸이 힘든 대신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다. 수처(상처 봉합)는 물론 부목 등 기본적인 환자에 대한 처치를 원 없이 했다. 윤서연이 꺼린 탓도 있었지만, 다른 과 인턴들이 휴가를 떠난 덕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