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가족! 그 그리운 이름 Ⅰ (1)
“맞아, 내가 너무 급했어. 석션을 할 때는 기도가 잘 보였는데, 막상 인투베이션을 하려고 할 때는 기관지에서 물이 나오더라. 근데 그냥 밀어 넣었거든. 환자는 급한데, 한 번 실수하니까 당황해서 두 번째는 더 힘들었어. 경석이 형이 손을 바꾸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거야. 알고 있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한가 봐.”
실패한 이유를 알았지만 여전히 안색이 펴지지 않았다.
이경석이 김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수야, 너 진짜 일 잘해, 인마. 인턴이 인투베이션 실수하는 건 당연한 거야. 지훈이라고 실수 안 할 것 같아? 저놈도 우리가 없으면 말짱 꽝이야.”
김지훈이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심각해지면 김경수가 더 고민하고 마음의 상처까지 받을지도 몰랐다.
“맞아요, 형. 그때 우리가 다 같이 달려들지 않았으면 은비 못 살렸을 거예요. 은비의 심장이 뛰었을 때도 기뻤지만, 우리가 함께 해냈다는 게 정말 좋았거든요. 경수가 없었다면 은비를 살리지 못했을 거예요.”
김경수가 조금은 얼굴을 펴며 물었다.
“정말?”
“야, 뭐가 정말이야. 당연한 거지. 너 없었으면 은비 죽었어, 인마. 그리고 응급실에서 문제 생긴 적 있어?”
“큰 문제는 없었지.”
“봐, 그냥 답이 나오잖아. 경수야, 너 지금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경석이 형, 그렇죠?”
이경석이 얼른 말을 받았다.
“그럼. 하여튼 경수 이 자식도 너무 자신감이 없어서 탈이야. 날 봐, 인마. 인턴만 네 번째 도는데 인투베이션도 제대로 못하고, 풀드 엘보우 정복도 몰랐는데 웃고 살잖아. 배우면 돼. 앞으로 무지하게 많은 날이 남았어, 인마.”
그제야 김경수의 얼굴이 펴졌다.
김지훈도 따라 더욱 밝게 웃었다.
다들 마음이 통하는 동기들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앞으로도 큰일 없을 거야. 우리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그때 손일석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김지훈, 큰 문제가 없긴.”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다들 놀라 손일석을 보았다.
“악어가 있잖아. 김지훈, 네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악어가 있다고 생각해야 돼. 저번에는 변상훈 과장님 때문에 잘 넘어갔다며. 하지만 곧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칠걸?”
“날벼락은 무슨 날벼락. 악어는 이제 무시하고 살 거야. 환자를 앞에 두었을 때는 우리도 선후배가 아니라 의사인 걸 먼저 생각해야 돼.”
김지훈이 변상훈 과장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손일석이 코웃음을 쳤다.
“그런다고 악어가 물러날 것 같아? 아마 더 지랄할걸. 트집 잡을 게 없으면 아마 1분 안에 안 왔다고 난리를 칠 거다. 너, 응급실 돌 때 조심해라. 아니면 정말 곡소리 날지도 모른다.”
악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선배였다.
이경석이 여유롭게 웃었다.
“일석아, 걱정 붙들어 매. 상훈이 형도 악어 찍었어. 그럼 자동적으로 성기 형한테도 찍힌 거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있잖아. 내 앞에서 지훈이 너한테 엉뚱한 트집 잡으면 그냥 죽여 버릴게.”
김지훈이 호들갑을 떨며 이경석의 손을 잡았다.
“형, 형만 믿을게요.”
“그래. 나만 믿어, 인마.”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며 초를 쳤다.
“선배한테는 그냥 머리를 숙이는 악어가 과연 과장님들이나 형한테 걸릴까요? 틈을 보겠죠. 지훈이만 딱 남는 순간, 그냥 물어뜯을 겁니다.”
“에이씨! 이 자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재수 없는 소리를 하지? 너, 뭐 잘못 먹었어?”
