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1화 (61/1,329)

제7화 행복한 시간을 즐겨라 (2)

김진호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김지훈, 너 악어랑 무슨 일 있어? 왜 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아무 일 없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로 저러는 거냐? 그때 일 들으니까 악어가 잘못했던데.”

김진호는 구미 과장들 대부분과 학교 동기였다.

당연히 기흉 환자 때문에 있었던 악어와의 일을 들었을 것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애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답했지만, 김진호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었다.

“네 표정을 보니까 일이 있긴 있었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과 일에 집중해.”

“예, 선생님.”

“흐음! 그건 그렇고, 너 60킬로그램의 환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마취해 봐. 자세히, 하나도 빠짐없이.”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지금까지 모든 마취 과정에 집중했던 김지훈이었다. 마취제 용량부터 1회당 호흡량까지 술술 풀어냈다.

김진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때 마침 이용철 과장이 마취를 끝내고 나왔다.

“김진호 선생님, 뭐 재밌는 일 있어요?”

“예, 과장님. 들어가셔서 말씀하시죠. 신현수가 독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잖아요. 그래도 두 번이나 조는 걸 봤는데, 김지훈은 한 번도 안 조네요. 게다가 오프 때 응급 수술까지 따라 나왔답니다. 아무래도 다음 주부터는…….”

문이 닫히는 바람에 결정적인 말을 못 들었다.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기며 아쉬워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김진호가 수술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김지훈, 환자 안 봐?”

“아? 예, 선생님.”

김지훈이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했다.

열린 문 사이로 이용철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턴인데 그래도 되겠어요? 우리 과 픽스턴(fix tern:전공할 과에 합격한 인턴)이면 몰라도, 일반 외과에 지원한 선생이잖아요?”

“열의가 보통이…….”

또 들리다 말았다.

분명 나쁜 소리가 아니었기에 더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형외과 환자 마취에 열중할 때였다.

악어에게 틈을 보이면 또 지랄을 할 것이다.

김진호의 말 때문인지 악어가 인상만 쓰고는 수술실을 나갔다.

마지막 환자까지 순조롭게 다 회복됐다.

일과가 모든 끝난 후 김진호가 김지훈과 이한주를 불렀다.

“한주야, 오늘 맥주 한잔하자.”

“선생님, 저 당직인데요.”

“넌 조금만 마셔. 나랑 지훈이랑 대신 많이 마셔 줄게.”

“에이! 선생님,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긴, 식당에서 밥 먹고 응급 수술 없으면 7시에 숙소에서 만나자.”

2년차였지만 구미 마취과 치프(chief:해당 병원의 전공의 최고 연차)의 말이었다. 무조건 따라야 했다.

주말에는 정규 수술이 없다.

마취과에게는 금요일 저녁이 한 주를 마무리하는 자리와 다름없었다. 병원 앞 슈퍼로 간 김진호와 함께 파라솔 밑에 앉았다. 남쪽이라 그런지, 계절 탓인지 6월말의 밤은 꽤나 후텁지근했다.

‘역시 산이 시원하네.’

절로 금오산의 시원한 바람이 생각났다.

맥주 몇 병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앞에 두고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김진호는 물론 이한주도 김지훈에게 은근한 관심을 보였다. 고학을 했다는 유석재의 말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다소 난처한 기색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마취와 바이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김진호가 넉넉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과 할 것도 아니면서 무슨 관심이 그렇게 많아?”

“인투베이션도 확실하게 배우고 싶고, 선생님 말씀대로 바이탈을 가장 많이 다루는 과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습니다.”

“응급실과 수술실 바이탈은 달라. 물론 응급 수술의 경우는 우리도 써전들처럼 환자를 봐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마취는 바이탈을 잡는 게 아니라 유지하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를 끝까지 살리려면 유지하는 법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진호가 묘한 눈초리를 보였다.

“한주야, 참 희한한 놈 아니냐? 적성에 맞아도 하기 힘든 과가 마취관데, 일반 외과 한다는 놈이 더 열심이네. 신현수보다 더한 놈이 있었어.”

