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5화 (65/1,329)

제9화 경험은 생각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서연아, 일주일 동안 오프도 없이 근무해야 돼. 휴가 앞뒤로 가면 2주 연속이야. 너, 체력이 되겠냐?”

“어머! 그러네. 그럼 내가 중간에 갈게. 지훈이가 내 생각을 다 하고 웬일이야?”

“웬일은, 이건 기본이야, 기본. 현수, 너는 언제 갈래?”

신현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전과는 뭔가 달랐다.

김지훈이 평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보였다.

윤서연의 태도에 화까지 나 평소처럼 감정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현수가 나직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난 첫 번째 주에 갔다 올게.”

“오케이. 그럼 난 마지막 주. 결정했다. 번복하기 없어.”

이것저것 재는 것도 없이 시원하게 휴가 날짜를 정한 김지훈이 이내 식판에 얼굴을 박았다.

신기하게도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신현수가 일어났다.

“서연아, 오늘 오프지? 우리도 밥 먹으러 가자.”

윤서연이 머뭇거렸다.

“지훈아, 부족하면 나가서 같이 먹을래?”

“아냐. 나, 오늘 당직이야. 맛있게 먹어라.”

김지훈이 잘 가라고 손까지 흔들자 윤서연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현수가 아무리 동기라지만, 김지훈을 앞에 두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갈 수는 없었다.

자신을 향한 신현수의 눈빛이 점점 부담스럽기만 했다.

이제는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수야, 나 저녁 생각 없어. 미안해.”

밥을 먹던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윤서연을 보았다.

신현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또 벌어졌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지훈 때문에 자신의 말을 거부한 것이다.

자존심이 무참히 무너졌다.

‘김지훈!’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든지 신현수가 연거푸 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 있다간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현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

목요일 오후.

박경일 과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취과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무 말도 없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김진호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이용철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박 과장, 왜 그래?”

“휴우! 정말 난처하네. 화도 나고.”

“무슨 일인데 그래?”

“금 과장님 때문인지, 총장님 아들 때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뜬금없는 말에 더욱 궁금해진 이용철 과장이 재촉을 했다.

“빙빙 돌리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 봐.”

박경일 과장이 한참을 머뭇거렸다.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사실은 신현수가 구미에 오기 전에 금 과장님의 전화를 몇 번 받았어. 우리 과 돌 때 잘 가르치라는 거야. 우리 과를 지원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 솔직히 총장님의 아들이니 신경도 쓰이고 말이야.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는데, 계속 전화를 하시네.”

“뭐라고?”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일 잘하냐고 물으시더라고. 꽤 엑설런트한 데다 열심히 해서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지.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퍼스트를 세우라는 거야.”

“이미 줬잖아?”

이용철 과장이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해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사실 석재를 두고 인턴한테 퍼스트를 주는 게 말이 돼? 그 정도는 빤히 아는 양반이 오늘… 어후! 답답해 미치겠다.”

박경일 과장이 말을 하다 말고 한숨만 내쉬었다.

“나까지 답답해져. 속 시원하게 말해 봐.”

“어떻게 알았는지, 퍼스트 잘 섰으면 수술을 주는 게 어떻겠냐는 거야. 아무리 뛰어나도 인턴 아니냐. 미치겠다, 정말.”

“정말 수술을 주래?”

이용철 과장과 김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건 전례가 없는 일 정도가 아니라 황당함 그 자체였다.

“그래. 일단 아뻬 한두 개 정도 주고, 상황이 되면 1년차 일도 좀 시키란다. 말이야 부탁처럼 말씀하시지만, 이게 부탁이냐, 오더(order)지?”

“허 참! 아무리 총장님 아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인턴에게 수술을 줘? 금 과장님이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 총장님 성격상 잘 봐달라는 말은 할지 몰라도 아들 문제로 그런 부탁까지 할 리는 없을 텐데.”

“자식 일인데 그 속을 누가 알겠어. 그나저나 어떡하면 좋겠냐.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죽겠네.”

대부분의 구미에 있는 과장들은 서울이나 천안으로 발령을 받기를 원했다. 연고 문제도 있지만, 구미 병원의 규모로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기도 힘들었다. 의욕은 넘치지만, 조금만 큰 질환이어도 상당수 환자들이 대구의 큰 병원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명색이 교수인데, 일반 종합 병원 수준에서 머물기를 바라는 과장들은 없었다.

하기에 인사권을 쥐고 있거나, 영향력이 큰 과장급 의사들의 말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냥 대충 대답하고 넘어갔어야지.”

