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집도식(執刀式) (1)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던 김진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김지훈, 너 오늘 오프지?”
“예, 오프 맞습니다.”
“오프 가지 말고, 오늘 나랑 당직 서자.”
“예? 오프 가지 말라고요?”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공식적으로 오프를 빼앗다니 날벼락이었다.
”평소엔 잘 안 가더니 오늘은 가고 싶다? 마음대로 해. 그 대신 내일 당직이니까 집도식은 못 간다. 오늘 오프 갈래, 아니면 당직 설래? 마음대로 해.”
“앗? 정말 그래도 됩니까?”
내심 금요일이 당직이어서 서운하던 참이었다.
정말 유석재의 집도식에 참석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든 바로 위의 선배가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일반 외과를 지원한 이상 마취과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1년차인 이한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김지훈의 눈길에 이한주가 웃으며 툴툴거렸다.
“에휴! 김진호 선생님 오더를 내가 어떻게 어기냐? 걱정 말고 가서 석재 이 자식 술 좀 잔뜩 먹여.”
커피를 마시던 최철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주야, 집도식하고 당직은 별개야. 나보고 석재 대신 당직 서라고? 난 못 해.”
“에이! 철한이 형, 왜 이러세요.”
“나도 작년에 집도식하고 당직 다 섰어, 인마.”
“형, 그래서 석재 정말 당직 세우시려고요?”
최철한이 슬쩍 유석재를 보았다.
“석재 하는 거 보고.”
유석재와 이한주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뭐 드시고 싶으십니까?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비싼 거 먹어도 되지?”
“예, 선생님.”
“과장님, 석재가 산다는데 우리 맛있는 거 먹죠.”
“뭐?”
박경일 과장도 분위기기에 휩쓸렸다.
“하늘엔 짬뽕, 땅엔 짜장. 곱빼기로. 어떠세요?”
최철한의 익살스러운 유머에 다들 배꼽을 잡았다.
문득 신현수가 생각난 김지훈이 슬며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수술이 끝난 직후 곧바로 나갔다는 간호사의 말에 공연히 한숨이 나왔다.
금요일 저녁.
드디어 유석재의 집도식 날이다.
일반 외과와 마취과 사람들이 모두 구미 시내로 나갔다.
의사들에 간호사까지 모두 20명이 넘었다.
싱글벙글!
싸고 맛있는 복 매운탕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손님들로 바글바글했지만, 한쪽에 길게 위치한 방을 통째로 빌린 덕에 자리가 남았다. 그런데 박경일 과장과 이용철 과장이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못하게 했다.
다들 의아해할 무렵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에 손일석과 이경석까지 들어왔다. 그 뒤로 응급실 간호사 4명이 더 보였다.
유석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히 구미 전체 회식인데.”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게요. 그런데 장 과장님하고 변 과장님은 왜 오셨죠?”
“글쎄, 정말 왜 오셨지?”
잠시 후, 복 매운탕이 들어왔다. 새콤달콤하게 무친 복 껍질과 밑반찬들까지,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구미에서 유명하다는 복 매운탕 맛은 어떨까?
보글보글 끓는 매운탕의 냄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젠 경상도 음식에 완전히 적응한 김지훈이 배를 움켜잡았다. 구미에 와 이렇게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박경일 과장이 소주병을 들고 소리쳤다.
오늘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유석재였다.
“유석재 선생, 잔 받아.”
“예, 과장님.”
잔을 받는 유석재의 입이 쫙 찢어졌다.
“자자! 다들 잔 채우세요.”
박경일 과장이 주변에 술을 따라 주며 일어났다.
“오늘은 유석재 선생의 첫 수술을 축하하는 자립니다. 유석재 선생이 인턴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시간이 빠르네요.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일반 외과를 지원한 인턴들에게 차례차례 시선을 주었다. 김지훈과 신현수, 그리고 손일석과 이경석.
모두 일반 외과에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최소한 3명은 내년에 같은 자리에서 볼 가능성이 높았다. 신현수의 일이 아니었어도 반드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을 제게 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단번에 몇 걸음씩 올라서려고 하면 도리어 오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한 걸음이 쌓이고 쌓여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박경일 과장의 시선이 신현수에게 향해 있었다.
“환자를 보는 사람은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욕심을 내고, 무리를 하면 자신은 물론 환자까지 다치니까요. 우린 모두 욕심이 있고, 바라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환자 앞에서는 절대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이 쌓여야만 몇 걸음을 도약할 수 있듯, 기본에 충실했으면 합니다.”
박경일 과장의 눈길을 느낀 김지훈이 더욱 귀담아들었다.
“그래야 실수를 바로잡고,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고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좀 딱딱한 말이지만, 우리 과에 지원한 인턴 선생들이 넷이나 참석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유석재 선생의 집도식을 진행할까요?”
“예, 쌤. 배고파 죽겠어요.”
마취과 간호사의 말에 다들 웃었다.
최철한이 박경일 과장에게 하얀 케이스를 하나 건넸다.
유석재가 쑥스러워하며 앞에 섰다.
케이스가 열렸다.
첫 수술을 할 때 사용한 금색 칼 대와 은색 메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석재 선생, 축하해. 최고의 써전이 되기를 바란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케이스를 받아 든 유석재는 웃음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저 벅찬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크게 박수를 쳤다.
“유석재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축하해요, 새앰.”
방이 들썩거릴 정도로 큰 박수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축하한다는 말에 유석재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경일 과장이 잔을 높이 들었다.
“자자! 다들 건배합시다. 유석재 선생과 우리 모두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가끔은 정말 술이 달 때가 있었다.
오늘이 딱 그날이었다.
