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뒤틀리는 관계 (1)
손에 쥔 동전을 보며 망설이던 김지훈이 전화기를 들었다.
정훈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저 김지훈입니다.”
(어! 지훈이구나. 별일 없었지? 전화하라니까 왜 안 했어. 많이 바빴던 모양이네.)
무척이나 반가워하는 소리였다.
조금은 쑥스러웠던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형님도 별일 없으셨죠? 형수님과 승희는요.”
(사는 게 맨날 똑같지, 뭐.)
정훈철과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신변잡기와 안부를 묻는 정도였지만, 왠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마도 가족 간의 대화가 대부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지훈아, 승희가 너무 보챈다. 바꿔 줄게.)
김지훈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촌.)
“응, 승희야.”
(삼촌, 왜 안와? 몇 밤만 자면 온다고 했잖아.)
“음! 승희야, 몇 밤만 더 기다려. 삼촌이 꼭 갈게.”
(응, 삼촌. 그런데… 철수가 있는데, 나 자꾸 때려. 응응, 과자도 안 주고. 응.)
만으로는 4살도 안 된 어린아이였다. 샛노란 새끼 병아리처럼 조잘대기 시작하는데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하자 결국 한수임이 전화기를 뺐었다. 승희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 씨, 바쁜데 미안해요. 별일 없죠?)
“예, 형수님. 잘 지내시죠.”
(경아 덕분에 재밌게 잘 지내요. 서울 올라올 때 꼭 전화하세요. 아휴! 승희야, 엄마 전화하잖아. 조금 이따가 인사해.)
승희가 칭얼대는 모양이었다.
“예, 형수님. 꼭 전화 드릴게요.”
(지훈 씨, 잘 지내세요.)
정훈철이 뒤에서 잘 지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결국 승희가 마지막으로 전화기를 잡았다.
(삼촌, 안녕. 우리 집에 꼭 와. 약속.)
“약속! 승희야, 잘 있어.”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을 보았다.
별 2개가 유난히도 반짝였다.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공연히 눈가가 벌게졌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이번 주에는 정형외과를 벗어나 일반 외과 수술을 담당한다. 마취와 수술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기회라 김지훈의 마음이 설레었다.
월요일 첫 수술을 마취하며 김진호가 인투베이션에 관해 설명했다. 특히 소아 환자에 대한 말은 김지훈이 놓치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 줬다.
“성인이나 체격이 좋은 아이들은 커브드 블레이드(curved blade)가 달린 인후경을 쓰지. 하지만 대충 5살까지는 말이야, 스트레이트를 써야 돼. 애들의 경우 혀를 한쪽으로 밀 공간이 없어서 커브드를 써서 혀를 밀면 도리어 시야가 나빠진다. 다시 말해, 애들은 삽관할 때 혀를 옆으로 밀지 말고 통째로 들어 올리는 게 핵심이야. 잊지 마라.”
“예, 선생님.”
무슨 이유인지 마취 과정은 물론 환자를 깨우는 일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앞으로 인투베이셔은 네가 해.”
“제가요?”
“그래. 하지만 만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로 취소야.”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인투베이션(intubation:기관 내 삽관)!
마취과에서 배우고자 했던 첫 번째 목표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김지훈이 신중하고도 정확하게 인투베이션을 했다.
김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켜보던 유석재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야! 김지훈, 신났네. 김진호 선생님, 정말 앞으로 계속 주실 거예요?”
“김지훈이 일반 외과 지원했잖아. 그러니까 너희 과 수술은 앞으로 지훈이가 담당할 거야. 과장님도 오케이 하셨어.”
말이 묘했다.
인투베이션 하나로 마취를 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이자 김진호가 딴청을 피웠다.
“수술 준비 안 하고 뭐 해?”
2년차인 최철한과 유석재가 부랴부랴 준비를 하고, 곧 박경일 과장이 수술을 시작했다. 3rd 자리에 서서 보조를 하던 신현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마지막 주에 인투베이션을 받았고, 그마저 전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앞섰다 싶으면 어느새 다시 김지훈의 등을 보아야 했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오프마저 반납하고 일하는 김지훈을 보며 내심 비웃기까지 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앞서 가는 것만이 아니라 김지훈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신현수는 수술 내내 고민에 빠졌다.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아침에 커피를 타면서도 싱글벙글 웃었다.
