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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57화 (57/1,329)

제5화 가족! 그 그리운 이름 Ⅰ (2)

김지훈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답했다. 병원에서 말고는 어린아이를 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승희, 잘 잤어?”

“네.”

얌전하게 대답한 승희가 엄마 품에 고개를 묻고는 김지훈을 살짝살짝 쳐다보았다. 참 예쁜 아이였다.

그 모습에 다들 미소를 지었다.

정훈철이 고기를 잘게 잘라 승희 앞에 놓았다.

“우리 승희, 배고프지? 고기 먹자. 아빠가 맛있게 구웠어.”

한수임이 한 점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고기를 먹은 승희가 입을 아 벌렸다.

“우리 승희, 또 먹을래?”

“응.”

한수임이 활짝 웃으며 승희가 입을 벌릴 때마다 고기를 먹여 주었다. 정훈철이 좋아 죽었다.

“어이구! 우리 승희, 정말 잘 먹네. 밥도 이렇게 잘 먹어야 쑥쑥 자라요. 우리 딸, 잘 먹을 거지?”

“응, 아빠도 잘 먹어요.”

“아빠도?”

“응, 아빠. 응, 밥 잘 먹고. 으응, 으응, 김치도 많이 먹어야 돼요. 술 많이 먹으면 안 돼요.”

승희의 말에 웃음보가 터졌다.

그 덕에 약간은 서먹하고 어색했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졌다. 잠시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승희를 바라보던 정훈철이 술병을 들었다.

“김지훈 선생님, 한잔하실까요?”

“예, PD님. 먼저 받으시죠.”

“아니, 선생님 먼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먼저 드리겠습니다.”

김지훈이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정훈철이 두 손으로 술을 받고는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김지훈 선생님, 편하게 받으세요. 제가 불편합니다.”

“아닙니다.”

예의를 지키고 싶은 김지훈과 편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는 정훈철 사이에서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이가 한참 차이가 나는데 고집을 부리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마지못해 편히 앉으며 말했다.

“그럼 PD님, 말씀 놓으시죠. 저 이제 스물여섯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전 이게 편합니다.”

“그럼 저 PD님께서 주시는 술 못 먹습니다.”

김지훈이 술잔을 쓱 물리며 딴청을 피우자 정훈철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남자들끼리 말을 놓으면 당연히 이름을 부른다. 보통의 경우에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째 만남이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이제야 안면을 튼 정도였다. 더구나 김지훈은 딸아이를 구해 준 은인이었다.

뭔가 미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

그때 잠도 다 깨고 배까지 부른 승희가 고경아에게 폴짝 달려들었다.

“이모, 나랑 놀자.”

“승희야, 이모 힘들어. 내려오는 동안 차에서 많이 놀았잖아. 이모도 밥 먹어야 하니까 내일 놀면 안 될까?”

한수임이 다시 안으려고 손을 뻗자 승희가 고경아를 꼭 껴안았다.

“싫어, 나 이모랑 놀 거야.”

“언니, 전 괜찮아요.”

이모? 언니?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고경아를 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 두 번이나 만났어요. 승희가 숫기가 좋은지 금방 따르네요.”

“호호호! 승희가? 얼마나 낯을 가리는 앤데. 승희가 경아 씨를 알아보나 봐.”

고경아도 승희를 꼭 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래요, 언니? 나도 승희가 예뻐 죽겠어요. 승희야, 선생님한테 가 볼래? 승희 안 아프게 해 주셨는데, 가서 사랑해요, 한 번 해 드려.”

고경아와 엄마를 번갈아 보던 승희가 갑자기 발딱 일어나 김지훈을 꼭 안았다.

“사랑해요.”

그러고는 볼에 입을 맞췄다.

자그만 아이의 숨결과 보드라운 느낌에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승희를 안았다. 승희가 품에 폭 안겼다.

어린아이일 뿐인데 김지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훈철과 한수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희가 웬일이야?”

“그러게요, 여보.”

김지훈의 목을 껴안은 채 승희가 한수임을 보았다.

“근데 엄마, 왜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유치원에 있는데.”

“응, 그건 의사 선생님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렇지.”

