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3화 (63/1,329)

제8화 뒤틀리는 관계 (2)

마음에 맞는 사람과 같은 과를 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이경석과의 의국 생활도 정말 기대가 됐다. 먼저 붙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모두들 다시 한 번 유석재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환자를 스트레치 카로 옮기던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두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부럽습니다.”

“인마, 너도 내년에 할 텐데, 뭐가 부러워.”

“저도 선생님처럼 침착하게 할 수 있을까요?”

유석재가 씩 웃었다.

“글쎄, 욱하는 성질만 죽이면 되겠지.”

“에엥? 제가 욱하는 성격이라는 말씀이세요?”

“누가 알겠냐. 전적이 화려한데. 하지만 잘했어. 난 네 편이다. 하하하!”

악어와의 일을 안 것일까?

아니면 혹시 정갑수와의 일까지?

병원은 무척이나 좁은 사회였다.

그간의 일을 다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해도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김지훈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었다.

‘역시 맞붙는 것보다는 무시가 답이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1년차이자 학교 선배인 유석재가 하늘처럼 보였다.

인투베이션을 하고, 공기주머니를 짜면서 틈틈이 수술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이미 서울에서 더 큰 수술도 꽤 많이 보았다. 생각이 바뀐 탓인지, 아니면 시야가 넓어진 탓인지 박경일 과장의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 새삼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2년차인 최철한과 1년차인 유석재의 차이는 김지훈의 눈에도 무척 크게 보였다. 역시 의사에게 경험은 결코 무시할 수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최고의 자산이었다.

특히 외과 의사에겐 더욱 절실한 것이 경험이었다. 해 본 수술과 처음 해 보는 수술에 임하는 태도나 자신감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남모를 노력이 깔려 있었다.

‘저 정도의 실력을 쌓으려고 얼마나 기본에 충실했을까? 욕심 부리지 말고 인턴으로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최대한 완벽하게 배우고 해 내자.’

인투베이션을 하는 김지훈의 모습이 더욱 신중하게 변했다.

김진호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변함없는 일상이 지났다.

정규 수술과 응급 수술이 적당히 벌어진 덕에 김지훈도, 일반 외과 전공의들도 모두 적당하게 바빴다. 물론 병동과 응급실을 일차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유석재는 당연히 피로한 기색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뻬 수술이 있었다.

메이저 수술은 주로 박경일 과장이 했고, 가끔은 구미에 파견된 일반 외과 최고 연차인 3년차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아뻬나 탈장 등의 마이너 수술은 케이스가 적당하면 2년차인 최철한이 집도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당연히 박경일 과장이 직접 1st를 서거나 최소한 참관을 했다.

산업 공단이 있는 구미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다른 지역의 병원에 비하면 아뻬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거의 매일 벌어지다시피 할 정도였다.

부러움과 감탄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수술실에 들어온 박경일 과장이 오늘따라 조금은 심란해 보였다. 마취를 진행하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슨 큰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김진호가 사인을 줄 때까지도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박 과장님,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박 과장님.”

“아? 예, 김진호 선생님.”

대답을 하고도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박경일 과장이 신현수에게 물었다.

“신현수, 그동안 아뻬 수술 많이 봤지?”

구미의 일반 외과 인턴은 근무 내내 수술에 참여한다.

당연한 것을 묻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예, 과장님.”

고개를 끄덕인 박경일 과장이 최철한과 유석재를 보았다.

“최철한, 이번 수술은 세컨드에 서야겠다. 신현수, 퍼스트 자리로 가.”

다들 깜짝 놀랐다. 구미 일반 외과는 3년차까지 전공의가 3명이나 됐다. 더구나 2년차를 두고 인턴이 1st를 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흉부외과에서 1st를 선 일이 있긴 했지만, 지금과는 경우가 완전히 달랐다.

모두들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박경일 과장이 다소 착잡한 눈으로 손짓을 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신현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최철한과 유석재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며 수술실이 조용해졌다.

