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가족! 그 그리운 이름 Ⅱ (1)
“형님, 참 행복하시겠어요. 형수님도 미인이시고, 승희도 잘 크잖아요. 부럽네요.”
“야! 겉보기에는 그래도 속상하는 일 많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잖아.”
“그렇죠. 정말 만만하지 않더라구요.”
또 공연한 말에 한수임이 눈을 흘기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정훈철이 헛기침만 했다.
“지훈 씨, 그런데 무슨 과 할 거예요?”
“저, 일반 외과 지원했어요.”
“일반 외과요? 돈 잘 버는 과도 많은데, 왜 하필.”
“돈이야 먹고살만큼은 벌겠죠. 제가 보기엔 일반 외과 의사가 이거예요. 없어 봐요, 맹장염으로도 사람이 죽는다니까요.”
김지훈이 엄지를 들어 보이자 한수임이 박수까지 쳤다.
“어머! 그렇네. 정말 중요한 과를 하시네요.”
“형수님도. 저 아직 합격도 못했어요.”
정훈철이 이때다 싶은지 끼어들었다.
“김지훈, 넌 100프로 합격이야. 우리 승희 살린 것도 그렇고, 이혁민 교수님도 네 칭찬을 굉장히 많이 하더라.”
“제 칭찬이요?”
“방송 찍은 날 과장님 앞에서도 그러시더라. 근데 신현수? 그래, 신현수가 누구야?”
“현수요? 총장님 아들이에요. 걔도 일반 외과 지원했어요.”
갑자기 정훈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렇게 신현수 선생 얘기를 했구나. 응급실에서 네 대신 그 선생이 시범을 보이는 게 훨씬 나았을 거라고 얼마나 말을 하던지, 성만 같았으면 아들인 줄 착각할 뻔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인사하러 갔을 때 눈길도 주지 않은 금경태 과장의 모습이 생각난 탓이었다.
“워낙 엑설런트한 애예요.”
“그래도 우리 지훈이만 할까? 야, 보니까 과장한테 다른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걱정 딱 붙들어 매. 지훈이 너한테는 내가 있잖아. 이 형이 힘 좀 쓸게.”
“당신이 병원에 무슨 힘을 써요? 괜히 지훈 씨한테 폐만 끼치지.”
“아니, 이 사람이 남편을 뭐로 보는 거야. 나, PD야. 지훈이 팍팍 밀어줄 수 있다고. 지훈아, 나만 믿어.”
술김에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왠지 기뻤다. 누군가 자신을 믿어 주고 힘써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남들이 백이라고 부르면 도리어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두런두런 대화가 오갔다.
소주 2병에 동동주 두 대접을 더 마셨다.
정훈철이 취해 소리를 질렀다.
“지훈아, 나 오늘 네 형수랑 자야겠다. 그러니까 넌 제수씨랑 같이 자.”
“예? 형님, 취하셨어요?”
“취하긴 내가 뭘 취해. 사랑하는 사람까리 같이 자는 게 이상해?”
고경아가 얼굴을 붉혔고, 한수임이 잔뜩 핀잔을 주었다.
김지훈과 정훈철이 어깨동무를 한 채 같은 방에 들어갔다.
밤새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다음 날 아침, 정훈철이 단잠에 빠져 있던 김지훈을 깨웠다.
아직도 머리가 멍한 김지훈이 시계를 찾았다.
“형님, 왜요. 이제 7시밖에 안 됐는데 조금 더 주무시죠. 체력도 좋으시네요.”
“지훈아, 일어나. 사우나 가자.”
“사우나요?”
“술 깨는 덴 사우나가 최고야. 땀 쭉 빼고, 요구르트 하나 마신 다음 해장국이면 술이 싹 달아나. 빨리 얼어나.”
“나, 속옷도 없는데요.”
“하나 사서 입으면 되지. 가자.”
술 깨는 데 사우나가 최고라는, 철저하게 의학을 무시하는 말은 그렇다고 쳐도 이 시간에 어디서 속옷을 산단 말인가?
김지훈이 반쯤 감긴 눈으로 정훈철을 따라나섰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탕에 몸을 담갔다.
곧 정훈철이 뒤따라 들어왔다.
“어! 좋다. 형 말이 맞지. 술 먹은 다음 날엔 사우나가 최고라니까.”
“예, 좋긴 좋네요.”
“목소리가 영 아니다.”
“아니에요, 형님. 정말 좋아요.”
정말 약간 술이 깨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긴 했다.
김지훈이 목을 돌리며 탕 속에 깊숙이 몸을 담갔다.
발가벗은 채 마주 보고 있으니 느낌이 묘했다.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형제 같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정훈철의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10분쯤 있다 탕에서 나왔다.
정훈철이 김지훈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물건 실하네. 역시 젊음이 좋아. 나도 너 같을 때가 있었는데. 쩝!”