간호사들이 간혹 애교 섞인 목소리로 배가 고프다고 하면 과자와 음료수까지 대령했다.
그저 즐거울 뿐이었다.
정규 수술이 끝나면 일반 외과 수술이 더는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혹시 응급 수술이 없나, 응급실까지 기웃거릴 정도였다.
인투베이션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질 줄은 김지훈도 몰랐다.
일상이 즐거운 덕에 쏜살같이 시간이 지났다.
화요일 오전, 김지훈이 손가락으로 셈을 하며 히죽 웃었다.
‘하루 만에 벌써 6개도 넘게 했네. 조금 있으면 비지에이 하는 것처럼, 던지면 들어가는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그만큼 배우는 것이 많았다.
이론과 경험을 동시에 구비하지 않으면 의사로서 능력을 갖출 수가 없다. 김지훈은 지금 큰 경험을 하고 있었다.
첫 수술이 끝나고, 두 번째 수술이 준비되고 있었다.
어젯밤에 입원한 22살의 환자로 급성 충수염이었다.
최철한과 유석재가 손을 씻고 들어와 환자의 복부를 소독하고 드랩(drap:수술 환부를 소독된 천으로 덮는 과정)을 했다. 곧 박경일 과장이 들어왔다.
김진호가 막 마취를 걸려는 순간, 박경일 과장이 잠시 양해를 구했다.
“김진호 선생님, 조금 이따가 거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 과장님.”
김진호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박경일 과장이 집도의가 서는 자리인 환자의 우측 편에서 갑자기 반대편으로 갔다. 최철한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옆으로 피했다.
“뭐 해?”
박경일 과장이 유석재를 빤히 쳐다보며 엉뚱한 말을 했다.
“예? 과장님 뭘요?”
“네 자리에 가서 서.”
“제자리요?”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경일 과장과 최철한을 보던 유석재가 갑자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스크가 불룩해졌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유석재가 집도의 자리에 섰다.
그 순간 수술실에 있던 의료진 모두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축하한다, 유석재.”
“새앰, 축하해요. 한턱 내실 거죠?”
멀뚱하게 서 있던 김지훈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흥분했다.
“석재 형, 축하드립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형이라고 부르고 말았다.
유석재가 눈가에 미소를 띠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신현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금색 안경테 너머로 냉정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이 번쩍였다.
김진호가 수술을 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유석재가 신중한 기색으로 수술할 부위를 보았다.
무영등 아래에서 황금색 칼 대와 은색 메스가 반짝였다.
일반외과 전공의가 돼 가장 먼저 받는 수술은 충수 돌기 절제술(appendectomy)이다.
이유가 뭘까?
충수 돌기(appendix)!
소장 말단 부위인 회장과 상행 결장(대장)이 이어지는 부위 하방으로 3~4센티미터 정도의 맹관이 있다. 이를 맹장(cecum)이라고 하며, 그 끝에 쥐꼬리처럼 길게 달린 것이 충수 돌기다.
바로 이 충수 돌기와 맹장이 연결된 부분이 막혀 염증이 생기는 질환을 급성 충수염(acute appendicitis)이라고 한다. 전 국민의 1퍼센트 정도가 걸린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유병률이 높은 질환이다.
일단 발병하면 반드시 수술을 통해 충수 돌기를 제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충수 돌기 절제술은 일반 외과에서 가장 많이 벌어지는 수술이다. 또한 비교적 술기가 간단하고 24시간 이내에 수술하면 돼 첫 케이스로 적당했다.
