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이것은 감동 그 자체다 (1)
글라스를 받아 든 이경석이 흠칫 놀라며 김지훈을 보았다.
주당들의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됐다.
“좋아, 사나이라면 원 샷!”
벌컥벌컥 글라스를 단번에 비운 김지훈이 머리에 잔을 털었다. 이경석 역시 머리 위로 잔을 들어 흔들었다.
“나보다 술 잘 마시는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대단하네요. 형, 괜찮으시죠?”
“그럼 인마. 이 정도에 쓰러질 내가 아냐.”
“그럼 한 번 더. 자! 다들 잔 채우시고. 서연이도 꽉꽉 눌러서 한잔. 위하여!”
김지훈이 글라스를 비웠다.
순간 욕지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뭔가를 꿀꺽 집어 삼킨 김지훈이 한껏 여유를 가장하며 잘 구워진 곰장어 하나를 집어 들었다.
“형, 아~”
“어? 나 주는 거야?”
“그럼요. 형님 먼저 드셔야죠.”
이경석이 곰장어를 물고는 좋아 죽었다.
어느 순간 집합이란 말을 싹 잊은 것 같았다.
“야, 다 잔 비웠지. 다시 채워. 오늘 죽자.”
분위기가 다시 살자 난리가 났다. 일부는 우거지상을 하고, 일부는 소리를 꽥꽥 지르며 잔을 비웠다.
술이 술을 먹는 시간이 다가왔다.
이경석이 연달아 잔을 비웠다.
덩달아 김지훈과 손일석까지 잔을 높이 들었다.
‘우와! 강적이네. 여기서 더 먹으면 나도 완전히 맛 간다. 그래도 좋으니까 경석이 형, 지금처럼만 해요.’
김지훈이 찬물을 들이켜며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마침내 이경석의 혀가 완전히 꼬부라졌다.
‘쿵’ 소리가 꽤나 크게 울렸다.
이경석이 머리를 박은 채 졸고 있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김지훈과 손일석을 빼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저마다 짝을 지어 소곤거리며 웃고 있었다.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이경석 선생님하고 전에 술 먹었었죠?”
“그럼요, 새앰. 벌써 몇 번 먹었죠.”
“괜찮았어요?”
“뭐가요? 원래 저러시잖아요. 혼자 막 술 먹고 떠들다가 그냥 취해서 쓰러지시던데요. 조금 있으면 일어나 알아서 들어가실 거예요. 근데 샘도 정말 술 세시네요. 글라스로 먹고도 괜찮아요?”
다들 혀가 말렸지만 용케도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왜 날 그렇게 봐?”
“너 때문에 글라스로 마셨잖아, 이 자식아.”
“낸들 경석이 형이 이렇게 변했을 줄 알았어? 아휴! 천안 새끼들은 도대체 뭘 본 거야?”
김지훈이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려 국물만 들이켰다.
그때 윤서연이 김지훈의 어깨에 척 손을 얹었다.
“야, 김지훈.”
“왜 서연아. 어? 너, 그만 마셔. 얼굴이 난로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내가 뭘?”
“이씨! 나쁜 새끼. 너, 그러는 거 아니야. 나쁜 놈.”
윤서연이 횡설수설하며 김지훈을 마구 흔들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서연아, 너까지 왜 이러니.’
어느새 손일석도 간호사들 틈에 앉아 신이 나 떠들고 있었다. 김지훈은 자꾸 엉겨 붙으며 소리를 지르는 윤서연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이상하게도 윤서연의 혀 꼬부라진 소리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간호사가 실실 웃었다.
“새앰, 딱 보니까 윤서연 쌤이 새앰 좋아하네. 안 그래요?”
김지훈이 큰일 날 소리라며 손을 마구 저었다.
술판이 끝났다.
물론 김지훈과 몸도 못 가누는 윤서연만 끝났다.
손일석은 어느새 간호사들과 2차를 갔고, 이경석은 말 그래도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술도 못 먹는 게 도대체 몇 잔이나 먹은 거야? 다 큰 처녀가 이러다 큰일 나려고.’
내심 투덜거리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윤서연이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이다.
“김지훈, 넌 왜 몰라?”
“뭐가. 너, 많이 취했다. 들어가자. 데려다줄게.”
“이씨! 나 좋아하는 사람 많아. 알아?”
“그럼 알지. 서연이 네가 얼마나 예쁜데.”
“그런데 넌 왜 그래?”