“그러게요. 수술이 길어지면 100프로 눈이 감기는데 지훈이는 한 번도 안 졸았다면서요. 제가 봐도 희한하네요.”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한주 선생님, 종일 배깅을 하는데 어떻게 졸아요.”

“병원 밖에서는 형이라고 불러, 인마. 배깅 한다고 안 졸 것 같아? 너도 좀 지나 봐. 눈은 감겨도 손은 움직여.”

“그래요?”

이한주가 김진호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야, 우리도 거의 100일 당직처럼 두세 달 동안 배깅을 해. 솔직히 졸게 되더라. 인턴 때 마취과 돌았으면 안 했을지도 몰라.”

“어이구! 이제 1년차가 말하는 것 좀 봐라. 그만둬도 돼, 인마. 아직 안 늦었어.”

“에이! 나 없으면 선생님 힘들어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솔직히 아쉽잖아요.”

“아쉽긴 뭐가 아쉬워. 술이나 마셔.”

“저 당직이에요, 선생님.”

“어? 그렇지. 그럼 김지훈, 마시자. 원 샷!”

단번에 글라스를 비운 김진호의 불타는 눈초리에 김지훈도 잔을 비웠다. 잘 마신다고 좋아하며 잔을 가득 채웠다.

“원 샷!”

‘왜 우리 학교 선배들은 다 원 샷만 외치지?’

슬슬 빼는 김지훈을 보며 이한주가 웃었다.

“지훈아, 마셔. 인마, 너 술 잘 먹는 거 다 알아.”

“응급 수술 뜨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오프 좀 챙겨. 자식이, 마취과 할 것도 아니면서.”

“그럼 형, 저 마십니다.”

“그래, 마셔.”

즐거운 술자리였다.

선후배 간의 예의는 엄연했지만, 굳이 격식을 차리지 않는 마취과의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한밤의 더위가 시원한 맥주에 물러났다. 하지만 이내 술기운이 오르자 도리어 더 더워졌다.

다들 헉헉거리며 숙소로 돌아왔다.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운 김지훈이 뒤척였다.

이용철 과장과 김진호가 어떤 말을 했는지 너무 궁금했다.

***

은비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수술이 없어도 오전까지는 마취과 근무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에 곤히 자는 은비를 살짝 보고 왔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퇴원할 때 한번 꽉 안아 줘야 하는데. 은비야, 퇴원 축하하고, 건강해야 한다.’

속으로 은비의 퇴원을 축하한 김지훈이 마취과 집담회에 귀를 기울였다. 마취과만의 전문적인 영역이기에 알아듣기 어려운 말들이 많았다. 솔직히 몸이 좀 꼬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죄송한데요. 보호자 한 분이 찾아와 지금 꼭 김지훈 샘을 보고 싶다고 하네요. 어떻게 할까요?”

“보호자가? 어디 있는데요?”

“이따가 오라고 해도 문 앞에서 가시질 않아요. 벌써 10분은 됐을 거예요.”

이용철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김지훈을 보았다.

은비 아빠일까?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진호가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지훈이 찾아올 보호자가 있습니다. 아시잖아요?”

“변 과장이 말한 환자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용철 과장도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만나고 와.”

“감사합니다, 과장님.”

김지훈이 조용조용 회의실을 나섰다.

은비 아빠와 은비였다.

아빠는 낡고 오래된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은비는 새하얀 원피스에 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은비가 반짝거렸다.

“선생님.”

은비가 달려와 폴짝 안겼다.

김지훈이 은비를 꼬옥 안으며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오늘 퇴원인가요?”

“예, 선생님. 덕분에 우리 은비 건강해져서 집에 갑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빠의 눈가가 벌게졌다.

그렇게 눈가를 붉히고 눈물을 흘렸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을까?