의사가 아닌 사람들은 흔히 이 수술을 매우 간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방치해 충수 돌기가 터지게 되면 복막염을 유발하고, 면역이 약한 어린아이나 노인들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또한 10명 중 1명꼴로 엉뚱한 곳에 충수 돌기가 있어 수술이 대단히 어려워지기도 한다. 간혹 다른 질환을 동반하기도 해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
감별 질환으로는 맹장의 양성 종양이나 암, 장간막 임파선염, 주변에 발생한 게실염 등이 있다. 드물게 충수 돌기에 암이 발생했다는 보고도 있다.
따라서 일반 외과 교수들은 수술을 주기 전 신중하게 환자를 고른다. 유석재가 집도할 환자 역시 젊고 마른 체격을 가져 쉽게 수술할 수 있는 케이스였다. 물론 배를 열기 전까지는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유석재의 손에 들린 은색 메스가 피부를 갈랐다.
빠르게 지혈을 하며 피하 지방과 근막을 잘랐다.
근육을 벌린 후 복막을 열자 분홍빛의 소장과 대장이 보였다. 롱 포셉(long forcep:수술용 집게)으로 상행 대장을 잡고 조심스럽게 맹장을 당겼다.
충수 돌기가 잘 보이지 않는지 유석재가 한동안 뒤적거렸다. 1st를 서는 박경일 과장이나, 충수 돌기 절제술을 많이 해 봤을 2년차인 최철한이나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충수 돌기를 찾았다.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과 정맥을 먼저 결찰한 후 제거했다.
이후 충수 돌기의 초입 부분을 화이트 실크 중 가장 두꺼운 1번 실로 두 번 묶은 후 잘랐다.
대개 충수 돌기를 제거하며 발생한 대장과의 연결 부위는 대단히 좁고 작다. 이런 경우 추가적인 봉합은 요하지 않았고,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절단면을 단단히 막은 후 충수 돌기를 꺼냈다.
수술을 보조하는 간호사가 잘린 충수 돌기를 받아 생리 식염수로 적셔진 거즈로 감쌌다. 간혹 염증이 발생한 원인이 암인 경우가 있어 조직 검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역순으로 복막과 복벽을 닫고 마지막으로 피부를 봉합했다.
“커트!”
마지막 봉합 실을 자르는 것으로 수술이 끝났다.
박경일 과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칭찬을 했다.
“쉬운 케이스를 고른다고 했는데, 아뻬(의사들은 충수 돌기를 영어의 약자인 appe를 그대로 발음해 아뻬라고 부른다. 충수 돌기염도 동일하게 부른다)의 위치가 좋지 않았네. 그래도 아주 잘했어.”
처음 하는 수술이었지만 유석재는 신중하고도 침착했다.
중간에 충수 돌기를 찾지 못했을 때도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을 뿐이었다. 통상 30~40분 정도 걸리는 수술을 1시간에 걸쳐 했지만, 1년차 첫 수술의 경우에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내심 감탄을 했다.
‘역시 석재 형이야. 첫 수술인데 어떻게 저렇게 침착하지? 쩝! 나는 언제 해 보나. 최소한 1년은 지나야 하네.’
부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단계가 있듯 의사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수련을 거쳐야 한다. 덤비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었다.
마취 회복까지 전 과정이 끝났다.
김진호가 웃으며 박경일 과장에게 물었다.
“박 과장님, 유석재 선생 집도식은 언제 합니까?”
집도식(執刀式)!
외과 전공의들이 첫 수술을 받고 난 후 치르는 일이다.
거창한 행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축하하는 자리였다.
첫 환자를 집도한 전공의들에게는 의미가 깊은 날이다. 이제 외과 의사로서 진정한 한 걸음을 뗐다는 의미가 담겼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할까요? 마취과는 어때요?”
“금요일이요? 알겠습니다. 마취과 총출동합니다.”
“석재 축하해 주는 날인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죠. 오케이, 장소는 싱글벙글로 합니다. 석재야, 너도 좋지?”
유석재가 머리를 긁적였다.
“과장님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김지훈, 가급적이면 이경석하고 손일석인가? 우리 과 지원한 인턴들도 오라고 해. 돈도 없는데, 입이 2개나 더 느네. 하하하!”
‘경석이 형이 정식으로 지원을 하셨구나.’
“예, 과장님.”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