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작고 가냘픈 생명 (3)
“웬일이에요? 오늘 막차 타고 올라갈 건데.”
(아직 차표 안 끊으셨죠?)
“일이 있어서 아직 못 끊었어요. 설마 자리가 없겠어요.”
(잘됐네요. 지훈 씨, 올라오지 마세요.)
올라오지 말라니, 잠이 다 달아났다.
“왜요?”
(제가 내려갈게요.)
“내려온다구요? 구미 엄청 멀어요.”
고경아가 웃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은 정 PD님 가족하고 같이 내려가기로 했어요. 어제 저녁을 함께하다가 지훈 씨만 괜찮으면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괜찮을까요?)
정훈철의 가족이 고경아와 함께 내려온다니, 솔직히 놀랄 일이었다.
“그래요? 나야 상관없긴 한데, 정 PD님까지 오시면…….”
(사모님이 너무 좋으세요. 저도 지훈 씨한테 말도 안 하고 결정할 수 없다고 했는데, 정 PD님하고 사모님이…….)
“사모님이 뭐요?”
고경아가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우리 내려가도 돼요? 지훈 씨가 싫다고 하면 제가 사모님께 말씀드릴게요.)
김지훈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둘만의 데이트를 방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승희도 보고 싶었다. 정훈철과 부인의 호의도 거절하기 쉽지 않았다.
더욱이 서울로 가지 않아도 되면 그 시간만큼 송은비를 더 살필 수 있었다. 사실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구미로 내려오라고 해야 할 이유가 의외로 많았다.
“좋아요. 내가 지금 정 PD님에게 전화를 걸기가 좀 그러니까 대신 전화해 줄래요?”
(걱정 마세요. 그럼 이따 저녁에 봐요.)
전화를 끊으려는 기색에 김지훈이 다급하게 말했다.
“경아 씨, 언제쯤 출발할 것 같아요?”
(근무 끝나고 가야 하니까, 빨라도 2시는 돼야 할 것 같아요. 구미까지는 얼마나 걸려요?)
“대여섯 시간은 걸리니까, 7시는 넘어야 도착하겠네요. 그럼 그때 봐요.”
고경아의 들뜬 목소리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여유가 생겼다.
오후 1시.
토요일 정규 근무가 끝났다.
병동 환자들과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중환자실에 들른 후 외래로 갔다.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막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과장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어! 김지훈, 수고했어. 다음엔 뭐 돌아?”
장성기 과장의 눈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마취과 돕니다.”
“그래도 좀 편하겠구나. 네 덕에 즐거웠었는데, 회식도 못 하고 아쉬워서 어떡하냐.”
“시간 되시면 저녁 사 주십시오.”
김지훈이 이젠 제법 사회생활을 한 티를 내고 있었다.
“그래, 꼭 사 줄게. 다음 텀으로 누가 와? 인계 확실히 해. 잘할지 모르겠네.”
“손일석이 옵니다. 저보다 훨씬 일 잘합니다.”
“너보다? 흐음! 두고 보자.”
말을 하면서도 자꾸 눈을 껌뻑이는 김지훈을 본 장성기 과장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피곤한 모양이구나. 빨리 가서 쉬어.”
“예, 과장님. 감사했습니다.”
변상훈 과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진료실을 나섰다.
김지훈이 뒤를 따랐다.
“은비는 어때?”
“방금 전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산소 포화도가 얼마나 나오든?”
이제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지 이틀도 안 됐다.
호흡의 양상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숨을 쉬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산소 포화도는 무척 중요한 지표였다.
“97~98프로 정도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이탈은?”
“스테이블(stable:안정적) 합니다.”
“소변은?”
“시간당 50시시 정도 나옵니다.”
“열은?”
“오전에 한 차례 미열이 있기는 했지만, 곧 떨어졌습니다.”
“점심때 체스트 냈는데, 확인했어?”
“예, 봤습니다. 아침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 특별한 변화는 없었습니다.”