수술이 시작됐다.

박경일 과장이 천천히 수술을 진행했다.

그간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지 신현수가 제법 훌륭하게 1st를 섰다. 특히 가장 중요한 부위인 충수 돌기와 동정맥을 묶을 때도 실수 없이 타이(tie:실로 매듭을 짓는 것)를 했다.

최절한과 유석재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수술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박경일 과장도 그 마음을 아는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신현수의 손에 자꾸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이 보기에는 부러울 정도로 1st를 잘 서고 있었다.

‘잘한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의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혹시 총장인 아버지와 금경태 과장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경일 과장의 다소 가라앉은 눈빛도 신경이 쓰였다.

만일 추측이 맞다면 시작부터 너무 불공편한 일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총장과 금경태 과장이 밀어준다면 뒤처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불편한 생각은 빨리 지우는 것이 좋았다.

‘설마 아니겠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잖아. 과장님도 현수가 뛰어나니까 한 번쯤은 주신 걸 거야. 나도 이런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 더 열심히 하자.’

김지훈이 크게 숨을 쉬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지웠다.

“커트!”

마지막 실을 자르는 것으로 수술이 끝났다.

박경일 과장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신현수, 잘했다. 모두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김지훈이 흉부외과에서 1st를 섰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전공의들이 수술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일반 사회에서 의사들만큼 서열이 매우 분명하고 이를 중요시하는 곳도 없었다. 그러니 과를 불문하고 이번 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마취에서 회복된 환자를 옮기던 신현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처음 서는 퍼스튼데 잘하네. 부럽다.”

“너도 흉부외과에서 서 봤잖아.”

김지훈이 보다 어려운 수술에서 1st를 서긴 했지만, 수술이라는 관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일반 외과를 지원한 이상 난이도보다는 의미 자체가 달랐다.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신현수의 눈가에 자신감이 넘쳤다.

선배 의사들의 눈길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날 밤.

모처럼 삼겹살집에서 손일석과 술자리를 가졌다.

은비가 퇴원한 이후 가끔 수술실에서 손일석을 보았지만 얘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성형외과와 흉부외과를 어떻게 돌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신현수의 일로 기분이 싱숭생숭하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윤서연이 또 쫓아 나왔다.

김지훈이 살짝 콧등을 찡그렸다.

“서연이 너는 술도 못 먹으면서 왜 나왔어?”

“왜, 나는 나오면 안 돼?”

이경석과 술자리를 한 날 이후 윤서연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기억도 하지 못하는 윤서연에게 딱히 들어가라고 말할 핑계도 없었다.

“그건 아니고. 알았어, 앉아.”

윤서연이 태연한 표정으로 김지훈의 옆에 앉았다.

지글지글 삼겹살이 노랗게 익어 갔다.

잘 익은 삼겹살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얼굴이 벌게진 김지훈이 물끄러미 손일석을 보며 물었다.

“일석아, 과장님들이 뭐라셔?”

“나야 뭐, 잘 돌고 있지. 아직 잘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눈빛은 많이 유해지셨다. 거의 90프로쯤 왔어. 자식! 너만 그런 소리 들을 줄 알았지? 하하하!”

평소라면 손바닥을 부딪치며 좋아했을 김지훈이었다. 그런데 슬쩍 미소만 짓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축 처져 보였다.

“지훈아, 너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별일 없어. 우리 생활이 다 거기서 거긴데, 무슨 일이 있겠냐? 솔직히 조금 힘은 든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손일석이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난 또 뭔 일 있는 줄 알았네. 그러게, 내가 살살 돌라고 했지. 설마 나랑 술 마시는 게 싫은 건 아니지?”

“싫을 리가 있어? 몸은 힘들어도 사는 게 즐겁다. 이 밤에 친구와 술 한잔하는 게 어디냐.”

“자식. 나도 그래, 인마.”

문득 윤서연은 걱정이 없을까 싶었다.