한수임이 대답하자 승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이모는? 이모도 아야 하면 고쳐 주는 사람이잖아.”

“그건…….”

대답이 궁한지 한수임이 말꼬리를 흐렸다.

엄마라고 해도 5살짜리 아이에게 호칭을 설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고경아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승희야, 그럼 뭐라고 불러야 돼?”

“으응, 이모 아저씨.”

승희의 말에 다들 크게 웃었다.

고경아가 승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이모 아저씨 대신 삼촌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삼촌이 뭔 줄 알아?”

“몰라.”

공교롭게도 정훈철과 한수임 모두 형제가 없었다.

당연히 승희에겐 이모나 삼촌이 없어 낯선 단어일 수밖에 없었다.

“음! 아빠의 동생을 삼촌이라고 해.”

“그럼 선생님이 아빠 동생이야?”

김지훈과 정훈철이 눈을 마주쳤다.

사실 이것이 인연이라면 정말 큰 인연이었다.

다만 상황이 서로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삼촌? 느낌이 정말 좋은데? 경아 씨도 사모님을 언니라고 부르는데, 내가 PD님하고 서로 존대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정말 행복한 가족이었다.

정훈철과 한수임은 좋은 아빠이자 엄마였다.

이유는 모르지만, 승희의 말에 가슴까지 설레었다.

김지훈이 약간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PD님, 저 죄송하지만, 제가 나이도 한참 어린데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말을 안 놓으시니까 솔직히 어색합니다.”

“혀… 형님이요?”

정훈철이 다소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이제 두 번째였지만, 김지훈의 성정이 어떤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혼자 자랐기에 형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 탓인지 내심 김지훈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고향이나 학교 선후배가 아닌 이상 섣불리 드러낼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다.

정훈철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자 고경아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요. 두 분 다 형제도 없으신데, 좋네요.”

“그래요, 여보. 전에 김지훈 선생님 같은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내가?”

정훈철이 아니라는 듯 되물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김지훈이 술잔을 척 내밀며 말했다.

“형님, 술 한 잔 주시죠.”

“어? 그… 그럴까… 요?”

이미 한 번 나간 말이다.

김지훈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형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했다. 솔직히 정훈철이 구미에 내려온 것만으로도 벌써 형님이라고 불렀어야 했다.

“에이! 형님, 요가 뭐예요. 술 안 주실 거예요?”

“어? 어! 그… 그래.”

술을 받은 김지훈이 한수임을 보았다.

“형수님,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형수요? 호호호, 정말 이래도 되나요?”

“싫으세요?”

“아니요, 저야 너무 좋죠. 우리 승희한테 이모하고 삼촌이 한꺼번에 생기네요.”

한수임이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며 술잔을 받았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잔까지 채우자 다들 정훈철을 보았다.

“형님, 건배하기 전에 한 말씀 하셔야죠.”

“그래요, 여보. 오늘 정말 기쁜 날이잖아요.”

“맞아요, 저도 앞으로 PD님을 형부라고 부를게요. 언니, 그래도 되죠?”

형부? 고경아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럼 당연하지. 경아 씨가 내 동생이니까 형부가 맞지. 김지훈 선생님, 아니 지훈 씨, 그래도 되죠?”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마치 고경아와 함께 형네 부부를 만나는 것처럼 느껴진 김지훈이 슬며시 웃었다. 기분이 괜찮았다.

직업상 평소 달변이었던 정훈철이 오늘따라 말까지 더듬었다. 형님에 형부 소리까지 듣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 그럼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다 같이 건배합시다. 건배.”

“에이! PD가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시네. 건배.”

김지훈의 말에 다들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쨍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맑은 술이 사라졌다.

웬일인지 고경아까지 잔을 비웠다.

웃고 즐기는 사이, 한우 특등심 8인분과 소주 3병이 사라졌다. 물론 태반이 김지훈의 배 속으로 사라졌다.

고경아를 빼고는 다들 술을 잘 마셨다.

“여보, 나까지 먹으면 운전은 누가 해요?”

한수임의 말에 정훈철이 걱정 말라는 듯 잔을 들었다.

