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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8화 (48/1,329)

제1화 구미 생활이 점점 재밌어진다 (2)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수술 중에도 짜증이 치솟았다. 그런데 졸지에 김지훈의 보조까지 서게 됐으니 욕이 안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차마 한참 선배인 김진호 앞에서 대놓고 욕을 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대놓고 욕을 했다가 김지훈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은근히 겁을 먹은 것도 한몫했다.

김지훈을 보는 신현수의 눈빛도 차가웠다.

“커트(cut).”

정갑수가 수처하는 내내 인상을 쓰며 실을 잘랐다.

“수고하셨습니다.”

김지훈이 마치 들으라는 듯 소리치며 수술실을 나갔다.

신현수와 정갑수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근한 긴장을 동반한 알 수 없는 초조함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교차했다.

환자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확실하게 피가 멈추고 안정될 때까지 집중적인 감시와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지훈이 병동 일을 하며 수시로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살폈다.

수술이 잘됐는지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환자도 확실하게 의식을 찾았고, 바이탈도 안정적이었다.

김지훈이 환자를 수술했던 과정을 찬찬히 되짚었다.

일반 외과에서 가슴을 열어야 할 일은 없겠지만, 외과 의사라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술기라고 여겼다.

어느새 저녁 7시가 넘어갔다.

퇴근하는 길에 중환자실에 들른 변상훈 과장에게 김지훈이 한참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죄송한데 저 오늘 오프입니다.”

일반 환자도 아닌 중환자다.

특히 수술을 한 환자는 첫날이 가장 중요하다.

오프를 간다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그래? 환자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 열흘 만에 가는 오픈데 빨리 가야지.”

의외로 변상훈 과장이 흔쾌히 대답을 했다.

도리어 웃고 있었다.

“이 환자는 어떻게 하죠?”

“오프 가는 놈이 별걸 다 걱정하네. 김지훈, 지금 당장 안 가면 킵(keep) 시킨다.”

변상훈 과장이 김지훈의 등까지 밀었다.

이렇게 기분 좋게 오프를 보내기는 변상훈도 처음이었다.

김지훈은 꾸벅 인사를 하고 숙소로 달려갔다.

옷을 갈아입는 사이 손일석에게 응급실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별생각 없이 응급실로 간 김지훈이 이경석과 함께 손일석을 기다렸다.

쉬지 않고 울어 대는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응급실 당직인 김경수가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경수야, 저 아이 뭔데 저렇게 울어?”

“풀드 엘보우(pulled elbow:팔꿈치 아탈구)인데, 악어가 저녁 먹고 있다고 기다리래. 벌써 한 시간이 지났는데 뭐 하는지 몰라. 엄마 눈초리 봐라.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큰일 났어.”

‘pulled elbow’는 팔꿈치 관절이 반 정도 빠진 상태를 말한다. 성장 판 때문에 관절이 매우 약한 2~3살 이하의 아이에게 잘 발생한다.

아이가 통증 때문에 왼쪽 팔을 전혀 쓰지 못했다. 엄마가 안타까운 눈으로 아이를 보며 간호사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마침 손일석이 왔지만, 김지훈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훈아, 가자. 안 가?”

“일석아, 잠깐만. 저 아이 해결해야 되지 않겠어?”

“악어 환자 아냐? 괜히 건드렸다 문제만 만든다. 그리고 너 풀드 엘보우 맞춰 본 적은 있어?”

손일석의 말에도 김지훈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아파하잖아. 엄마는 얼마나 애가 타겠어.”

“그래도 악어한테 이미 노티 한 환자야.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인마. 악어랑 또 붙을래? 그땐 병원 나가야 한다.”

“내가 왜 나가. 그리고 찍히는 게 대수냐? 이건 악어와의 문제가 아니라 환자에 대한 의무야.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잖아. 이번에는 악어가 확실히 잘못하는 거야.”

‘어른도 아프면 힘이 드는데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는 얼마나 힘들겠어. 악어, 후배만 열심히 괴롭히지 말고 환자나 제대로 봐라.’

김지훈이 도리어 아이의 양측 팔꿈치 X-ray를 뷰 박스에 걸었다. 인턴 4명이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악어를 기다리면서 환자를 방치할 수는 없어. 확실하게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면 지금 빨리 해결하는 게 맞다고 봐. 더구나 어린아이야. 골절, 확실히 없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풀드 엘보우가 확실하네. 누구 팔꿈치 맞춰 본 적 있어? 경석이 형은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로컬(local:대학 병원 이외의 병원을 지칭)에서 근무해 경험이 많을 법한 이경석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도 사실 임상 실습 때 딱 한 번 해 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고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할게.”

