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9화 (69/1,329)

제11화 긴장과 희열 (1)

이용철 과장이 김지훈을 손짓으로 불렀다.

“우리 과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했지? 잘 배웠어?”

“예, 과장님. 감사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기분이 좋네. 박 과장, 우리 과 한다는 인턴은 아니지만, 이런 놈을 그냥 보낼 수는 없더라구. 그래서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맡겨 보려고.”

인투베이션은 몰라도 인턴에게 마취를 맡기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능력은 물론 확실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마취를?”

박경일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이용철 과장이 김지훈과 유석재를 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유일하게 석재가 받았고, 올해는 지훈인데 둘 다 일반 외과네? 박 과장, 좋겠어.”

김지훈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지훈, 뭐 해. 이러다 수술 시작 못 한다. 시작해.”

한 번은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능력이 모자라 실수라도 하면 환자에겐 큰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신현수의 일이 기억났다.

‘정말 내가 해도 되는 일일까? 내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아니라면!’

김지훈이 신중한 표정으로 김진호를 보았다.

“왜 날 봐? 과장님께서 직접 내리신 판단이야.”

충분히 신뢰한다는 말이었다.

“과장님, 정말 제가 해도 됩니까?”

“시작해. 석재는 잘했는데, 어째 자신 없는 모양이다.”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취의 시작부터 끝까지 빠르게 되짚었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김지훈이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인공호흡기 앞에 섰다.

이용철 과장이 수술실 간호사에게 손을 들었다.

“환자 수술실로 옮깁시다.”

어느 누구도 나가지 않았다.

모든 의사와 간호사들이 김지훈을 주시했다.

22세 남자 환자.

체중은 60킬로그램.

특이 사항이나 동반 질환은 없음.

혈압, 박동 수, 호흡, 산소 포화도 모두 정상.

마취에 문제 될 소지 없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환자분, 마취 시작합니다. 심호흡하시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드디어 김지훈의 주관하에 마취가 시작됐다.

환자의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대고 살짝 눌렀다.

경직된 턱에서 수술을 앞둔 환자의 긴장이 느껴졌다.

“케타민(ketamine:정맥 마취제) 12시시 주세요.”

수액 라인을 따라 케타민이 정맥으로 흘러들어 갔다.

환자가 눈을 깜빡거리다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든다.

“석시니콜린(succinylcholine:근육 이완제) 6시시.”

김지훈이 산소마스크를 잡은 채 환자의 턱을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서서히 근육이 이완되며 저항이 사라졌다.

“스코프(인후경).”

수없이 해 본 인투베이션이었다.

블레이드로 능숙하게 환자의 혀를 한쪽으로 밀자 스코프의 불빛이 성대를 환하게 비췄다. 조심스럽게 인투베이션 튜브를 밀어 넣었다.

튜브에 인공호흡기에 딸린 공기주머니를 연결했다.

가볍게 배깅(bagging)을 하며 청진을 했다.

양측 폐에서 원활한 호흡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의 눈짓에 간호사가 재빨리 기관지에 삽입된 튜브를 단단히 고정했다.

“엔플루란(enflurane:호흡 마취제)을 사용하겠습니다.”

김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엔플루란이 환자의 깊은 잠을 유지시켰다.

‘혈압과 박동 수 정상. 산소 포화도 99프로.’

바이탈을 체크한 김지훈이 유석재와 박경일 과장을 보았다.

“수술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예, 김지훈 선생님. 수술 시작합니다.”

유석재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꽤 크게 들렸다.

수술이 시작됐다.

5분마다 바이탈을 체크하고, 마취 기록지에 적었다.

수시로 모니터를 확인하며 수술 과정을 지켜보았다.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수술진만이 아니라 마취과도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진호와 이한주가 김지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여유로운 태도로 수술과 마취 상황을 지켜보는 이용철 과장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유석재의 두 번째 아뻬 수술이었다.

한두 번으로 능숙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술이 시작된 지 40분 정도 지나서 복벽을 닫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호흡 마취제의 투여량을 줄였다.

복막과 근막을 봉합하고 피부를 닫을 때쯤 호흡 마취를 완전히 중단했다. 곧 피부 봉합까지 끝났다.

이제는 깨어나야 할 환자가 잠잠하기만 했다.

김지훈이 다소 당황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바이탈을 확인했다.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1분, 2분.

좀처럼 환자가 깨어나질 않자 김지훈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김진호가 슬며시 옆에 서며 중얼거렸다.

“환자가 좀 늦게 깨네. 흔히 있는 일인 거 알잖아? 천천히 호흡만 잘 유지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환자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발 호흡을 되찾자 기도에 삽입된 튜브로 인해 몹시도 괴로운지 몸부림을 쳤다.

김지훈이 재빨리 튜브를 제거했다.

호흡 마취제 특유의 냄새가 퍼졌다.

다시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연속으로 배깅을 했다.

환자가 거칠게 가래 섞인 기침을 했다.

“환자분, 아 하세요! 아!”

남아 있는 마취제의 기운 때문에 몽롱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환자가 입을 벌렸다.

석션을 이용해 목 안에 고인 가래를 제거했다.

자극을 못 이긴 환자가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김지훈이 산소마스크를 유지하며 청진을 했다.

양측 폐에서 들리는 호흡 소리가 깨끗하고 힘찼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수술 끝났어요.”