“괜찮아, 여보. 숙소가 요 앞이야. 걸어가면 되니까 마시자구.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어? 안 그래, 지훈아.”

술의 힘은 대단했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살짝 술이 오른 정훈철의 말에 김지훈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형님. 마셔야죠.”

한 병을 더 마시는 사이, 어린아이의 인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칭얼대는 승희를 보며 자연스럽게 1차를 마무리했다.

아직 10시밖에 안 됐다.

걸어서 5분 거리에 호텔이 있었다.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모텔보다는 훨씬 나았다.

체크인을 하던 정훈철이 김지훈을 보며 씩 웃었다.

“지훈아, 방이 2개인데 어떻게 할까? 2차도 가야 하니까 자고 가야지.”

“전 숙소 가서 자면 돼요. 형님하고 형수님이 한방 쓰고, 경아 씨가 다른 방에서 자면 딱 맞네요.”

“그래? 둘 다 2인실인데? 진도가 아직 안 빠졌나 보네.”

뭔가 묘한 눈빛에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형님, 아직 손도 못 잡아 봤어요.”

“흐음! 보기보다 숙맥이구나. 느려.”

짐이라 해 봐야 가방 3개가 다였다.

재빨리 짐을 두고 나와 모두 2차를 갔다.

하루 종일 차에서 잔 탓에 승희의 눈이 아직도 초롱초롱했다. 한수임이 걱정을 하며 승희를 안았다.

“아휴! 승희 빨리 자야 되는데.”

“여보, 나둬. 가족끼리 이렇게 놀러온 게 얼마 만인데 벌써 재워?”

“그럼 내일 또 올라가면서 하루 종일 잔단 말이에요. 월요일에 유치원도 보내야 하는데.”

어디나 엄마들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건 월요일에 걱정하고. 가자, 지훈아.”

“예, 형님.”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승희에게 팔을 벌렸다.

“승희야, 삼촌하고 갈까?”

“응.”

승희가 좋아라 웃으며 김지훈에게 안겼다.

“어머머! 얘 좀 봐. 삼촌 힘들어, 승희야.”

한수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보다 무거웠지만 이상하게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형님, 2차는 제가 살게요.”

“안 돼. 오늘은 내가 사는 날이야.”

“구미까지 오셨는데 2차는 제가 사야죠. 비싼 건 못 사고, 아까 오다 보니까 포장마차 있던데, 어떠세요? 앞에 마당이 꽤 넓어서 승희도 뛰어놀기 좋을 것 같던데요. 형수님, 경아 씨, 괜찮죠?”

“그럼요.”

우르르 포장마차로 몰려갔다.

소주 2병에 닭발과 홍합을 시켰다. 여자들이 죽어도 닭발은 못 먹는다고 아우성을 쳐 김치전 2장을 더 시켰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갔다.

어느새 고경아가 승희와 함께 마당으로 나가 놀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정훈철이 잔을 따르며 물었다.

“이렇게 잘 키워 놨으니 부모님이 참 좋아하시겠어. 나도 승희를 지훈이 너처럼 길렀으면 좋겠다. 그런데 부모님은 뭐 하셔?”

한수임도 궁금한지 고개를 빼며 눈을 반짝였다.

막 술을 마시던 김지훈이 담담하게 대답을 했다.

“안 계세요.”

“응? 안 계셔? 미안하다, 내가 괜한 걸 물었네.”

“아니에요. 벌써 8년 전 일인데요, 뭐.”

분위기가 가라앉자 김지훈이 애써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 보니까 저도 형님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네요.”

“그런가? 뭐 별거 있겠어. 학교 졸업해서 직장 다니고, 결혼해서 애 낳은 게 다지. 하하하!”

형제가 없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정훈철은 집안도 꽤 유복했다. 능력도 꽤 뛰어나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MBS 보도국의 PD까지 됐다. 정말 남부럽지 않은 삶이었다.

다만 다른 문제가 없는데도 아이가 생기기 않아 오랜 노력 끝에 승희를 얻었다. 지금도 둘째를 원했지만, 생기지 않아 승희를 더욱 애지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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