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경험은 생각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
인턴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수술 기록을 외우는 것과 실제로 수술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인턴의 경험과 능력으로는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가 없다.
칼을 손에 쥐어 준다고 해도 못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현수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수술은 준다는 말에 한동안 묘한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은 이 사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신현수와 시선을 마주치던 박경일 과장이 집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석재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비켜섰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신현수가 집도의 자리에 섰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시작해.”
여전히 박경일 과장의 목소리는 좋지 않았다.
김지훈은 너무 놀라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수술이 시작됐다.
박경일 과장에게서 과도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제 5개월째에 접어든 인턴에게 칼을 줬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어어! 천천히. 일단 지혈을 해야지. 피 나는 것 안 보여? 살살해, 살살. 근육을 잘못 벌리면 안으로 지나가는 혈관이 끊어져. 그러면 골치 아파.”
“예, 과장님”
자신 있게 시작했던 신현수도 당황하고 있었다.
시작인 피부를 절개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조마조마했는지 박경일 과장은 천천히 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수술이 진행될수록 걱정이 앞서는지 모든 과정을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했다.
유석재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김지훈의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열심히 똑바로 살면 세상은 공정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벽은 분명 존재했다.
총장일까?
금 과장의 과잉된 행동일까?
아니면 신현수의 욕심일까?
온갖 생각이 스쳤다.
화가 났다. 환자는 누구나 평등하듯, 의사도 누구나 공평한 기회를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섣부른 욕심이나 의욕은 환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 줄 수 있다고 들었다.
‘이건 정말 아닌데.’
상대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마취 유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김진호가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혼자 힘으로 악착같이 노력해 학교를 마쳤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마취과에서 무엇을 배울지 정하고 온 인턴은 김지훈이 처음이었다.
한 잔의 술을 나눴을 때, 일반 외과를 향한 꿈과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도 알 수 있었다.
꿈이 없다면 그저 시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꿈이 있다면 시샘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마취과인 자신도 이 상황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일반 외과를 지원한 김지훈의 좌절과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선배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김지훈을 다독이고 싶었다.
“김지훈 선생, 나가서 커피 좀 타라.”
“커피요?”
“그래, 갑자기 커피가 당기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김진호의 마음을 알 것 같은지 김지훈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수술실을 나섰다. 그때 박경일 과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굿 모닝이네.”
굿 모닝 아뻬(good morning appe)!
가끔은 복막을 열자마자 바로 아뻬가 보이는 수가 있었다. 마치 방긋하며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가장 쉽고 간단하게 끝나는 경우였다.
김지훈이 나가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아뻬를 절제하는 신현수를 보았다.
‘아뻬 하다 문제 생기면 난리 났을 텐데,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신현수, 정말 운도 좋구나.’
어깨가 축 처져 회의실로 들어선 김지훈이 믹스 커피를 탔다. 커피 잔을 휘휘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굴 원망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신현수를 욕한다고 마음이 시원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커피가 다 식도록 김진호가 오지 않았다.
그 시간, 수술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박경일 과장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토록 냉정했던 신현수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수술 부위에 땀이 떨어질 정도였다. 간호사가 재빨리 수술용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노출된 이마와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아뻬 주위로 피가 새고 있었다.
“신현수, 동맥 확실히 잡아. 아뻬 하고 왜 죽는지 알아? 동맥 제대로 못 잡으면 출혈로 죽어. 배 닫고 나면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 때까지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인마. 떨지 말고.”
아뻬로 들어가는 동맥은 가늘다. 하지만 동맥은 아무리 가늘어도 눈에 보일 정도라면 위험한 구조물이다. 제대로 묶지 않으면 복강에 피가 가득 차도록 피를 내뿜는다.
수술 후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릴 때가 돼서야 그 사실을 인지한다면 자칫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도 동맥의 출혈을 잡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수술 중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차분하고 냉정하던 신현수가 허둥대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경험의 부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신현수를 본 박경일 과장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직접 집도를 했다.
“신현수, 자리 바꿔. 유석재, 네 자리로 가.”
불과 10초도 안 돼 동맥을 잡아 출혈을 막았다.
주변 장기에 묻은 피를 닦아 낸 후 수술 부위를 꼼꼼하게 살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역순으로 배를 닫았다.
신현수는 멍한 표정으로 어시스트를 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수술을 끝낸 박경일 과장의 눈에 후회의 기색이 역력했다. 구미 일반 외과를 책임지는 사람은 금경태 과장이 아니다. 당연히 부당한 요구는 거부했어야 했다.
신현수는 총장의 아들이 아니라 인턴이다. 자신이나 전공의들에게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인턴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라는 사실까지 간과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를 느낀 박경일 과장이 신현수를 조용히 불렀다. 마무리는 유석재 혼자서도 충분했다.
“신현수, 네가 인턴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오늘 일은 잊고, 기본에 충실해. 네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준 내 잘못이다.”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아주 쉽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현실은 냉혹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김지훈을 앞서야 한다는 강박과 자존심.