어느 과든 술에 떡이 되는 날이 있다.
일반 외과는 새로운 전공의를 환영하는 입국식과 첫 수술을 한 후 벌어지는 집도식이 바로 떡이 되는 날이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유석재가 잠시도 앉아 있질 못했다.
과장들이 주는 술 3잔.
위의 연차들이 주는 술 2잔.
응급실과 수술실, 그리고 병동 간호사들이 주는 술 3잔.
마지막으로 인턴들을 대표해 김지훈이 따른 술 1잔.
도합 아홉 잔을 숨도 쉬지 못하고 들이켰다.
김지훈이 매운탕 국물을 떠 주지 않았다면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시작이었다. 공식적인 외과 회식이 벌어지면 소주가 박스로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구나 오늘은 성형외과와 흉부외과 과장까지 참석했다.
인원이 많아 한 잔씩만 마셔도 3병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소주와 맥주병이 어지럽게 널리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온 동네의 사투리가 다 들렸다.
그야말로 왁자지껄 시장 한복판이었다.
테이블마다 술병이 쌓일 무렵, 장성기 과장이 손을 흔들며 일어섰다.
“주목, 다들 주목.”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오늘 축하해 줄 사람이 또 있습니다.”
간호사들이 동시에 물었다.
“샘, 누구요?”
“아아! 말 끊지 말고. 제가 구미에 내려온 이후 잘했다는 소릴 한 인턴이 딱 둘이 있어요. 오늘 그 2명이 다 이 자리에 있어서, 이 자리를 빌려 칭찬해 주고 싶네요.”
장성기 과장에게 쏠렸던 시선이 우르르 김지훈에게 집중됐다. 난데없는 말에 술기운이 올라 발개졌던 김지훈의 얼굴이 뻘게졌다.
그런데 또 한 명은 누굴까?
그때 변상훈 과장이 가세했다.
“저도 같이 칭찬합니다. 체스트 튜브(흉부 도관) 박은 놈은 한 놈이죠. 다들 누군지 아시죠?”
“네, 샘.”
“김지훈, 일어나, 인마. 아! 그리고 석재가 작년에 우리 과 안 돌아서 그렇지, 돌았으면 당연히 최초는 석재 거였다는 것도 아시죠?”
“그럼요, 샘.”
쑥스러워 어쩔 줄 모르던 김지훈이 혼자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아우! 쪽팔려. 수처는 기본인데.”
장성기 과장이 살짝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손일석을 가리켰다.
“손일석, 넌 왜 안 일어나?”
“예? 과장님, 저요?”
“그래, 인마. 김지훈보다는 요만큼 못하지만, 아주 잘하고 있어. 칭찬받을 만해.”
“와아!”
탄성이 터지자 손일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산만했던 분위기가 다시 뜨거워지자 박경일 과장까지 일어났다.
“신현수, 이경석, 니들도 일어나. 현수는 우리 과 최초로 인턴인데 퍼스트를 섰고, 경석이 저 자식은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왔으니까 칭찬받아야지.”
이경석이 움찔거리며 항의했다.
“왜 이러세요, 과장님. 제가 언제 그랬어요.”
“인마, 다들 네가 옛날에 어땠는지 알아. 넌 돌아온 탕아야. 그래도 형이 정말 기쁘다. 너, 우리 과 꼭 붙어서 내년에 다시 보자.”
술이 많이 올랐는지 형 소리까지 나왔다.
“석재야, 뭐 하니. 잔 채우고 일어나라. 자! 여기 다섯이 우리 과 기둥이 될 선생들입니다. 모두 축하해 줍시다. 위하여!”
“위하여!”
술잔을 탈탈 털고 다시 채웠다.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외쳤다.
“우리 잘난 인턴들을 위하여!”
숨 돌릴 틈도 없이 술잔이 비워졌다.
응급실 간호사가 잔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과장님, 설마 이걸로 끝이에요? 이 자리는 박 과장님께서 사시는 자리잖아요. 맨입으로 축하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가? 그럼 2차는 우리가 호프집에서 쏜다.”
다들 좋아서 난리가 났다.
가만보면 의사들만큼 술이 센 직업도 없었다.
간호사들도 결코 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복 매운탕에 튀김까지 깡그리 비웠고, 빈 소주병들로 가득한 박스 2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싱글벙글의 복 매운탕!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것이 정말 맛있었다.
‘맛있네. 다음에 경아 씨랑 꼭 먹어야겠다.’
술이 오르자 고경아 생각이 더욱 났다.
1차가 끝난 후 당직을 서야 하는 사람들은 병원으로 돌아갔다. 즐거운 회식에 분위기까지 떴는데, 술 한잔하지 못하고 들어가니 가장 아쉬운 사람들일 것이다.
최철한이 즐거운 짜증을 내며 유석재를 힘껏 안았다.
“유석재, 축하한다. 내일 아침 드레싱까지 내가 할 테니까 마음 놓고 마셔.”
“선생님,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는 유석재를 보며 다들 웃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어야 하는 자리가 집도식이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유석재와 함께 호프집으로 향했다.
달리 주문할 것도 없다.
1000시시짜리 맥주와 감자튀김에 쥐포와 땅콩이 다였다. 장성기 과장이 과일을 외치는 간호사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간만에 안주가 풍성해졌다.
흥겨운 음악 소리에 말소리가 뒤엉키며 시끌벅적해졌다.
어느새 간호사들이 유석재와 인턴들을 포위했다.
고참들이라고 해도 서른이 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신참은 이제 스물 두셋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노땅은 노땅끼리.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끼리.
술기운에 코까지 빨개진 간호사가 김지훈에게 맥주잔을 내밀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