“다 지훈이 너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잘 피해 다녀. 붙어 봐야 너만 손해라는 거 절대 잊지 마. 그냥 꾹 참아. 내가 전에 말했지?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장난하듯 툭툭 내던지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김지훈을 걱정하는 손일석의 속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모두 다 고마웠다.
같은 의사로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었다.
“고맙다, 일석아. 경석이 형도 고맙구요. 경수야, 너한테도 고마워.”
정말 엉뚱한 말을 한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일어났다.
“형, 나 좀 자야겠어요. 먼저 올라갈게요. 그리고 일석이 너는 나 따라와.”
“왜?”
의아해하는 눈을 뒤로하고 중환자실로 향했다.
은비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체크해야 할 것을 알려 주었다. 손일석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일이 받아 적었다.
“일석아, 네가 내 다음 텀이라 정말 다행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만큼은 못해도 은비를 반드시 걸어 나가게 만든다. 그래야 연애도 할 거 아냐, 인마.”
습관처럼 달라붙는 그놈의 농담조차 즐거웠다. 손일석이 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훈이 탁상시계 알람을 6시 30분에 맞췄다.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마치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잠을 자던 김지훈이 요란한 알람 소리에도 간신히 눈을 떴다.
창밖이 조금은 어두운 것 같았다.
한동안 머리를 감싸쥐며 침대에 앉아 있던 김지훈이 세면실로 향했다. 깨끗이 면도를 하고, 뜨거운 물로 샤워까지 하자 피로가 조금은 풀렸다.
‘후우! 체력이 달리네. 1년차 때는 어떻게 버티나.’
공연한 걱정을 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흔들며 새 옷을 꺼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후 전화를 기다렸다.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멍청히 앉아 있던 김지훈의 눈에 하얀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신현수가 남긴 마취과 인수인계장이었다.
“에이! 새끼. 말로 직접 듣는 게 제일 좋은데, 달랑 인계장만 놓고 갔네. 도대체 언제 놓고 간 거야?”
별 내용이 없었다. 그냥 일반적인 내용만 있을 뿐 주의해야 할 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조금은 난감했다. 마취과에서 인투베이션과 바이탈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려면 아무래도 사전 정보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맨땅에 헤딩!
김지훈이 입맛을 쩝쩝 다셨다.
‘그게 내 전공인데, 뭐가 걱정이야. 내일 저녁에 마취과에 들러서 간호사에게라도 미리 물어보면 되겠지.’
그때 외부에서 전화가 왔다.
김지훈이 부랴부랴 병원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는지, 이 시간에 윤서연이 주말 오프를 가고 있었다.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BMW의 창문이 열렸다.
“지훈아, 어디 가?”
“서연이구나.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넌 언제 올라가려고 이렇게 늦게 가?”
“일이 좀 있었어. 넌 누굴 만나는데, 그렇게 급해? 내가 데려다줄까?”
순간 고경아를 언급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훈철 PD를 만난다고 하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았다.
김지훈은 대충 둘러댔다.
“아냐, 아는 분이 몇 분 내려오셔서. 지금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셔. 주말 오프 잘 보내라. 운전 조심하고.”
“그래, 고마워. 너도 주말 오프 잘 보내.”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도 아닌데, 왜 대답을 하지 못했을까?
하긴 고경아와의 관계도 아직은 애매모호했다.
아직은 서로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정훈철과 낯익은 여인의 얼굴이 보였다.
부인 한수임이었다.
아담한 체구에 고운 얼굴, 무척이나 편안한 인상이었다.
고경아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훈 씨, 여기예요.”
“경아 씨, 내려오는 데 힘들지 않았어요? 안녕하세요, 정 PD님. 안녕하세요, 사모님.”
정훈철의 부인이 반갑게 웃으면서도 예전의 일이 생각났는지 붉어진 눈가를 닦았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려 죄송했어요.”
“아닙니다. 승희는요?”
