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뒤틀리는 관계 (3)
보사부 고위 공무원의 아들인 정갑수.
재단 이사의 아들인 악어.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어울리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명령에 가까운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었다면 상종도 안 했을지 몰랐다.
악어의 입에 발린 말에 기분이 더 나빠졌다.
게다가 오늘은 윤서연까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윤서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총장인 아버지와 교분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재력가의 딸이니 자신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뜻 마음을 열지 않는 도도한 모습까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자신을 보는 윤서연의 눈빛이 왠지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서연, 내가 퍼스트를 섰다고 말했는데도 몸이 안 좋다고 안 나와. 설마 다른 놈을 좋아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자꾸만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에 신현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때 악어가 뜻밖의 말을 했다.
“갑수야, 근데 너 요새 일 좀 한다며? 네가 웬일이냐?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
정갑수가 얼굴을 구겼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나 그냥 인턴만 하고 개업해서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근데 김지훈 그 개새끼가 날 건드렸어. 내 가만히 안 둔다.”
“나도 그 새끼가 마음에 들진 않는다만, 같은 인턴인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장성기하고 변상훈이 무지하게 감싸고돌아, 인마. 서울에는 이혁민 교수가 있고. 그런데 방법이 있어? 이럴 땐 일단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이야. 그런 새끼 잡는다고 나까지 손해 볼 수는 없지.”
악어의 말에 정갑수가 코웃음을 쳤다.
“악어 너도 한물갔구나. 나, 일반 외과 하기로 결정했다.”
“뭔 소리야? 그리고 네가 무슨 수로 일반 외과를 해? 아직은 그렇게 만만한 과가 아니야, 인마.”
슬며시 비웃는 악어의 말에도 정갑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아버지에게 부탁 좀 해 달라고 말했다, 이 자식아. 금경태 과장님이 아버지하고 친구니까 문제없어. 기본에 충실하라고? 그 정도는 내가 해 준다.”
이미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어이가 없는지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다른 과도 아닌 자신이 전공하는 과에 정갑수가 들어온다니,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 인간이 일반 외과를 뭐로 아는 거야?’
되지도 않을 소리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정갑수의 말에 신현수가 돌연 눈빛을 굳히며 입을 다물었다.
“내 김지훈 그 새끼의 발목을 확실하게 잡고 만다. 결정적인 순간에 확 고꾸라뜨리면 볼만할 거야. 날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하겠지.”
“야! 정갑수! 너 보기보다 독하다.”
“너보단 내가 나아. 김지훈이 그 새끼가 날 이렇게 만든 거지. 씨팔, 이 지긋지긋한 병원에서 4년을 더 썩어야 하네.”
도대체 정갑수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을까?
신현수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면서도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지훈과 정갑수가 싸운다?
실력으로라면 정갑수는 절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갑수의 아버지가 가진 병원과 재단에 대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상황은 완전이 정반대가 된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에 잠겼던 신현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정갑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었다.
“현수야, 내 말이 마음에 들지? 그러니까 너도 나 밀어줘야 된다. 총장님하고 과장님께 말 좀 잘해. 너도 김지훈이 싫어하잖아?”
같이 엮어 보겠다?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난 아무 감정도 없어. 혼자 알아서 해.”
“새끼, 마음에도 없는 말은. 나도 다 알아, 인마. 그 새끼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야. 너 혼자 상대하기에는 힘들 거다.”
‘나 혼자 상대하기 힘들다고? 정갑수, 이 인간이 도대체 날 어떻게 보는 거지?’
신현수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존심을 건드렸다.
실수를 깨달은 정갑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흠흠! 악어, 술이나 마시자.”
술잔을 오가는 내내 신현수는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이런 일에는 손가락 하나도 걸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정갑수의 뜻대로 될지도 미지수였다.
12시가 다 됐다. 김지훈이 거의 실신 지경이 된 윤서연을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나름 예상은 했지만, 맥주 몇 모금에 이럴 줄은 몰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김지훈이 손일석에게 구원을 청했다.
“어후! 힘들어. 서연이 얘는 저번에도 그러더니 뭘 믿고 이렇게 뻗냐. 학교 다닐 때도 이랬나?”
“학교 다닐 때는 안 그랬는데. 술 못 마신다고 입에도 안 대던 애잖아. 이상하네, 실연을 당했나?”
“차였으면 징징 짜야지, 웃다가 그냥 뻗냐? 아후! 힘들어. 정말 무겁네. 얘 좀 업어, 인마.”
“나도 정신없어. 다리가 다 풀리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틀거리며 등을 내밀었다. 그런데 윤서연이 김지훈의 목을 꼭 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어떻게든 윤서연을 내려놓으려던 김지훈이 숨을 헐떡이며 포기했다.
“으아! 서연이가 날 죽이네. 얘, 왜 안 떨어져?”
그제야 가끔씩 눈을 떴던 윤서연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간신히 병원 앞에 도착했다.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김지훈의 다리가 다 풀렸다.
그때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다 ‘끽’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췄다.
“김지훈!”
신현수가 상기된 얼굴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깜짝이야. 어, 신현수?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인마.”
“너, 지금 서연이 업은 거야?”
김지훈이 힐끗 윤서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업은 애가 서연이 맞네, 맞아. 그런데 왜?”
답답한 한숨을 내쉰 신현수가 거칠게 차 문을 닫았다.
“갑수 형, 병원에 다 왔으니까 먼저 들어가.”
“왜 인마. 뭔데 그래?”
술에 취한 정갑수와 악어가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술이 깬 김지훈이 인상을 구겼다.