난감한 일이었다. 때론 술이 속을 털어 내게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부풀리기도 한다. 평소에 그저 그렇게 보였던 이성이 유난히 예뻐 보이는 경우를 김지훈도 자주 경험했다.
“서연아, 빨리 들어가서 자. 내일 일해야지.”
“나, 안 들어가.”
“뭐? 안 들어가면 길바닥에서 잘래?”
“그러면 어때. 네가 날 지켜 주면 되잖아.”
점점 수위가 높아졌다.
김지훈이 서둘러 여자 인턴 숙소로 향했다.
구미에 파견된 여자 인턴은 윤서연뿐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방에 간신히 윤서연을 눕히고는 급히 빠져나왔다. 그 순간에도 볼 건 다 봤다.
머리를 흔들던 김지훈이 찬물에 세수를 했다. 그래도 술기운은 여전했고, 침대에 쓰러진 윤서연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이럴 땐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김지훈은 부리나케 2차 자리로 향했다.
‘가만, 문은 확실히 잠갔나?’
확신이 안 선 김지훈이 다시 돌아가 문을 확인했다.
다행히 잠겨 있었다.
“휴우!”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결국 개가 된다. 개는 짐승이다.
짐승이 되면 후회할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날 점심시간, 부스스한 얼굴로 손일석과 이경석이 식당에 나타났다.
“어후! 어제 너무 먹었다. 지훈아, 넌 괜찮아?”
“그럼 인마. 형은 괜찮아요?”
“죽겠다, 야. 그런데 나 어제 실수 안 했냐?”
이경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실수요? 기억 안 나요?”
“니들하고 술 마신 것까지만 기억나. 글라스로 마신 것 같기도 한데, 가물가물하네.”
“엥? 집합하고 글라스로 마신 거 정말 기억 안 나요?”
“안 나. 내가 정말 애들 집합시키라고 했어?”
어라, 이게 또 무슨 소린가?
“형, 정말이에요?”
“그래, 인마. 나 정말 실수 안 했지?”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안 했어요. 솔직히 조금만 더 나가셨으면 실수하셨겠죠.”
“에이! 내 그럴 줄 알았다. 딱 소주 한 병만 마셔야 하는데, 니들하고 마신다고 너무 마셨어. 혹시 이상한 소리라도 했으면 이해해라.”
뜻밖의 말이었다. 어제 이미 소문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런 거 없어요. 근데 형, 소문하고 진짜 다르네요.”
김지훈이 말을 하다 말고 움찔했다.
이경석이 웃었다.
“다 옛날 일이다. 니들도 성질 함부로 부리지 마. 뭐 그럴 놈들도 아니지만, 나중에 다 후회해. 로컬 나가서 생활해 보니까 다 쓸데없는 짓이더라. 나도 이젠 전문의 보드(면허)는 따야지.”
“형, 어느 과 하시려구요?”
“일반 외과. 난킴(예비역)이니까 옛날에 말썽을 부렸어도 뽑아 주지 않을까 싶다.”
“일반 외과요?”
김지훈과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그래, 근데 왜 이렇게 놀라?”
“우리 일반 외과 지원했거든요.”
“그래? 야! 이런 인연이 있네. 잘해 보자. 어차피 니들은 킴(현역 입영 대상자)이니까 나랑 경쟁할 필요도 없잖아.”
김지훈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형, 신현수 알죠?”
“총장님 아들? 알지. 애새끼, 인사도 제대로 안 하고 되게 딱딱하대. 니들하고는 완전히 다르더라.”
“현수랑 나랑 난킴(예비역)이에요.”
“뭐, 니들이 왜 난킴이야?”
얼마나 목소리가 컸는지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이경석이 급히 고개를 숙이며 김지훈을 보았다.
“저는 6개월 방위 갔다 왔구요. 현수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난킴은 확실해요.”
“걘 신의 아들이에요.”
손일석의 말에 이경석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뭐냐. 신현수는 확실하고, 너도 보니까 거의 100프론데 그럼 두 자리 남네. 어휴! 난 안 되겠다.”
“형이 왜 안 돼요?”
“니들도 내가 옛날에 어땠는지 들었을 거 아냐, 자식들아. 자리가 남아도 힘든데, 두 자리밖에 없으면 뽑아 주겠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이경석이 의기소침해졌다.
문득 어제 2차 자리에서 간호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새앰, 이경석 쌤이 새앰 정말 좋아하나 봐요. 평소 얼마나 새앰을 칭찬한다구요. 다른 쌤들한테는 한 번도 안 산 술도 샀잖아요.’