자식을 향한 끝없는 사랑에 가슴이 뭉클해진 김지훈이 은비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이렇게 좋은 날 왜 그러세요, 아버님. 조심해서 가세요. 우리 은비도 잘 가. 병원에 다신 오지 마. 그래도 나 잊어먹으면 안 돼.”

은비가 아무 말도 없이 목을 끌어안았다.

뭔가 따스한 것이 목을 적셨다.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은비야, 가자. 선생님도 일을 하셔야지?”

“아빠, 조금만.”

“그럼 못써.”

아이 아빠가 은비를 억지로 안아 내리며 발 옆에 있던 자루 하나를 들었다.

“선생님, 제 마음입니다. 변변치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참기름 한 병과 쌀 한 자루였다.

이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까?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며 고개만 꾸벅 숙였다.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이제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버님. 은비야, 잘 가.”

“선생님.”

아빠의 손을 잡은 은비가 자꾸 뒤돌아보며 울먹였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무 과분한 것을 받고 있었다.

가슴속에 아빠와 은비의 마음을 가득 담은 김지훈이 수술실로 들어섰다. 집담회를 마치고 나온 마취과 선생들과 딱 마주쳤다. 김진호가 코를 킁킁거렸다.

“어! 그거 뭐냐? 고소한 냄새가 난다.”

“보호자분이 주셨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 그거 어떻게 할 거냐?”

김지훈이 잠시 고민을 했다.

직접 해 먹을 수도 없고, 자랑할 가족도 없었지만 함께 나눌 사람은 많았다.

“식당 아줌마에게 부탁해서 다 같이 나누어 먹으면 어떨까요? 은비 아빠가 제게만 주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김지훈이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자 김진호가 슬쩍 뒤돌아서며 말했다.

“아 참, 식당 아줌마한테 그 쌀하고 참기름 언제 먹을 거냐고 꼭 물어봐라. 과장님, 그날은 식당에서 먹어야겠습니다.”

“우리 마취과 인턴 선생이 받은 건데, 당연하죠. 김지훈 선생.”

“예, 과장님.”

“양이 얼마 안 되니까 우리만 먹자. 하하하!”

이용철 과장이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

평온한 주말이었다.

일요일 저녁, 모처럼 고경아와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은비에 관한 말을 하자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다가 마지막에는 박수까지 쳤다.

(정말 잘됐네요. 지훈 씨, 정말 고생하셨어요.)

“고생은요. 그 덕에 은비가 건강하게 퇴원했는데, 도리어 제가 더 고맙죠.”

(지훈 씨는 참 마음이 예뻐요.)

“경아 씨, 내가 여자예요? 예쁜 게 아니라 멋있다고 하는 겁니다.”

(어머! 미안해요.)

고경아가 맑게 웃었다.

언제 들어도 편안한 웃음이었다.

(참! 지훈 씨, 휴가 날짜는 정하셨어요?)

“시간이 없어서 말도 못 꺼냈어요. 하필이면 응급실 돌 때라 조금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연락 기다릴게요. 다행히 8월에 가시는 수술실 선생님들이 많아서 전 7월이면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외로 적극적인 말이었다.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경아 씨가 정 나와 함께 휴가를 가고 싶어 한다면 최대한 노력해 보죠.”

(어머!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제가 애원하는 줄 알겠네요.)

고경아가 새침을 떨었다.

김지훈이 크게 웃었다.

“알았어요. 농담도 못 하나. 어차피 7월에 갈 수밖에 없는데, 시간이 딱 맞네요. 벌써 청평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요?”

(못 가봤다면서 청평이 보이긴 하세요?)

“그런가요? 참! 경아 씨, 혹시 정 PD님, 아니 형수님하고 통화는 했나요?”

시간이 좀 지났다고 형님이란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통화했어요. 언니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는걸요? 승희가 지훈 씨 보고 싶어 하던데, 전화하세요.)

“승희가요?”

(네. 절 보더니 지훈 씨부터 찾았어요. 이상하죠? 생각난 김에 오늘 꼭 하세요.)

웃고 떠들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고경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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