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집도식(執刀式) (2)
“김지훈 샘, 짠! 근데 샘, 애인 있어요?”
손일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미 술기운이 단단히 오른 김지훈의 장난기가 발동됐다.
“그건 와 묻나?”
“응? 지금 사투리 한 기가.”
“그래. 와 묻냐고 했다.”
서투른 사투리에 간호사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샘, 애인 없으면 내 거 할라고 그런다 아이가.”
“니 거? 어림도 없다. 내 애인 없어도 니한테는 몬 준다.”
“와 안 주는데?”
대답이 궁금한지 모두들 웃으며 김지훈을 보았다.
“니, 너무 말랐다. 난 글래머가 좋다.”
“글래머? 샘이 내 속을 봤나?”
“안 봐도 빤하다. 삐쩍 말랐잖아.”
“아인데, 만져 보면 다른데.”
헉! 이거 얼굴이 화끈거린다.
술 때문인지, 야한 농담 때문이지 모를 일이었다.
간호사들이 더 크게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김지훈 샘, 난 어때요? 나, 글래먼데.”
흐음!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니는 너무 작아. 최소한 160은 돼야지.”
한번 흉내를 내자 제법 억양까지 따라 하고 있었다.
맥주에 야한 농담이 섞이며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간호사들이 박경일 과장에게 묘한 눈초리를 던졌다.
“박경일 샘.”
“왜?”
“우리 3차로 노래방 가요.”
노래방? 아주 오늘 뽕을 뽑을 생각들인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슬슬 내뺄 생각을 했다.
유석재는 이미 탁자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런데 음주보다는 가무에 능통한 손일석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이경석마저 노래방을 외쳤다.
김지훈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현수는 어느새 사라졌다.
‘역시 발 빠른 놈이야. 그래, 그게 현명한 거다. 어우! 석재 형은 또 어쩌나.’
중구난방으로 3차도 술이네 하며 떠들던 사람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간호사들의 서늘한 눈초리에서 감당하기 힘든 힘이 느껴졌다.
유석재는 거의 빈사 상태가 됐지만, 오늘의 주인공이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유석재의 노래에 이어 귀청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저녁 7시 조금 넘어 시작된 집도식이 새벽 1시가 다 돼 끝났다.
팔다리에 맥이 탁 풀려 몇몇이 병원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4차를 가는 무지막지한 인간들이 있었다.
김지훈과 유석재도 당연히 그 속에 있었다.
노래방 구석에서 휴식을 취한 덕에 다시 힘이 솟은 것이다.
다들 정말 강적이었다.
그래도 먹은 술이 얼만가?
그러나 의사들에게는 전가의 보도가 있다.
10퍼센트 DW(dextrose water:포도당 액)와 B1C1(비타민)!
술에 취하는 이유는 혈액 속의 알코올 때문이다.
당은 혈액 속의 알코올을 세포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또한 물은 알코올의 분해를 원활하게 한다. 비타민 주사액은 속성은 아니지만, 역시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된다.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환자들의 눈을 피해 가장 술을 많이 먹은 유석재를 응급실로 데리고 갔다. 불과 2시간 만에 10퍼센트 포도당 1,000시시 2개를 맞았다.
이른 아침, 술기운이 사라지자 유석재가 습관처럼 눈을 떴다. 환하게 밝아 오는 창문을 보며 깜짝 놀라 일어났다.
“드레싱!”
허겁지겁 세수를 하던 유석재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야 집도식 다음 날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조금은 여유를 찾은 유석재가 뻐근한 몸을 풀다 말고 빙그레 웃었다. 바로 옆 침대에서 김지훈과 손일석이 뒤엉킨 채 자고 있었다.
“자식들.”
선배는 후배를 아끼고, 후배는 선배를 따른다.
서로 간의 호흡이 잘 맞아야 하는 외과에서는 특히 선후배 간의 유대가 중요했다. 슬며시 이불을 덮어 준 유석재가 부랴부랴 병동으로 올라갔다.
1년차는 환자들의 주치의다.
술을 먹었든, 아무리 피곤하든 간에 드레싱(수술 부위 소독)은 당연히 유석재의 일이었다. 간만에 일찍 일어난 최철한이 드레싱 카가 없는 것을 보고 씩 웃었다.
“굿 모닝!”
“샘도 굿 모닝!”
각자 제 할 일을 다하면 모두가 즐거운 법이었다.
오늘도 병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상시와 똑같이 돌아갔다. 한 주를 마감하는 토요일인 덕에 다들 얼굴도 밝았다. 내일은 쉰다!
마취과도 아침 집담회를 정상적으로 진행했다.