윤서연에 대한 애증.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다음번에는 정말 잘할 수 있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넌 인턴으로서 정말 뛰어나고 열심히 하니까 기죽을 필요 없어. 다만 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자칫 그게 독이 돼 네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박경일 과장도 더 이상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금경태에게 신현수가 부탁을 했든, 안 했든 일차적인 잘못은 자신에게 있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책임질 사람도 자신이었다.
마치 괜찮다는 듯 어깨를 두드린 박경일 과장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신현수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병동으로 올라갔다.
‘인턴치고는 뛰어나다고? 당연한 말을 위로처럼 들어야 할 이유가 없어.’
한 번 상처 난 신현수의 자존심은 결코 쉽게 회복될 수 없었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힐 심산으로 회의실로 들어선 박경일 과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김진호와 함께 있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고 있었다. 문득 이혁민 교수도 전화를 했었단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김지훈에 대해 물었을 때 유석재가 한 말에 꽤나 놀랐었다.
‘지훈이요? 부모님이 고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6년 내내 고학했어요. 나 같으면 돈 잘 버는 과부터 찾았을 텐데. 그 자식, 일반 외과 못해서 안달이 난 놈이에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솔직히 신현수보다 더 엑설런트해요. 그런데 과장님, 그건 왜 물으세요?’
궁금함에 이것저것 물었고, 김지훈이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들었다.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입에 거품을 물고 칭찬할 때는 왠지 모를 뿌듯함까지 느꼈었다.
오늘 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는 말단인 인턴이고, 까마득한 후배였지만 어리다는 말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신현수와 동기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이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을지도 몰랐다.
“김지훈, 앉아.”
“예, 과장님.”
“오늘 일은 기억에서 지워. 네가 속사정까지 알 이유도 없고, 내가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한 마디는 꼭 해 주고 싶다.”
김지훈이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석재한테 대충 얘기 들었다. 나도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변 과장이나 장 과장에게 들어서 잘 알고 있어. 일반 외과는 말이야, 아니 의사에게는 기본이 무척 중요해. 그런 면에서 넌 아주 잘하고 있어. 아뻬 하나 먼저 했다고 더 뛰어난 외과 의사가 되진 않아.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과장님.”
“넌 지금 절대 뒤처진 게 아니야. 기본이 튼튼해야 제대로 된 일반 외과 의사가 될 수 있어. 나도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이혁민 선생님께서도 내게 그렇게 당부하시더라.”
“이혁민 선생님께서요?”
김지훈이 깜짝 놀라 묻자 박경일 과장이 슬며시 웃었다.
“네가 너무 잘나서 자만할까 봐 이혁민 선생님이 걱정을 다 하시더라. 기본도 모르면서 욕심을 내면 몽둥이를 들어도 좋다고 하셨어. 한 번도 인턴 일로 전화를 하신 적이 없는 양반이야. 그만큼 네게 거는 기대가 크시다는 말이겠지.”
이혁민 교수까지 거론했으니 단순히 위로하는 말이 아니었다. 박경일 과장이 그럴 이유도 없었다.
문득 혼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선배 의사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평생 멘토로 모시고 싶은 이혁민 교수는 물론 변상훈 과장과 장성기 과장이 자신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박경일 과장 역시 할 필요조차 없는 말까지 하며 김지훈을 걱정하고 있었다.
신현수에게 총장인 아버지와 금경태 과장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더 많은 선배 의사들과 동료들이 있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보다 더한 역경도 헤쳐 나왔다,
그동안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최고의 의사에서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가진 것이 없다고 꿀릴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결코 의기소침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 출발선이 다를 뿐이야. 학교 다닐 때 신현수는 나보다 훨씬 앞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정말 많이 좁혔잖아. 결승선에 누가 먼저 들어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난 최선을 다해, 내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면 된다.’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는 꿈과 목표는 결코 승부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현수가 앞서간다면 도리어 환영할 일이었다. 그보다 더한 자극이 어디 있을까?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다.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과장님, 김진호 선생님, 커피 새로 타 드릴까요? 다 식었는데요.”
김진호가 허허 하며 웃었다.
“그래, 따뜻한 커피 좀 마시자. 타는 김에 머릿수에 맞춰 타. 박경일 과장님, 커피 마실 시간은 있으시죠?”
분위기가 밝아지자 박경일 과장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 참! 인턴 때문에 울고, 인턴 때문에 웃네. 쯧! 정신 바짝 차리자. 저런 놈이 후밴데, 선배인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예, 김진호 선생님. 마시고 가야죠. 김지훈 선생, 석재 것도 타라. 바로 위니까 잘 보이면 정말 많이 배울 거다.”
“예, 과장님.”
커피를 타면서도 김지훈이 유쾌하게 웃었다.
김진호의 농담조차 즐거웠다.
“원! 과장님도. 인턴 나부랭이한테 별말을 다 하시네요. 김지훈 저 자식, 조금 있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싹 잊어먹을 놈입니다.”
잠시 후, 마취과와 일반 외과가 모두 모였다. 병동에 있던 최철한까지, 무슨 일인지 궁금해 내려온 참이었다. 가장 축하를 받아야 할 신현수가 없다는 것이 무척이나 아이러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