“서연이 너는 힘 안 들어?”

“나?”

딱 한 잔을 비우고는 제사를 지내던 윤서연이 김지훈을 보며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한 가지만 빼면 정말 살 만해.”

“넌 뭐가 고민인데?”

윤서연이 김지훈을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 게 있어. 나, 한 잔 더 해도 되지?”

김지훈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서연아, 아서라. 또 업혀 가고 싶냐?”

“지훈이 네가 업을 텐데, 뭐가 어때?”

“내가? 야, 한 번이면 됐지. 일석아, 서연이 취하면 오늘은 네가 숙소에 데려다줘.”

손일석이 잔을 비우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싫어, 인마.”

“왜 싫어?”

“서연이 체격 좀 봐라. 말랐어도 키가 있는 애들이 생각보다 엄청 무겁잖아. 거기다 서연이는 글래… 어쨌든 전에도 너니까 술 먹고도 업고 갔지, 난 중간에 지쳐 쓰러져 죽는다.”

“뭐? 네가 내 몸무게를 알아?”

윤서연이 빽 소리를 지르자 손일석이 손을 저으며 잔을 내밀었다.

“아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서연아, 쭈욱 마셔. 지훈이가 업어다 줄 거야. 날 믿고 마셔. 건배.”

정말 잔을 홀딱 비웠다.

치사량에서 불과 한두 잔 남았을 뿐이었다.

김지훈이 불안한 눈으로 윤서연을 말렸다.

“서연아, 그러다 너 또 업혀 간다.”

“나 취하면 지훈이 네가 데려다줄 거잖아.”

“야, 네가 걷기만 하면 데려다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쓰러지잖아. 저번처럼 또 그럴래?”

윤서연이 새침을 떨었다.

“몰라. 하여간 나 지훈이 너 믿고 마시니까 알아서 해. 손일석, 넌 나 업을 생각도 하지 마. 뭐, 내 몸무게가 어째?”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농담처럼 들리는 말에 진담이 섞인 것 같았다. 평소 이런 상황이면 내일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파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술자리를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은 안 했지만, 신현수의 일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다.

겸사겸사 그간 은근히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도 싶었다.

술이 오른 김지훈이 손일석과 말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차’ 하는 사이 방심하고 말았다.

잔이 몇 번 오가는 사이 윤서연이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내친걸음이었다.

어차피 업어야 한다면 굳이 간만에 잡은 술자리를 끝낼 이유가 없었다. 이건 핑계였고, 사실 다소 과해진 술이 원수였다.

2차로 호프집까지 갔다.

부어라! 마셔라!

1,000시시짜리 잔이 몇 개나 사라졌다.

그 시간, 신현수도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정갑수와 악어가 몇 번이나 잔을 들었지만 신현수는 술잔에 입도 대지 않았다.

“현수야, 너 오늘 퍼스트 섰다면서 왜 그래? 마셔, 인마.”

“난 됐어. 갑수 형이나 마셔.”

“자식, 분위기 나빠지게 왜 이래?”

정갑수가 이죽거리자 악어가 혀를 찼다.

“눈치 없는 새끼. 정갑수, 생각 좀 해라. 으이구!”

“내가 뭘 새끼야.”

“야, 현수가 그깟 퍼스트 한번 섰다고 좋아하는 게 말이 돼? 그런 건 김지훈이 같은 새끼나 신나서 까부는 거야. 수술을 받았으면 몰라.”

“인턴이 수술을 어떻게 받아?”

“안 될 게 뭐가 있어. 현수가 유석재보다 잘할 거다.”

술잔을 입에 대던 정갑수가 신현수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생각해 보니까 맞는 소리네. 현수면 충분하지. 1년 빠른 게 별거야?”

신현수가 슬며시 눈가를 찡그렸다.

‘악어나 정갑수나 유리하다 싶으면 아무 말이나 막 뱉는구나. 니들도 정말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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