끝까지 남아 있던 이용철 과장과 김진호가 멀쩡한 모습으로 커피를 가리켰다.
“지훈아, 커피 먹자. 몸은 괜찮지?”
“예, 괜찮습니다.”
“그래야지. 술 먹었다고 환자들이 봐주지 않는다.”
김지훈이 능숙하게 커피를 탔다.
고소하고 쌉싸래한 커피 향이 유난히도 짙었다.
당직이라도 일요일은 언제나 즐거웠다.
수술만 없다면 늦잠을 자도 되고, 하루 종일 뒹굴어도 뭐라 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김지훈도 손일석과 오전 내내 노닥거리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맛있게 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오던 김지훈이 싸늘한 눈초리에 뒤돌아보았다. 윤서연이 입을 꼭 다문 채 노려보고 있었다.
“김지훈, 나 좀 봐. 일석이 너는 잠깐만 비켜 줘.”
목소리를 따라 찬바람이 휭휭 불었다.
“응? 그… 그래.”
‘지훈아, 서연이 왜 저래?’
손일석의 눈짓에 김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윤서연의 뒤를 따라갔다. 병원 건물 뒤편에서 단둘이 마주했다.
윤서연이 입술을 꼭 깨물며 입을 열지 못했다.
두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서연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훈아,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무슨 소리야?”
“너랑 술 마신 날, 현수가 왜 날 숙소까지 업고 갔어?”
내심 께름칙했던 일이었다.
술기운에 몸도 힘들었고, 정갑수에 악어까지 보는 순간 심한 피로를 느꼈었다. 하지만 모두 변명일 뿐이었다. 아마도 윤서연에 대한 부담이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자라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했다.
아무리 동기들이라고 해도, 술에 취해 이 남자 저 남자 등에 업혔다는 사실에 무척 속이 상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짧았다고? 그래, 술에 취한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난 네가 날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어. 지훈이 네가 없었으면 입에 술도 대지 않았을 거야. 이경석 선생님하고 술자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구.”
설움이 복받치는지 윤서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할 말이 없었다.
구차하게 핑계를 댈 일이 아니었다.
“미안해, 서연아.”
눈시울만 붉히며 울음을 참던 윤서연이 돌아섰다.
어깨를 들썩이며 눈가를 닦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이 됐는지 입을 열었다.
“너한테 부담 주고 싶지 않아.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동기가 아니라 여자로 봐 주면 안 될까?”
애써 외면했던 일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윤서연이 자존심을 내던지고 이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남녀 관계라는 것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6년 동안 단 한 번도 동기 그 이상의 감정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더구나 고경아가 점점 가슴 한구석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윤서연을 동기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니 윤서연이 싫다는 감정도 없었다.
섣부른 말로 마음의 상처를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까지 떠올랐다.
대답을 하려고 해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백 아닌 고백에 당황했는지도 몰랐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이미 각오한 일이야. 내 말을 잊지만 말아 줘.”
“그래, 알았어.”
“네 마음이 어떻든, 다음에는 절대 그러지 마. 나, 그때 일 알고 정말 힘들었어.”
윤서연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깨가 축 처진 채 병원으로 향하는 윤서연의 뒷모습에 김지훈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손일석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왔다.
“서연이는? 들어갔어?”
“응.”
“무슨 일이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심각하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손일석도 윤서연을 아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김지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로 둘러댔다.
“우리 술 먹은 날, 막판에 현수가 서연이 업고 갔잖아. 그게 되게 싫었던 모양이야. 서연이도 여잔데, 내가 잘못했지, 뭐. 무지하게 혼났어.”
“그것 때문에 그랬구나. 나도 찜찜했거든. 근데 서연이가 너 좋아하는 것 같지 않냐?”
“서연이가?”
김지훈이 팔짝 뛰었다.
“아니, 술이라고는 한 잔도 입에 안 대는 애가 경석이 형하고 먹었을 때도 그렇고, 그날도 취할 때까지 먹었잖아. 그것도 네 옆에 딱 앉아서 말이야. 서연이의 말까지 생각해 보면 확실히 수상해.”
“헛소리하지 마, 인마.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예전에 정갑수하고 발렌타인을 먹으러 간 거 기억 안 나? 이젠 술도 좀 마시는 모양이지.”
김지훈이 생각하기도 싫은 정갑수까지 동원했다.
“흐음! 졸업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나? 하여간 예의 주시해야 할 상황이야. 김지훈, 너도 혹시 마음에 있는 거 아니냐? 낑낑대면서 잘도 업어 주더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눈치가 100단인 손일석이었다.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벌써 상황을 꿰뚫었을 것이다.