환자가 눈을 떴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여기 어딘지 아시죠? 환자분, 수술 끝났습니다. 고개 움직여 보세요.”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취에서 확실히 깨어나고 있었다.

“김진호 선생님, 환자 옮겨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용철 과장님, 가시죠.”

이용철 과장이 아무 말도 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유석재와 신현수가 스트레치 카에 환자를 옮겼다.

회복실로 이동해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내내 김지훈이 환자의 머리맡을 떠나지 않았다.

환자가 확실하게 깨어나고, 바이탈이 정상인 것을 확인한 후 일반 외과에 환자를 넘겼다.

비로소 마취가 모두 끝났다.

유석재가 웃으며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김지훈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이제야 심장이 심하게 방망이질 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극도의 긴장감에 가려졌던 흥분과 기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불끈 쥔 두 주먹을 힘차게 흔들었다.

희열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날 수만 있다면 하늘 높이 날아올랐을 것이다.

김지훈이 발소리를 죽인 채 껑충껑충 뛰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성취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김지훈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마취 자체는 일반 외과를 하는 데 필요가 없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은 선배들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만큼 열심히 했고, 환자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였다.

자신감이 솟구쳤다.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지금처럼 노력한다면 꿈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의사의 능력은 재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환자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얻을 수 없었다. 오늘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회의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보고를 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아직도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이용철 과장이 조용히 웃기만 했다.

“과장님, 환자 완전히 회복됐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잘했어.”

이용철 과장은 물론 김진호의 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어 있었다. 별다른 말은 안 했지만, 마취 내내 긴장했던 탓이었다. 김지훈을 믿고 맡겼지만, 인턴에게 마취의 전 과정을 주는 일은 그만큼 긴장되는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김진호 선생님.”

김진호가 씩 웃었다.

“그래, 고마워해야지. 근데 말로만 고맙냐?”

김지훈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 밥을 산다는 말을 먼저 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자칫 밥을 바라고 마취를 준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진호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과장님, 어제는 해군을 먹었으니까 오늘은 육군이 어떨까요? 삼겹살이 좀 당기네요.”

“삼겹살 좋죠. 그럼 목에 기름칠 좀 할까요?”

“지훈아, 들었지? 병원 앞 진달래 식당이다.”

“예, 선생님. 7시로 예약하겠습니다.”

“간호사들까지 두 테이블이다.”

“예, 선생님.”

어제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연이어 회식이었다.

삼겹살을 먹는다는 소리에 간호사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다들 참 힘도 좋았다.

지글지글 삼겹살 익어 가는 소리에 모두들 군침을 삼켰다.

이용철 과장이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삼겹살을 씹기에 바빴다.

튼튼한 간을 가졌는지 그놈의 술은 잘도 들어갔다.

“샘, 내일이 마지막이네요. 섭섭해서 어쩌죠. 제 술 한 잔 받으실래요.”

“고마워요. 저도 많이 섭섭하네요.”

김지훈이 간호사들을 보다 갑자기 크게 웃고 말았다.

문득 고경아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 김지훈은 더욱 즐거워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보니까 얼굴이 다 낯설어서요. 3주를 같이 일했는데, 얼굴을 본 날이 어제 오늘이 다잖아요.”

구미 간호사들도 수술실 안에서는 좀처럼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의사들이야 수술실 밖에서는 마스크를 곧잘 벗었기 때문에 얼굴을 모를 일은 없었다.

“에이! 예쁘지도 않은 얼굴인데 자주 봐서 뭐 하게요.”

“안 예쁘긴. 선생님, 간호사들 다 예쁘지 않아요?”

그 말에 술을 마시던 김진호가 움찔거리다 사레가 걸렸는지 캑캑거렸다. 간호사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김진호 쌤, 지금 아니라는 거죠.”

“아니긴, 나도 지훈이 말에 100프로 공감하지.”

“근데 왜 기침을 해요.”

“그거야 갑자기 사레가 들려서… 흠흠!”

김진호가 입맛을 다시며 딴청을 피웠다.

간호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평소에 누렸던 인기는 물거품에 불과했다.

예쁘다는 말을 연발한 김지훈과 이한주만 신났다.

신현수가 안색을 굳힌 채 어두워진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김지훈보다 내가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일을 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뭐지? 유석재 선생님까지 받았다면 나도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잖아.’

김지훈이 마취의 전 과정을 주관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마취과를 돌면서 인투베이션은 물론 마취 유지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두 번 잠깐 졸은 것 이외에는 실수한 적도 없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항상 깔끔하게 마무리했고, 남는 시간까지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열심히 일한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나다고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작년에 유석재도 받았다는 말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곰곰이 고민에 잠겼던 신현수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과 마취과 사람들이었다.

이용철 과장에게 마취 주관을 받았으니 대접하는 것이라 여겼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두들 웃고 떠들기 바빴다.

김지훈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김진호에게 무슨 말인가를 했다. 김진호가 흐뭇하게 웃으며 김지훈의 등을 두드렸다.

순간 화가 났다.

설마 이유가 이것이었단 말인가?

김지훈이 자신과 다른 점은 친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능력이 아니라 개인 간의 친분이 이유였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사는 냉정해야 한다. 감정에 휘둘리면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없어. 설마 다들 그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차가운 눈으로 김지훈을 보던 신현수가 발길을 돌렸다.

윤서연의 말까지 떠올라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김지훈을 확실하게 제쳐야 할 이유가 점점 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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