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가족! 그 그리운 이름 Ⅱ (2)
수술실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이곳에서 수술을 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김지훈이 각오를 다졌다. 더 노력하고 배우지 않으면 꿈은 꿈으로만 끝날 것이다.
김지훈을 본 수술실 간호사가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김지훈 새앰,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샘을 왜 몰라요? 그런데 왜 오셨어요?”
당연하다는 듯한 간호사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실에 자주 들어온다고 해서 인턴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흉부외과에서 1st를 선 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름을 안다는 것은 안면을 튼 것과 다름없는 일이기에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이번에 마취과 돌아요. 그래서 미리 알아야 할 것이 있나 해서 왔습니다.”
김지훈이 웃으며 캔 커피 4개를 흔들었다.
주말이나 야근 때는 간호사 4명이 근무한다는 것을 미리 염두에 뒀었다. 미리 기름칠을 하면 모든 일이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우리 먹으라고 주시는 거예요?”
“그럼요.”
“호호호!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며 준비실로 김지훈을 안내했다.
그냥 툭 한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마취과는 좀 어때요?”
“마취과예, 좋죠. 하지만 이용철 과장님을 조심하셔야 해요. 보기보다 무서운 분이거든요.”
캔 커피 덕일까?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말문이 멈추질 않았다.
경상도 사투리 때문인지 꽤나 시끌벅적했다.
마취과 과장 이용철.
말이 별로 없고, 인턴에게 무관심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인턴을 주시한다. 어떤 실수를 했고, 근무 태도가 어떤지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했다.
2년차 김진호.
몇 년간 개업을 하다 뒤늦게 마취과에 들어왔다. 이용철 과장과 학교 동기였지만 깍듯함을 잃지 않았다. 점잖고 부드러운 말투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아 간호사들에게 인기 만점인 것 같았다. 더욱이 인턴 교육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가장 주의해야 할 사람이었다.
1년차 이한주.
1년차답게 자기 색깔을 드러내지 않아 간호사들도 잘 모르겠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환주 형이야 내가 잘 알지. 꽤나 깐깐한 형인데, 1년차라 조용히 지내는 모양이네. 하긴 마취과의 분위기가 좋다고 1년차가 나댈 수는 없겠지.’
김지훈이 시끄러운 수다 속에서도 용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집어냈다. 어느새 커피도 다 마셨고, 시간도 얼추 한 시간이나 지났다.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나려던 김지훈이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근데 말이에요. 이번 인턴 샘들은 좀 특이하네요. 신현수 샘도 미리 와서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샘도 그러네요.”
“현수가요?”
“그래서 그런지 인투베이션도 여러 번 받았고, 김진호 샘도 중간중간 마취 유지를 맡기셨어요. 그래도 우리한테는 샘이 훨씬 나아요.”
“내가요? 난 아직 돌지도 않았는데.”
“신현수 샘은 빈손이었는데, 샘은 커피를 가져오셨잖아요. 우리 이런 거 무지 좋아해요? 호호호!”
“에이! 그럼 과자도 사 올걸 그랬네.”
김지훈이 맞장구를 치자 간호사들이 호들갑스럽게 웃어 댔다. 수술이 있든, 없든 근무 내내 수술실 안에서만 있어야 하니 꽤나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좀처럼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는 간호사들의 수다를 간신히 피해 수술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신현수,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놈이 정말 열심히 하네. 휴우! 이거,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데. 좋아, 현수가 한 발을 뛰면 난 두 발을 뛴다. 해 보자, 난 할 수 있어.’
김지훈이 가슴을 펴고 씩씩하게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1층까지 내려온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중환자실 문을 열었다.
역시 손일석이었다.
은비 옆에 앉아 바이탈과 소변이 잘 나오는지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김지훈이 슬쩍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은비, 괜찮아?”
“아이! 깜짝이야. 자식이 고양이도 아니고.”
“왜 이렇게 성질이야?”
손일석이 구시렁거렸다.
“내가 보는데 은비야 당연히 괜찮지. 그나저나 은비 보느라고 데이트는커녕 쉬지도 못했어. 책임져, 인마.”
인턴들이 바뀌는 주다. 변상훈 과장이 손일석에게 중환자실에서 킵(keep) 하라는 오더를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은비를 본 손일석이 자청한 일이 분명했다.
정말 믿을 수밖에 없는 친구이자 동료였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손일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떻게, 여자라도 한 명 소개시켜 줘?”
“네 재주에? 됐다, 인마. 은비 병실 올라가면 맥주나 한 잔 사. 당분간은 술이고, 여자고, 뭐고 다 물 건너갔네. 후우!”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그 순간에도 손일석은 은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든 생체 징후가 안정적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기관에 삽입된 튜브가 몹시 갑갑한 지 간간이 몸을 뒤틀었다. 침대에 묶인 가느다란 팔다리가 애처로웠다.
가슴 한구석이 아파 온 김지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파이팅을 많이 했어?”
“응, 아주 힘차. 그래서 계속 재우고 있어.”
“튜브를 빨리 빼 줘야 은비도 편할 텐데.”
“아까 점심때 과장님이 오셨었는데, 내일 아침에 튜브 빼 보자고 하시네. 지금도 가능하지만, 주말이라 불안하시대. 내가 지켜보고 있는데 너무하신 거 아냐? 흐흐흐.”
인력이 부족한 주말에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 장치들을 제거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만에 하나 문제라도 생기면 즉시 대처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손일석이었다.
희한하게 웃는 게,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에 스스로도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반대편으로 가 은비의 손을 잡았다.
차갑기만 했던 손에 이제는 제법 온기가 돌았다.
‘은비야, 하루만 참아. 내일이면 편해질 거야. 그땐 네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겠지? 꼭 그래야 한다.’