“백혈구 수치는?”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아침에 보긴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자꾸 졸음이 몰려와 정신까지 흐리멍덩한 상태였다.
변상훈 과장이 웃었다.
“정상이었으니까 기억이 안 나겠지? 지금 내가 물어본 것들이 어떤 환자를 보든 기본적으로 체크해야 할 사항이야. 이것만 잘 기억해도 최소한 실수는 하지 않을 거다, 김지훈.”
“예, 명심하겠습니다.”
“의사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았길 바란다. 일반 외과 의사가 되려면 앞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할 거야. 열심히 해. 그동안 수고했어. 네 덕에 나도 아주 즐거웠다.”
“많이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자식!”
변상훈 과장이 미소를 지으며 병원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던 장성기 과장이 손가락질을 했다.
“변상훈, 그렇게 아쉬워. 얼굴에 티가 팍팍 난다.”
“넌 안 아쉽냐? 저런 후배를 만난 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드네. 중환자실 환자 보란다고 이번 주 내내 거의 킵(keep)을 하더라. 1년차도 그렇게는 못 할 거야.”
“야, 우리 과나 니네 과 할 것도 아닌데, 잊어.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 아쉬워해 봐야 이미 일반 외과 수중에 든 떡이다.”
“살살 꼬셔 볼까?”
장성기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혁민 선생님한테 죽고 싶으면 뭘 못 하겠냐. 저런 놈을 중간에 낚아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다.”
“그렇지? 그래도 너무 욕심이 난다. 하하하!”
변상훈 과장의 웃음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인턴 4명이 응급실에 딸린 당직실에 모였다.
후줄근한 모습으로 졸려서 눈이 거의 감긴 김지훈.
심각한 기색이 역력한 손일석.
나름 여유가 있지만 뭔가 불안해하는 이경석.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김경수.
그들의 공통점은 성형외과와 흉부외과를 돌아야 하는 인턴들이라는 것이었다.
다들 표정이 안 좋은 이유가 있었다. 김지훈 때문이었다.
깨지고 타는 게 정상이었던 성형외과 장성기 과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흉부외과에서는 흉부 도관까지 박았다. 앞에서 그렇게 해 놨으니 다음 텀에게는 정말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잘해야 본전이고, 까딱하면 살벌하게 깨질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종이 2장을 꺼냈다.
“한 장은 기존의 인계장이고, 나머지 한 장은 내가 만든 거야.”
바로 다음 텀인 손일석이 탁자 위에 인계장을 펼쳤다.
6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것에 쏠렸다.
잠시 후, 탄식 비슷한 한숨이 터졌다.
“김지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졸지 말고 세수 좀 하고 와. 이건 비상이야, 비상. 아니구나, 날벼락을 날려 놓고 지금 잠이 와?”
연거푸 하품을 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고는 세수를 했다.
그래도 정신이 몽롱한지 비누칠도 하지 않고 아예 머리까지 감고 있었다.
“뭐가 날벼락이야?”
손일석이 인계장을 보며 한숨만 쉬었다.
“그냥 돌아도 깨지는 과에 뭔 일을 이렇게 늘려 놨어. 이 정도면 일이 더블이잖아. 이거 우리한테는 아주 심각한 일이다. 경석이 형, 안 그래요? 경수야, 너는 어때?”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가로챘다.
“일석아, 이렇게만 하면 수처를 해도 안 타고, 변상훈 과장님한테 체스트 튜브(흉부 도관)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중환자실 환자는 많이 좋아져서 킵(keep) 해야 할 일도 거의 없을걸?”
“좋아, 다 좋아. 내 삼겹살 한 근이 아니라 두 근이라도 갖다 놓고 연습한다. 그런데 오프까지 반납한 이 사태는 뭐니, 이 죽일 놈아?”
“일석아, 오프는 가도 돼. 그건 내가 수처하고 싶어서 경석이 형하고 경수한테 부탁해서 한 일이야. 과장님들도 오프 반납하는 거 좋아하지 않으셔.”
“정말? 확실해?”
