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환자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2)
“아닙니다.”
“그런데 텐션이 걸릴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어? 게다가 텐션이라고 소리까지 쳤는데, 튜브부터 박으려고 해? 환자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일반 외과 한다는 놈이 그렇게밖에 못 해?”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니, 환자 죽고 난 다음에 사과하면 환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 네가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 때문에 죽을 뻔한 환자야.”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악어가 튜브 하려는 걸 막았어?”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였기 때문이 아니라 핑계를 대며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왜 말을 못해?”
“제가 판단을 잘못했습니다.”
“환자가 죽을 뻔하니까 이제야 그걸 알았어? 악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있든 없든 환자를 먼저 본 의사는 너야. 네가 일차적으로 환자의 목숨을 맡은 거란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김지훈, 똑바로 들어. 환자의 생명이 촌각을 다투면 옆에 대통령이 와도 눈을 돌리면 안 되는 게 의사야. 그깟 선배 눈치 보느라 환자를 뒤로 미룰 거면 당장 그만둬.”
김지훈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무엇이 두려워 주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변상훈 과장이 다시 고함을 지르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일반 외과 과장인 박경일이 들어왔다.
“변상훈 선생, 환자 잘 해결됐는데 왜 이렇게 혼내. 우리 과 지원한 놈인데, 가운 벗겠다.”
“화가 나서 그러지, 다른 이유가 있어? 김지훈, 나가서 환자 마무리하고 올려. 정형외과가 아니라 우리 과 환자다.”
김지훈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당직실을 나왔다.
밖에 있던 유석재가 김지훈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괜찮아, 인마. 악어 때문에 고생했다. 변상훈 과장님도 널 아껴서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거야.”
“제가 잘못한 일이에요. 환자를 앞에 두고 엉뚱한 생각을 했어요.”
“그래, 알아. 나도 인턴이었으면 당연히 그랬을 거야. 악어한테 개기기가 쉽지 않지. 자식, 넌 참 복도 많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유석재가 웃었다.
“텐션 걸렸는데 네가 응급 처치하고 튜브 박았다며. 그리고 밖에서 들으니까 환자 올리라고 하시는 것 같던데, 정말 너한테 감정이 있으면 그러시겠어? 도대체 김지훈이를 얼마나 믿는다는 소리야.”
“그런가요?”
“어이구! 김지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이럴 때 보면 앞뒤가 꽉 막혔어. 경석이 형, 안 그래요?”
이경석도 따라 웃으며 김지훈의 머리를 팔에 끼고 마구 흔들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 자식은 무슨 백이 있어서 벌써 튜브를 2개나 박아. 김지훈, 이참에 일반 외과 하지 말고, 흉부외과 해라. 아주 잘할 것 같아.”
유석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경석을 밀어냈다.
“어? 형, 왜 이러세요. 내년에 지훈이가 있어야 내가 편해요. 형은 공부 열심히 하셔서 들어오세요. 내가 다른 건 못 해도 말은 잘해 놓을게요.”
“어이구! 김지훈이 벌써 1년차네. 알았어, 인마. 그 대신 너도 의국에 내 얘기 잘해 줘야 한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구미에서 한결 여유를 찾았는지, 유석재가 예전처럼 농담을 하며 마구 웃었다. 낑낑대며 이경석의 팔에서 간신히 머리를 뺀 김지훈은 그제야 웃었다.
“선생님, 환자 오더 좀 내겠습니다.”
“그래, 그래. 김지훈, 파이팅!”
참 좋은 선배들이었다.
악어가 보이지 않아 더욱 좋았다. 하지만 이제 단단히 결심했다. 환자와 관련되는 한 선배이기 이전에 같은 의사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선배 의사들 앞에서는 항상 배우는 자세로 겸손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히 있었다.
박경일 과장이 혀를 찼다.
“살살하지, 왜 그렇게 혼을 내. 저러다 기죽어서 일이나 제대로 하겠어?”
“그럴 놈이면 혼도 안 냈어. 두고 봐, 김지훈이 저놈 내일이면 멀쩡하게 나타난다. 환자 보는 열성은 내가 본 것 중에 최고야. 손재주도 뛰어나고, 그냥 외과 의사다. 저런 놈이 밑에 들어오고 부럽다.”
“야하! 병 주고 약 주네.”
“줄려면 제대로 줘야지. 대충 상황을 보니까 악어가 찍은 것 같아. 그 새끼, 후배한테는 독하기로 유명하잖아. 그러니 환자 급한 걸 알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오늘 일로 환자에 대해서만은 앞으로 확실하게 할 거야.”
변상훈 과장의 눈에 화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박경일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잘했네. 에이구! 우리도 문제다.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데, 금 과장님 말을 어길 수도 없고.”
“무슨 소리야?”
“총장님 아들이 신현수인데, 우리 과 지원했잖아.”
“그래? 어째 총장님이 벌써 포석을 다지시는 것 같네.”
“그렇겠지. 근데 말이야, 신현수가 지금 구미 돌거든. 다음 텀에 우리 과에 오고.”
“그게 무슨 문제야?”
박경일 과장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잘해 주라신다.”
“뭐가 문제야? 잘해 주면 되지.”
“아직 우리 과 오지도 않았는데,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시네.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하여간 금 과장님도 너무 정치에 관심이 많아. 차라리 국회의원을 하시는 게 낫겠다.”
“누가 아니래냐.”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고민이다. 직접 봐야 알겠지만, 신현수가 엑설런트하다는 소리는 많이 듣는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긴 해. 애먼 놈 챙기라고 했으면 옷 벗고 싶어졌을 거다.”
변상훈 과장이 심란한 표정을 짓는 박경일 과장의 어깨를 툭 쳤다.