‘재수 없는 놈들을 단체로 보고, 오늘 뭔 날인가?’
그래도 선배는 선배다.
“안녕하세요.”
혀 꼬부라진 목소리에 악어가 얼굴을 찡그렸다.
“에이! 재수 없어. 씨팔! 인사 똑바로 안 해? 이 새끼, 일은 안 하고 술이나 처먹고 앉았네.”
‘나도 재수 없어, 이 새끼야.’
정갑수가 투덜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술 잘 먹고 들어와서 막판에 기분 다 망가지네. 하필이면 저 새끼야. 신현수, 넌 뭐 하려고?”
술이 오른 탓인지 김지훈도 인상을 꾸겼다.
‘씨펄! 그때 확실하게 팰 걸 그랬나?’
평소 우연히 만나면 고개를 돌리며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정갑수였다. 거나하게 오른 술과 옆에 있는 악어가 용감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정갑수의 말에도 신현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김지훈,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넌 들어가.”
“네가? 네가 왜?”
아무리 오늘 일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 고울 수는 없었다. 신현수도 대답이 궁한지 순간 입을 열지 못했다.
“많이 취했잖아. 그러다 누구 하나는 다쳐. 난 술을 안 먹었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평소 이런 걱정과 호의를 베풀었던 신현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다할 일도 아니었다.
일단 너무 힘들었다.
“그래? 힘들어 죽을 뻔했는데, 고맙다. 소주 3잔에 맥주에는 입만 대고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네. 먹지 말라니까.”
김지훈이 목을 감고 있던 윤서연의 팔을 풀었다. 그렇게도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윤서연이 깊은 잠에 빠졌는지 맥없이 신현수의 등에 업혔다.
“잘 가라, 신현수.”
‘정갑수, 악어, 니들은 빼고.’
손일석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저 자식이 웬일이지?”
술기운에 맡기긴 했지만, 막상 신현수에게 업힌 윤서연을 보자 은근히 걱정이 됐다.
“여자 숙소가 좀 외진데, 별일 없겠지?”
“현수가 그럴 놈이냐? 갑수나 악어면 몰라.”
“그렇지?”
김지훈이 막 여자 숙소로 들어가는 신현수를 보았다.
뭔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쪼그리고 앉아 시계만 보았다.
신현수가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분명 몸이 안 좋아 못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김지훈과 술자리를 한 것도 모자라 술에 취해 업히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윤서연, 정신 차려.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술을 이렇게 먹었어?”
큰 소리에 눈을 뜬 윤서연이 중얼거렸다.
“으응! 뭐? 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동기는 여자 아니야?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신현수가 숙소의 문을 열다 말고 멈췄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너, 그러는 거 아냐. 나랑 밥 한번 먹는 게 그렇게 어려워? 꼭 내가 찾아가야 해?”
윤서연이 술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신현수가 윤서연을 침대에 눕혔다.
한동안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윤서연을 보다 조용히 문을 잠그고 나왔다.
‘윤서연, 네가 김지훈을 좋아했단 말이야? 하필이면 왜 그 자식이야, 왜 김지훈이야.’
신현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학교 다닐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인턴이 된 이후 모든 것이 꼬이고 있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여기저기서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덕에 인턴이지만 일반 외과에서 1st까지 섰다.
결코 아버지의 후광이나 금경태 과장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무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이유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었다.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이유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윤서연의 마음까지 알았다.
“김지훈.”
신현수가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당연히 차지하고 있어야 할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김지훈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 누가 더 뛰어난지 보여 주마. 넌 내 상대조차 될 수 없어.’
이젠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딱 5분 만에 나왔으니 별일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 언제 술을 먹었냐는 듯 멀쩡하게 나타난 김지훈이 수술실에 들어온 신현수를 불렀다.
“현수야, 이따 저녁에 서연이하고 잠깐 만나자.”
신현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자식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봐라. 이따 보자고.”
“서연이는 왜?”
그제야 얼굴을 돌린 신현수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이 자식이 점점 왜 이러지. 나한테 무슨 감정 있나?’
은근히 자신을 멀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갈수록 도가 지나쳤다.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이 없는 김지훈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응급실 돌 때 휴가 가야 되잖아. 각자 언제 갈지 미리 정하자고.”
“알았어. 몇 시에?”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보자. 서연이한테는 네가 연락할래?”
신현수가 고개만 끄덕였다.
‘저놈의 찬 성격은 언제 고치려나.’
김지훈이 혀를 차며 김진호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하면 할수록 재밌으면서도 어려운 것이 인투베이션이었다.
그날 저녁.
구내식당에 셋이 모였다.
좀처럼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신현수가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윤서연도 몇 번 숟가락질을 하다 결국에는 수저를 놓았다.
둘 다 서울에서도 구내식당 밥은 거의 먹지 않았다.
아니, 입에 맞지 않아 못 먹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나도 지훈이랑 같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는데, 속상해 죽겠네. 먹기는 너무 힘들고, 어쩜 좋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이 밥을 한입 가득 물고는 맛있게 먹었다.
“자주 좀 먹어. 먹어 보니까 이 동네 음식도 은근히 맛있어. 서울하고는 뭔가 다른 오묘한 맛이 있다니까.”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타박을 했다.
“휴가 날짜 정하자며. 밥은 이따 먹고, 빨리 정하자. 나 시간 없어.”
“그래? 맛있는데. 휴가 때 둘이 응급실을 돌아야 하니까 일단 서연이가 중간에 가는 게 어때?”
윤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중간에 가라고?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