시선이 고정됐다.
“에이! 형님도. 왜 자꾸 봐요?”
“야, 동생 물건도 못 보냐? 자식이, 등에 비누칠 좀 해 줘”
정훈철의 등에 비누칠을 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서로의 등을 밀어 주던 기억이 났다. 그때 아버지가 콧노래를 불렀던 것 같았다.
“너도 돌아.”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등을 내밀었다.
이젠 희미한 기억뿐이었지만, 마치 아버지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정훈철이 정말 형 같았다. 김지훈의 눈가가 붉어졌다.
뭔가 눈치가 이상한지 정훈철이 김지훈의 등을 툭툭 치며 물었다.
“지훈아, 어디 불편해?”
“눈에 비누가 들어갔나 봐요. 어우! 눈 매워.”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며 눈을 닦고는 코까지 풀었다.
“그거 꽤 따가울 텐데. 괜찮아?”
“예. 괜찮아요, 형님.”
“어린애도 아니고, 칠칠맞게. 쯧!”
이 말도 언젠가 들었던 것 같았다. 자꾸만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에 김지훈이 서둘러 샤워를 했다.
정훈철이 머리를 말리며 말했다.
“개운하지?”
“예, 개운하네요.”
“그럼 해장국 한 그릇 하러 갈까?”
“이 동네 해장국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경상도 음식은 처음에는 다들 맛이 없다고 하거든요. 입맛이 달라서 그런가 봐요.”
“해장국이야 다 똑같지. 난 선지가 좋은데, 너는?”
정훈철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전 다 잘 먹어요. 어제 보셨잖아요.”
“많이 먹긴 하더라. 다음엔 삼겹살 먹어야겠어.”
“삼겹살은 더 많이 먹는데요?”
“어제도 혼자 4인분은 먹었을 텐데, 돼지 같은 놈.”
힐끗 김지훈을 째려보며 정훈철이 핀잔 아닌 핀잔을 날렸다. 김지훈이 다소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정훈철이 정말 형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너, 걸음걸이가 왜 그래?”
“빤쓰 안 입었잖아요.”
속옷을 안 입어 그런지, 까칠한 느낌에 김지훈이 자꾸 바지를 만졌다. 정훈철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어린 승희에겐 타지 음식이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마, 맛없어.”
선지 해장국을 시킨 정훈철도 그릇만 휘휘 저었다.
김치찌개를 시킨 한수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보, 왜 그래요? 맛이 없어요?”
“응, 맛이 좀 묘하네. 이 동네가 확실히 입맛이 다르긴 다른 모양이야.”
“그래요? 유원지 근처의 음식이 다 그렇잖아요. 김치찌개는 맛있으니까 저랑 같이 먹어요.”
“어제 안주들은 먹을 만했는데, 이상하네. 근데 지훈이 너는 너무 잘 먹는다. 입에 맞아?”
“이젠 확실히 적응했나 봐요. 맛있을 때도 많아요.”
이젠 혀가 길들여졌는지 김지훈이 국물까지 싹 비웠다.
김치찌개만으로는 부족했던 정훈철이 슈퍼에서 빵과 우유를 사 승희와 나눠 먹었다. 두둑하게 먹고도 슬며시 빵에 손을 뻗는 김지훈을 보며 다들 웃었다.
날은 화창했고, 오래간만의 나들이였다.
들뜬 마음으로 금오산 유원지로 향했다.
정훈철 부부가 간식거리를 사 온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고경아와 단둘이 남았다.
갑자기 데이트하는 기분이 확 살았다.
“둘만 남으니까 정말 좋네.”
김지훈이 슬쩍 고경아의 눈치를 보았다.
새침한 표정만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 보려고 구미까지 내려왔으면서, 좋으면 좋아도 하지, 아닌 척하기는. 그나저나 아침을 얼마 안 먹던데, 배 안 고픈가?’
마침 핫도그 가게가 보였다.
“경아 씨, 핫도그 먹을래요?”
“좋아요.”
김지훈과 고경아가 핫도그에 케첩을 뿌리고는 한입 베어 물었다. 핫도그 특유의 바삭바삭한 느낌이 좋았다. 단둘이 걸으며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
데이트하는 맛이 났다.
“경아 씨, 휴가 언제 가요?”
“아직 못 정했어요.”
김지훈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럼 나랑 같이 갈래요?”
“같이요?”
고경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정말 다른 뜻은 없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그냥 당일치기로 가자는 말이에요.”
고경아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날 짐승으로 본 거야?’
분명 생각은 그렇게 했는데 왜 아쉬울까?
“그래요? 그럼 어디로 가요?”
“청평 어때요? 학교 다닐 때 MT 갔던 친구 놈이 되게 좋대요.”
“지훈 씨는 안 가 봤어요?”
“학교 다닐 때 좀 바빠서요. 하하하!”