“신현수에 김지훈 같은 놈이 지원을 하고, 좋겠다. 그걸로 위안을 삼아. 저 정도면 이혁민 선생님한테 찍히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찍혔지. 너무 찍어서 탈이지.”
박경일 과장의 표정이 뭔가 묘했다.
“하하하! 당연한 걸 물어본 내가 바보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이번 주말 아주 특별하게 보냈어. 나, 간다.”
김지훈이 당직실을 나오는 변상훈 과장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과장님, 환자를 일단 중환자실로 올렸습니다. 지금 전화해서 확인했는데, 환자는 스테이블 합니다. 정형외과에서는 환자가 허락되는 대로 수술하겠다고 했습니다.”
“악어가 그런 오더 냈냐?”
“예.”
“내일 정식으로 다시 컨설트 내. 건방진 새끼.”
변상훈 과장이 욕을 하며 씩 웃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닙니다, 과장님.”
“아니긴 뭐가 아냐, 인마. 다음번에 또 그러면 확 눌러 버려. 바이탈 앞에서는 선후배가 아니라 환자가 먼저야. 알았지?”
“예, 과장님.”
“수고했다. 주말인데 좀 쉬어.”
김지훈이 손을 흔들며 나가는 변상훈 과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무섭게 혼이 났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을 알았다.
오늘 또 하나를 배웠고, 또 한 명의 정말 멋있는 선배 의사를 보았다.
***
세상사가 그렇듯 병원의 일상도 파도를 탄다.
정신없던 주말이 지나고, 의외의 한가로움이 찾아왔다.
숙소에 앉아 흉부외과 책을 뒤적이던 김지훈이 방송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김지훈 선생님, 0번. 김지훈 선생님, 0번.]
0번은 외부 전화다.
고향 친구가 아니라면 외부에서 전화할 사람이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자 교환이 외부와 연결해 주었다.
“네, 김지훈입니다.”
(정훈철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어? 정 PD님, 웬일이세요? 승희는 건강하죠?”
뜻밖이었지만 무척이나 반가운 전화였다.
(그럼요. 선생님 덕분에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혹시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안부도 물을 겸 한번 뵐까 해서요. 와이프와 함께 내려갈까 하는데요.)
오프긴 하지만 고경아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김지훈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떡하죠? 이미 약속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일전에 제대로 인사도 못 한 데다 와이프가 꼭 다시 뵙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네요. 그럼 혹시 그때 같이 계셨던 여자분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시죠?”
(정신이 없어서 아예 인사를 못 했습니다. 여건이 되면 와이프가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하네요. 우리 딸아이 때문에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시고 고생만 하셔서 저도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습니다.)
고경아의 의사를 물어봐야 했지만, 당장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가족과 함께 저녁 한 끼 하는 것이라면 고경아도 크게 불편하진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직장 근무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불규칙합니다. 여러 번 전화하셔야 할 수도 있어요. 저도 PD님께 연락이 왔었다고 전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딸아이를 구해 주셨는데 그 정도가 문제겠습니까. 와이프가 두 분을 정말 보고 싶어 하네요. 선생님은 언제 서울에 올라오시죠?)
나이 차이가 상당했지만, 정훈철 PD는 여전히 정중했다.
“전 11월이나 돼야 올라갑니다.”
(아직도 멀었네요. 그럼 아쉽지만, 그때 시간을 다시 잡겠습니다. 그리고 제 명함 갖고 계시죠?)
“예, 갖고 있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명색이 PD라 웬만한 일은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 부담 갖지 마시고요.)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하지만 이럴 때는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게 상대에 대한 예의였다.
“예,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다시 볼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도 아닌 구미까지 오겠다는 정훈철의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어쩌면 정말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경아에게 두세 번 전화를 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근무 중인가? 어디 놀러 갔나?’
고작 전화 통화가 되지 않을 뿐인데, 은근히 신경이 쓰인 김지훈이 다시 공중전화 박스로 향했다.
막 응급실 앞을 지날 무렵, 앰뷸런스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들어섰다.
김지훈이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간호사들이 급히 스트레치 카를 끌고 나왔다.
구급 대원들이 10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를 옮겨 실었다. 온몸이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의식이 없는지 고개가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팔다리는 축 늘어져 있었다.
“무슨 환자예요?”
“물에 빠진 환자예요. 호흡이 없어요.”
구급 대원의 다급한 말에 김지훈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의 가슴에 연결된 모니터가 삐익 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심전도 그래프가 일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레스트!”
김지훈이 크게 소리치자 당직실에서 나온 이경석과 김경수가 바로 달라붙었다. 인턴 4개월차다. 이경석은 서울과 구미의 중간 정도의 권한을 주는 천안에서 3개월을 돌았다. 더구나 중간에 나가기는 했어도 이번이 네 번째 인턴 근무였다.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시피알(CPR)을 시작했다.
심장 마사지를 하는 사이 김경수가 인투베이션을 시도했다.
아이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김경수가 재빨리 튜브를 기도에 넣고 확인을 했다.
앰부 배깅(ambu bagging:공기주머니를 짜서 호흡을 유지시키는 행동)을 하자 가슴이 아니라 배가 부풀어 올랐다.
기도가 아니라 식도로 들어간 것이다.
빠르게 튜브를 뺀 김경수가 두 번째 시도마저 실패했다.
이경석이 김지훈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손 바꿔!”
김지훈이 블레이드를 잡았다.
아이의 턱을 들어 올리자 침과 뒤섞인 물거품이 보였다.
“석션(suction).”
간호사들이 수액 라인을 확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린아이인 데다 심정지 상태인 탓에 혈관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 바짝 붙어 있던 김경수가 석션 팁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