김지훈과 윤서연이 모두 동기인 데다, 학교 다닐 때는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이 흐려진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지훈아, 잘 생각해 봐. 내 생각이 맞으면 넌 땡을 잡은 거야.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서연이네 엄청 부자란다. 차 봤지? 비엠따블유 아니냐.”
“그게 뭐, 인마.”
“이 자식, 이거 굴러 들어온 호박도 찰 놈이네. 얼굴 예쁘지, 몸매 죽이지. 부잣집 딸에 직업이 의사야. 이런 여자가 흔하냐? 전국을 뒤져 봐라. 몇이나 나오나.”
“너, 오늘따라 왜 이래? 애먼 소리 하지 말고 수처 연습이나 해. 하여간 틈만 나면 여자 타령이야.”
손일석이 입을 삐죽거렸다.
“지금 내 여자 얘기가 아니다. 잘하면 네 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이 형의 예리한 판단을 깊이 새겨들어.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다.”
“잘났다, 이 자식아.”
김지훈이 손일석을 툭툭 치며 숙소로 향했다.
기분이 묘하면서도 답답했다.
윤서연은 또 다른 부담이었다.
고경아에 대한 감정을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단순히 마음에 드는 정도인지, 아니면 그 이상인지 확신이 필요했다.
저녁에 고경아와 통화를 했다.
답답했던 마음이 다소 편해지면서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확신은 서지 않았다.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기분이 찝찝할 때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답이었다.
정신없이 일을 할 때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간도 약이었다.
간간히 짬이 날 때면 가끔 윤서연의 말이 생각났지만, 주말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은 덤덤해졌다.
드디어 마지막 주 금요일이 왔다.
주말 오프를 감안하면 사실상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해 회의실을 정리한 후 커피 한 잔을 탔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지난 3주간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돈 과 중 가장 편했지만 의외로 다사다난했다.
인투베이션(기관 내 삽관)을 배웠다.
바이탈을 유지하는 방법도 제법 눈에 들어왔다.
유석재와 신현수의 첫 수술.
정말 재밌었던 집도식과 가슴 깊이 새긴 박경일 과장의 말.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윤서연.
믹스 커피의 고소한 향을 맡던 김지훈이 슬며시 웃었다.
얻은 것이 정말 많았다. 신현수가 수술을 받은 일조차도 김지훈에겐 새삼 기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 일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같은 일도 다르게 보였다.
‘긍정적으로 살자. 수련 중에는 오로지 기본. 쩝! 그나저나 서연이 문제는 어떡하나.’
오직 윤서연의 일만이 앙금처럼 남았다.
“자! 오늘 일도 열심히 합시다.”
이용철 과장의 말과 함께 금요일 근무가 시작됐다.
이번 주는 내내 산부인과 수술실에 들어갔다.
손일석의 말대로 구미는 제왕 절개의 밭이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사뭇 달랐다.
산부인과 과장이 무지막지하게 보일 정도로 산모의 배를 갈랐다. 피가 나든 말든 불룩한 자궁을 멧잼(metzem:끝이 둥글고 약간 구부러진 수술용 가위)으로 단번에 열었다.
양수가 터져 나오며 산모의 배를 흥건하게 적셨다.
10달 동안 편안하고 아늑한 어둠 속에서 잠을 자던 아이가 세상의 빛을 처음 접하는 순간이다.
신속하게 탯줄을 자르고 묶었다.
찰싹하고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우렁찬 울음이 터졌다. 삶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순간이었다.
신생아의 성별을 확인하고, 발바닥 지문을 찍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를 닦은 후 부드러운 천에 감쌌다. 드디어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가족들과 처음 인사를 한다.
누군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릴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파서 하는 수술이 아니었다.
수술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피는 엄마의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는 가족의 희망이자 기쁨으로 자랄 것이다.
제왕 절개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하는 수술과는 달리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연달아 4건의 수술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수술실이 조용해졌다.
마지막 수술만이 남았다.
일반 외과가 뒤늦게 올린 아뻬(충수 돌기 절제술)였다.
김진호가 김지훈을 불렀다.
“아뻬도 들어가자.”
“예, 선생님.”
환자가 들어오기도 전에 이용철 과장과 이한주까지 들어왔다. 미리 와 있던 박경일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이 과장, 아뻬 하나 하는데 왜 다들 들어와. 석재 수술 잘하나 보려고? 두 번째니까 안 그래도 돼.”
“하하하! 석재가 또 받는구나. 신나겠네. 우리도 한 놈 신날 일이 있거든.”
“신날 일?”
마취과 의사가 수술실에서 특별히 신날 일은 없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