“차 안에서 자고 있어요.”
이제 막 도착했을 텐데, 피곤하지도 않은지 정훈철이 차 문을 열며 서둘렀다.
“김지훈 선생님, 일단 타시죠. 배고프실 텐데, 빨리 출발합시다. 여보, 뭐 해. 빨리 타요.”
조수석에는 김지훈이 탔고, 고경아와 한수임은 뒷좌석에 탔다. 차에서 자고 있던 승희가 옹알거리며 눈도 뜨지 못하고 엄마 품에 안겼다. 5살짜리 아이에게는 장거리 여행이 무리였을 것이다.
어차피 고경아까지 같이 만나는데 한 사람이 고생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너무 피곤했던 탓에 내려온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서울로 올라갈 걸 그랬습니다. 승희도 힘들어 하고, PD님도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이번에 느낀 게 많아 그동안 못 쓴 휴가를 냈어요.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오고 좋네요. 혹시 맛있는 식당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생각해 보니 술집 말고는 병원 앞 식당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밖에서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그럼 제가 알아본 곳으로 가시죠. 이쪽에 근무하는 동료들이 금오산 근처에 가면 맛있는 집이 있답니다.”
정훈철이 이미 맛집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금오산!
김지훈도 금오산이 구미 근처에 있다는 것과 유원지도 있고, 등산 코스로도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산도 아닌데, 정훈철이 어떻게 식당까지 알아냈는지 궁금했다.
“정 PD님, 전에 금오산을 와 보셨어요?”
“사실 구미도 처음입니다. 직장 동료들한테 잘 모셔야 할 분이 계신데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더니 알려 주더군요. 방송국 사람들이 의외로 맛집을 잘 아니까 꽤 괜찮은 식당일 겁니다.”
MBS는 전국 방송이고, 방송국 사람들만큼 발이 넓은 사람도 없다. 특히 9시 뉴스의 PD정도 되면 지역 방송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상당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다른 부탁도 아니고 맛있는 식당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 정도라면 발 벗고 나섰을 것이다.
잘 모셔야 할 분이라는 소리에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잠시 후, 하얀 중형차 한 대가 병원을 빠져나왔다.
8시쯤 금오산 근처에 도착했다.
금오산이 근방에서는 꽤 유명한 곳인지 식당가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훈철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식당을 찾았다.
한우 고깃집이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다들 들어가시죠.”
식당에 들어선 정훈철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주인이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며 예약된 방으로 안내했다. 방송국 PD가 어떤 직업인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차에서부터 지금까지 승희를 꼭 안고 있는 한수임의 눈에 엄마의 사랑이 가득했다.
정훈철이 방에 들어가자마자 승희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바닥에 방석을 깔았다. 행여 추울세라 윗옷을 꼭 덮어 주었다. 아빠의 사랑이었다.
곧 특등심과 밑반찬들이 들어왔다.
정훈철이 직접 고기를 구우며 입맛을 다셨다.
“야! 고기 좋네. 김지훈 선생님, 마블링이 예술이죠? 주인이 꽤 신경을 쓴 모양입니다. 완전히 익으면 맛이 없으니까 지금 바로 드세요.”
역시 마블링이 눈꽃처럼 퍼진 특등심이었다.
입에서 살살 녹았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김지훈이 감탄을 했다. 소고기는 먹어 봤어도 최고급 등심은 처음이었다. 가히 맛의 신세계였다.
다들 한 점씩 입에 넣었을 때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한수임이 먹다 말고 얼른 승희를 안았다.
“우리 승희 깼구나. 승희야, 이 선생님 누군지 기억나?”
잠에서 덜 깬 승희가 김지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승희가 아야 했을 때 안 아프게 해 주신 선생님이잖아. 엄마가 맨날 말해 줬는데, 기억 안 나?”
“그 선생님이야?”
벌써 한 달 가까이 된 일이었다. 아이가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승희가 마치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발딱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한수임이 꽤나 김지훈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