아직은 누구도 은비의 뇌 손상에 대해 확언할 수 없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다음이 걱정이었다. 은비 아빠의 눈물과 흙투성이였던 다리도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며 보호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김지훈을 본 은비 아빠의 눈가가 붉어졌다.
“선생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은비 살리려고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은비 아빠가 김지훈과 손일석의 손을 잡았다.
평생 흙은 만지며 살아온 농부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그 어떤 손보다 따뜻했다. 딸아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한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던 은비의 아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은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빠의 손길을 느낀 것일까?
은비가 몸을 뒤척였다.
김지훈이 조용히 손일석에게 눈짓을 했다.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부탁을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는 은비도 많이 회복됐으니 아빠와 딸, 단둘만의 시간을 주어도 좋을 것이다.
“일석아, 계속 킵(keep) 할 필요는 없어. 다른 환자도 봐야 하잖아.”
“응, 아까 과장님도 그러시더라. 에휴! 환자뿐이냐? 삼겹살을 2근이나 사다 놨는데, 언제 꿰매냐.”
손일석 역시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상스럽게 식욕이 돋은 김지훈이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손일석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역시 네 생활력은 정말 최고야. 난 아직도 입에 안 맞는데, 참 잘도 먹네. 좋겠다.”
“꼭꼭 씹어. 그럼 다 맛있어, 인마.”
손일석이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문득 언젠가 어머니가 싸 온 밥을 자신보다 더 맛있게 먹었던 김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씨펄! 내 배가 불렀구나. 엄마가 해 준 밥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놈이 있는데, 밥투정이나 하고.’
손일석이 우걱우걱 남은 밥을 씹었다.
***
마취과에서의 첫날.
근무 시작 시간인 8시보다 30분 일찍 수술실에 도착했다.
회의실로 들어가 수술 스케줄 표를 탁자 위에 놓고는 오늘 벌어지는 수술들을 꼼꼼하게 읽었다.
산부인과 수술이 단연코 많았다.
제왕 절개 6건에 부인과 수술이 2건이었다.
일반 외과는 담낭 제거술과 탈장 수술이 예약돼 있었다.
나머지는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그리고 이비인후과 수술로 모두 16건의 수술이 있었다. 세 곳에서 동시에 수술이 시작돼 평균 5건씩 하게 된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아 김지훈이 나름 어떤 수술에 들어갈지 혼자 상상을 했다.
‘담낭 제거술이 이 중 가장 크니까 과장님이 들어가시겠지? 산부인과 수술실이 제일 바쁘면 환주 형이 들어갈 테고, 그러면 남은 수술이? 이런!’
정형외과 수술이었다.
짐작이 맞다면 악어를 볼지도 몰랐다.
첫날부터 재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에이! 최성훈 선생님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혼자 중얼거리던 김지훈이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이용철 과장과 전공의들이 동시에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인턴 김지훈입니다.”
“응, 네가 김지훈이구나.”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용철 과장이 김지훈을 힐끗 보고는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김진호와 이한주가 자리에 앉자 김지훈이 잽싸게 커피를 탔다. 이한주가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마취과의 첫 일과는 티타임이었다.
커피 좀 탄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었다.
잡일은 인턴의 몫이었고, 간호사들에게 이런 일을 넘길 수는 없었다. 사실 복사나 커피 타는 거나 그게 그거였다.
믹스 커피의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퍼졌다.
이용철 과장이 스케줄을 보며 각자 들어갈 방을 지정했다.
“내가 일반 외과 들어가고, 김진호 선생님이 정형외과 들어가시죠. 환주는 오늘도 고생 좀 하고.”
“예, 과장님.”
이럴 수가!
짐작대로 정형외과 수술실에 들어갈 판이었다.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며 주말에 있었던 일들과 오늘의 수술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김지훈이 바짝 귀를 기울였다.
“김진호, 선생님. 이번 주까지 정형외과 맡고, 다음 주부터는 일반 외과 맡아 줘요.”
“예, 과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김진호의 말투에서 깍듯함과 친밀감이 느껴졌다.
아무리 지위의 차이가 나도 동기는 동기다.
병원 내에서도 학교 동기란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환주는 신생아들 상태에도 신경을 써. 요새 산부인과 수술이 너무 정신없이 벌어지는 것 같아 불안해.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예, 과장님.”
이용철 과장이 마취 시 주의해야 할 환자들을 조목조목 짚으며 당부를 했다. 어느 과든 배워야 할 것은 무궁무진했다.
티타임이 끝나자 김진호가 김지훈을 불렀다.
“인턴 선생, 가자.”
성큼성큼 걸어 정형외과 수술실에 들어간 김진호가 마취 장비에 대해 설명했다.
“벤틸레이터(ventilator:인공호흡기)하고 마취 장비들은 서울에서 이미 봤지?”
“예.”
“궁금한 거 있으면 차차 물어보고, 일단 중요한 건 환자마다 마취제 용량과 호흡량을 잘 계산해야 돼. 메이저 수술이면 소변 체크도 수시로 하고, 피가 많이 난다든지 하면 수술팀이 말하기 전에 미리미리 수액도 더 틀어 주고. 뭐, 일반 외과 지원했으니까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
“예, 선생님.”
“그럼 오늘도 즐겁게 마취를 시작해 볼까?”
정형외과 환자가 들어왔다.
이런! 떡하니 악어가 김지훈을 보며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김진호를 보고는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 악어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김지훈을 슬쩍 노려보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너, 마취과 도냐? 잘 돌아라. 졸지 말고.”
“예, 선생님.”
정형외과도 아닌데 꿀릴 것이 없었다.
어차피 악어와는 극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서로 웃을 일도 없을 것이다. 냉랭한 분위기가 흘렀다.
곧 마취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마취 과정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