‘지금 뭐라카노. 내는?’
손일석의 사투리 흉내에 간호사들이 웃으며 손가락 2개를 폈다.
‘김지훈 새앰은 일등, 쌤은 이등.’
뭔가 힘이 되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7년이나 어린 후배가 나서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도 이경석이 좋았다.
툭하면 어깨동무를 하며 술을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정말 간절히 원하면 안 될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하고 싶은데, 아무 노력도 안 하실 거예요? 그리고 소문과 형의 지금 모습은 달라요. 그런데 뭐가 문제죠? 전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고 믿어요.”
“넌 아직 어려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래. 꼬리표 한번 붙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게 세상이야.”
“형, 그런 말 말고 일단 해 보세요. 전 형이 일반 외과에 합격할 거라는 감이 오는데요. 형답지 않게 왜 벌써 포기를 하세요.”
어느새 밥을 다 먹었다.
김지훈이 바쁘다며 먼저 일어났다.
이경석이 피식 웃었다.
“일석아, 저 자식 생각보다 건방지네. 한참 어린 게 나한테 설교를 하네.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원래 저런 놈이었냐?”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었다.
“경석이 형, 지훈이 부모님이 안 계세요. 그래서 6개월 방위 갔다 온 거예요. 학교도 혼자 힘으로 다녔구요. 제가 제일 친했는데도 방학 때는 물론 주말에도 얼굴 한번 못 봤어요. 주말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저 자식 먹고살 돈도 없었거든요.”
이경석이 깜짝 놀랐다.
“부모님이 안 계셨어? 그럼 물려주신 건?”
“있기야 있죠. 전세 얻으면 한 푼도 안 남아서 그렇지. 형이 생각하는 그런 놈 절대 아니에요. 지훈이가 형을 꽤 좋아하나 봐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한테 그런 소리 하는 거 처음 들었거든요. 동기들이 힘들어 하면 가장 먼저 나서도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절대 함부로 말하는 놈이 아니거든요.”
이경석이 멍한 표정으로 식당이 텅텅 빌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제법 잘사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살아왔는데, 나이 어린 후배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부끄럽기만 했다.
컴컴한 식당에서 생각에 잠겼던 이경석이 한참 후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캐비닛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야마(YAMA:의대 족보집)를 꺼내 먼지를 털었다.
확실히 과음한 다음 날은 몸이 힘들었다.
병동 일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깜빡깜빡 졸았다. 누군가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윤서연이었다.
“응? 서연이구나. 중환자실에는 웬일이야? 환자 있어?”
“아니, 그건 아니구. 혹시 어제 내가 실수 안 했어?”
다들 실수 타령이었다.
인턴을 돌며 격무에 시달리면 술 한 잔에도 취해 그럴 수 있긴 했다. 더구나 윤서연은 술도 약했다.
김지훈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했어. 얌전하게 잘만 들어가더라.”
“나 혼자?”
말하는 투가 지난밤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밤길인데, 어떻게 너 혼자 가라고 하냐? 내가 데려다줬지. 그리고 숙소 문 잘 잠가. 혼자라서 위험하겠더라.”
“지훈이 네가 내 걱정을 다 하고 웬일이야. 고마워.”
윤서연이 밝게 웃으며 음료수 하나를 내밀었다.
“고맙다.”
“언제 시간 나면 저녁이나 먹을래?”
“저녁? 글쎄,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저녁 먹을 시간이야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해서 한 말이라고 해도 윤서연의 말이 너무 마음에 걸렸다. 김지훈에게 윤서연은 여자가 아니라 동기였다.
“다음에 마취과 돌잖아. 그러면 시간 많지 않아?”
“마취과에서 배워야 할 게 좀 있어서 열심히 돌아야 해.”
“일반 외과 한다면서 뭘 배워?”
“인투베이션하고 바이탈 유지하는 법.”
윤서연이 살짝 눈을 흘겼다.
“나랑 밥 먹기 싫은 건 아니고?”
“내가 왜 그러겠어.”
슬슬 난처한 말이 나왔다. 그때 마침 응급실에서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김지훈이 잘됐다는 듯 윤서연에게 손을 흔들고 재빨리 중환자실을 나섰다.
‘큰일 났네. 서연이 쟤를 어쩌지?’
뭔가 감이 확실하게 온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싫다기보다는 난처했기 때문이다.
고경아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