“나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지. 그런데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결과를 알려 달라는 거야. 하루 이틀 내에 수술을 주라는 얘기지, 뭐.”

“아니, 아뻬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금 과장님이 있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지나가. 나중에 사정이 그랬다고 하면 되잖아.”

“아이구! 말을 마세요. 내 입이 방정이지. 아뻬 많냐고 물어보길래 오늘도 있다고 했다. 으이씨!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지 몰라. 그러니 이 지경까지 왔지.”

이용철 과장도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문제네. 그렇다고 줄 수도 없잖아. 아무리 뛰어나도 인턴은 인턴인데, 수술할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해도 네가 인턴에게 아뻬 준 거 알면 다른 선생님들이 난리 치지 않겠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금 과장님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등 돌린 선생님들도 많잖아.”

“그러게 말이다. 인턴한테 수술은 무슨. 어휴!”

박경일 과장이 여전히 결정을 내리기 힘든지 전공의인 김진호에게까지 물었다. 동기인 탓도 있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김진호 선생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과장님, 저 2년찹니다.”

“로컬(local:대학 병원 이외의 병원을 지칭)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을 텐데, 좀 도와줘. 학교 다닐 때 내가 무지하게 챙겨 줬잖아. 친구야, 나 정말 심각하다.”

급기야 친구까지 찾았다.

김진호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과장님, 잘은 모르지만 원칙대로 사는 게 좋지만은 않더라구요. 가끔은 눈 딱 감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합니다.”

“그런가? 에휴! 씨펄! 내 신세도 참. 신현수 그 자식도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난리야.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다 해 줄 텐데 말이야.”

“신현수가 뭘 어떻게 했어?”

흠칫 놀란 박경일 과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금 과장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는 몰라도, 은연중에 총장님과 신현수가 원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물론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할 수는 없었다. 신현수가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앞뒤를 분간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박경일 과장이 3년차에게 오전 수술을 맡겼다. 간간이 수술실을 오가며 확인만 할 뿐이었다.

식욕까지 잃었는지 박경일 과장은 점심도 걸렀다.

그때 외부에서 한 통의 전화가 연결됐다.

마치 자리에 있던 이용철 과장에게 손짓까지 하며 나가 있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예, 예, 그게 말입니다. 아! 예.”

문틈으로 그저 ‘예’ 소리만 들렸다.

통화가 끝난 후 이용철 과장이 들어간 뒤에도 한참 동안 박경일 과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뚫어지게 전화기만 보다 결국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석재야, 난데. 오후에 수술하기로 한 아뻬 환자 말이야. 철한이 들어오지 말라고 해.”

유석재가 이유를 물어본 모양이었다.

“사정이 복잡하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그리고 신현수 있지. 아뻬 오피 레코드(operation record:수술 기록) 달달 외우고 있는지 확인해. 걔가 수술한다.”

깜짝 놀라는 소리가 전화가 너머까지 들렸다.

박경일 과장이 대답도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만 봐서는 한바탕 욕을 퍼붓는 것 같았다.

아뻬 환자가 올라왔다.

젊은 연령대에서 빈발하는 질환답게 이번에도 20대 초반의 남자 환자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지훈이 마취과 용지에 환자에 대한 사전 기록을 하고 김진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마취가 시작되고 사인이 떨어졌다.

“수술하셔도 됩니다.”

박경일 과장이 묵묵히 환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빨리 수술하라고 재촉했을 김진호가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왜들 이러시지? 두 분이 싸웠나?’

엉뚱한 상상을 한 김지훈이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가만히 뒤로 물러나 있어야 불똥이 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던 박경일 과장이 신현수를 보았다.

“아뻬 수술 기록 다 외웠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지금 외워 봐.”

수술을 앞두고 왜 갑자기 신현수에게 아뻬 수술 과정을 말해 보라는 걸까?

점점 더 궁금해진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신현수가 수술 과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확실히 심었는지 막힘이 없었다.

인턴이 수술 과정을 외우고 있다니,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김지훈도 일반 외과를 돌 때 가끔 틈을 봐서 읽어 보기는 했지만, 외운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훨씬 앞서가도 모자랄 지경인데, 신현수는 자신이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수, 이 자식. 정말 열심히 도네. 이거 장난 아닌데.’

문득 초조해진 김지훈이 내심 자책을 했다.

그때 상상도 하지 못할 말이 들렸다.

“할 수 있겠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묻는 것일까?

설마 수술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 있어?”

“예, 자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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