김지훈이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대개 주말이나 방학 때 MT를 갔기 때문에 거의 참석하지 못했었다.
“청평이면 하루로 충분하죠?”
“그럼요. 아침에 일찍 갔다가 막차 타고 오면 시간도 넉넉할 거예요.”
“생각해 볼게요. 일단 지훈 씨부터 휴가를 정하세요. 제가 최대한 날짜를 맞출게요. 집에도 갔다 와야 하고, 위에 선생님들 휴가 가는 날짜를 피해야 하니까 시간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최대한 태연한 척했지만 기묘한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심 퇴짜를 맞을까 봐 불안했던 김지훈이 주먹까지 부르르 떨었다.
“알았어요. 정해지는 대로 연락할게요.”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래도 좋았다.
고경아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냄새가 정말 좋네요.”
“네?”
이런! 냄새라는 말보다는 향기라는 말을 썼어야 했다.
순간 어색해진 김지훈이 한곳을 가리켰다.
분홍빛 솜사탕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풍겼다.
“어머! 솜사탕이네요. 우리, 저거 사 먹어요. 언니네 것도 사구요.”
김지훈이 솜사탕 5개를 샀다.
입안에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퍼졌다.
다른 연인들처럼 함께 솜사탕을 먹으며 온 길을 다시 걸었다. 어느새 정훈철 가족이 돌아와 있었다.
솜사탕을 본 승희가 이모를 부르며 달려왔다.
한수임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한입 물었다.
과일에, 음료수에, 과자까지 많이도 사 왔다.
고경아와 한수임이 과자를 먹으며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승희가 방방거리며 잘도 뛰어다녔다.
정훈철이 아내와 딸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게 가족이 주는 행복일까?
김지훈이 편안함에 몸을 맡겼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유월의 따사로운 햇빛에 절로 눈이 감겼다. 슬며시 단잠에 빠져든 김지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지만, 아쉬운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는 고경아도, 정훈철 가족도 모두 돌아가야 한다.
금오산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짧을 줄은 몰랐다.
고경아와 단 몇 마디도 나누지 못했는데, 벌써 병원 주차장이었다. 모두들 차에서 내렸다.
“지훈아, 잘 지내. 혹시 일 있으면 집이든, 직장이든 괜찮으니까 형한테 바로 연락해. 밤늦게라도 상관없다. 알았지?”
“예, 형님.”
정훈철이 악수를 하며 슬며시 김지훈을 안았다.
“다음에도 사우나 같이 가자.”
“예, 형님. 조심해 올라가세요.”
친형이라도 이렇게 동생을 대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정훈철을 안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지훈 씨, 서울에 올라오면 미리 연락 주세요.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우리 승희도 지훈 씨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이렇게 빨리 다른 사람을 따른 적이 없었거든요. 삼촌인 걸 아나 봐요.”
“예, 형수님. 꼭 연락할게요.”
“승희야,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승희가 쪼르르 달려왔다.
“삼촌은 안 가?”
“응, 삼촌은 여기서 일해야 돼.”
“싫어. 삼촌, 같이 가.”
승희가 칭얼거리며 품에 안겼다.
김지훈이 승희를 꼭 안았다.
“며칠 밤만 자면 삼촌 오실 거야, 승희야. 이리 와, 엄마한테 와.”
엄마의 말에도 승희가 고개를 흔들며 떨어지지 않았다.
5살짜리 어린아이가 무엇을 알까?
혹시 승희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간절하게 빌었던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으차! 승희야, 가자. 삼촌하고 이모도 인사해야지.”
정훈철이 억지로 안자 승희가 서글프게 울었다.
“삼촌, 같이 가. 우리 집에 가. 아아앙!”
“승희야, 꼭 갈게. 며칠만 기다려.”
정훈철이 승희를 안고 차에 올랐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가족을 보내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고경아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지훈 씨, 정말 즐거웠어요.”
“올라가려면 피곤할 텐데, 어떡하죠?”
“운전도 안 하는데 제가 피곤할 일이 뭐가 있어요. 전 지훈 씨가 더 걱정이에요.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어떡하죠?”
똑같은 말에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사실 전주에 거의 잠을 못 잤어요. 그런데 경아 씨를 보니까 피곤이 싹 사라졌어요.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휴가 날짜 맞추는 거 잊지 말아요.”
“음! 그건 가 봐야 알죠.”
고경아가 살짝 튕기며 새침을 떨었다.
그런 모습조차 예뻤다.
“같이 안 가면 알아서 해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비밀이에요.”
“지훈 씨는 맨날 비밀이란 말만 하네요.”
김지훈이 웃기만 했다.
고경아도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채 김지훈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척 많은 말을 한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정훈철의 차가 천천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고경아가 손을 흔들었다.
승희는 아직도 울고 있었다.
“휴우!”
영영 보내는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난히 힘들었다.
가족이라는 아프고도 그리운 이름이 김지훈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