“그럼 당연하지. 오프 가지 말라는 말씀은 한 마디도 안 하셨어. 도리어 가라고 그러셨다니까.”
손일석이 하도 난리를 쳐서 잠이 다 깰 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일석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후! 그럼 다행이다. 지금 이거 하나 만들었는데, 아주 중요한 시기거든. 주중 오프 두 번만 보장하면 내 너보다 더 열심히 돈다.”
손일석이 새끼손가락을 쫙 폈다.
에휴! 그럼 그렇지.
난생처음 온 동네에서 그새 여자를 만나다니, 재주가 비상하긴 했다.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갑자기 이경석이 눈을 부릅뜨며 손일석의 뒤통수를 쳤다.
“아야! 왜 때려요, 형.”
“너, 지금까지 여자 때문에 그런 거야?”
“형, 그럼 뭐 때문에 이러겠어요. 어차피 일은 해야 되는 거지만, 여자는 한 번 떠나면 다신 못 잡잖아요. 유부남이라고 벌써 총각의 비애를 잊으신 거예요?”
이경석도 웃고 말았다.
“햐! 총각의 비애가 이럴 때 쓰는 말이냐? 너, 여자 둘만 붙여 주면 지훈이보다 더 엑설런트해지겠다.”
“어? 형, 어떻게 알았어요. 센스 있으시네.”
“지랄을 해라. 지훈아, 이대로 하면 되는 거지? 만만치 않겠는데. 아니지, 일석이가 있구나.”
걱정을 하던 이경석이 손일석을 쳐다보며 반색했다.
“형, 뭐가 아니에요?”
“지훈아, 여자한테 정신이 팔렸는데 일석이가 너처럼 일을 하겠냐? 대충 돌다가 무지하게 깨지겠지. 그럼 그다음에 도는 나는 한결 편하게 돌 수 있다는 말이지.”
“에이! 형이 일석이를 아직 잘 모르시네. 말은 이렇게 해도 일은 확실하게 하는 놈이에요. 긴장하셔야 할 겁니다.”
손일석이 크게 웃으며 김지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하이파이브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음하하하! 역시 지훈이는 날 정확하게 알아. 경석이 형, 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하는 놈입니다. 무시하지 마세요.”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이경석이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김경수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훈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김경수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심상치 않은 기색에 김지훈이 걱정을 했다.
“경수야,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되게 안 좋다.”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중환자실에 입원한 애 있잖아.”
“은비? 은비는 왜?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
잠시 입을 다문 채 뭔가 주저하던 김경수가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 사실은 은비 때문은 아니고, 응급실에서 은비 인투베이션 할 때 말이야. 넌 단번에 했는데, 왜 나는 두 번이나 실패했을까?”
순간 서로 째려보며 장난을 치던 이경석과 손일석이 입을 다물었다.
같은 인턴끼리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인간적으로 누구나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동료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의사로서의 자존심까지 뭉개질 수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김지훈이 김경수를 툭툭 치며 웃었다.
“운이지, 뭐. 그깟 일로 왜 이렇게 심각해?”
“운이 아니야. 그때 네가 옆에 없었으면 은비 인투베이션을 절대 못했을 거야. 솔직히 자존심도 상하지만, 그러다 환자 놓칠까 봐 그게 더 무서워.”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김경수였다.
다분히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동기에게 정말 묻기 힘든 질문을 했다. 그간 무척이나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농담처럼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잘 못하지만, 그때를 생각해 보면 경수 네가 가장 기본적인 걸 놓친 것 같아.”
“기본적인 것?”
“수술실에서 보면 시야가 되게 중요하잖아. 인투베이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석션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물 때문에 기도를 제대로 볼 수가 없잖아. 그런 데다 간호사가 너무 굵은 튜브를 줘서 기도 입구에서 미끄러지더라. 나도 네가 석션을 한 건 기억이 나는데, 아마 마음이 너무 급했던 것 같아. 사실 내가 먼저 했으면 나도 똑같은 실수를 했을 거야.”
김경수가 곰곰이 그날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