“지훈아, 너는 해 본 적 있어?”

“딱 한 번 해 봤는데, 생각보다 쉬워.”

손일석이 잠시 김지훈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돼. 네가 했다고 하면 아마 악어가 죽이려고 할걸? 나도 지금 당장 치료하는 게 맞다고 보지만, 무작정 덤비지 말고 좋은 방법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역시 이미 전적이 있는 김지훈에게는 악어가 문제였다.

손일석의 말대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았다.

‘아이가 저렇게 아파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솔직히 악어를 피할 방법이 있으면 좋긴 한데.’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그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김지훈이 이경석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형, 형한테는 악어가 뭐라고 못 하겠죠?”

“당연하지. 그랬다간 내가 죽여 버리지. 근데 나도 해 본 적이 없어.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냐?”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리덕션(reduction:도수 정복)을 하고 차팅은 형이 하는 거예요. 간호사들 입만 막으면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이경석이 눈을 굴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좋은 생각이야. 그렇게 하자.”

인턴 4명이 우르르 아이한테 몰려갔다.

아이 엄마에게 설명을 한 김지훈이 정복하는 방법을 되짚었다. 자신감이 없으면 아이에게 도리어 고통만 줄 수 있었다.

의사의 불안은 그대로 환자와 보호자에게 전해진다.

‘자신 있게 하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김지훈이 과감하게 정복을 시도했다.

팔을 잡자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이고, 예뻐라. 조금만 참아, 조금만.”

김지훈이 팔꿈치를 서서히 꺾으며 바깥쪽으로 팔을 비틀었다. 똑 소리가 나며 관절이 제자리를 찾은 감촉이 전해졌다.

살살 팔을 폈다 굽혔다 하는 사이 아이의 울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진단만 정확하다면 무척이나 간단한 술기였다.

“다 된 거예요?”

“예, 잘 들어간 것 같네요.”

아이 엄마가 반색을 하다 김지훈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왜 팔을 아직도 못 움직이죠?”

순간 당황했던 김지훈이 옛 기억을 더듬어 간호사에게 사탕 하나를 얻어 왔다.

“엄마는 오른팔을 잡고 계세요. 애기야, 사탕 먹자.”

김지훈이 사탕을 흔들자 아이가 엄마를 보다 팔을 들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탕에 조바심이 난 아이가 쭉 팔을 펴 사탕을 잡았다. 원하는 것을 입에 넣은 아이가 웃었다.

“괜찮네요, 엄마. 앞으로 며칠간은 손잡고 다니지 마세요. 급하다고 팔을 잡아당기면 또 빠집니다.”

“네, 선생님.”

엄마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역시 환자를 치료했을 때의 기쁨과 비교할 것은 없었다.

이경석이 환아에 대한 차팅을 했다.

활짝 웃는 엄마를 보며 모두들 응급실을 나왔다.

“보람찬 하루를 끝마치고서…….”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다들 군가를 따라 불렀다.

미필인 손일석도 예과 때 문무대와 전방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 정도는 알고도 남았다.

포장마차 안이 시끄러웠다.

그동안 많이 친해진 탓도 있겠지만, 이경석은 소문과 달리 후배들에게 잘해 주었다.

게다가 응급실 간호사들까지 합석했다. 여자란 존재는 남자들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좀생이가 때론 호탕하게 돈을 써 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김지훈, 오늘 맛있게 마시자. 시작부터 즐겁다.”

이경석이 김지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첫 잔을 비웠다.

소주 몇 잔이 돌며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었다. 평소 궁금했던 것을 주고받는 사이 소주가 수월찮이 비워졌다. 슬슬 얼굴이 벌게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간호사들의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여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다들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이경석이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 김지훈이 손일석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석아, 네 정보망도 이젠 맛이 갔네. 경석이 형 실제로 보니까 소문하고 완전히 다르잖아.”

“그러게, 평소나 술 먹을 때나 다 좋네. 천안 자식들은 뭘 보고 이런 헛소문을 나한테 전한 거야. 다들 기합 한번 받아야겠는데.”

“어쨌든 좋다. 열흘 만에 마시는 술도 좋고, 너도 경석이 형도 다 좋다. 나, 오늘 퍼스트도 섰고, 마무리까지 했어. 정말 세상이 즐겁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으며 한 잔을 홀딱 비웠다.

하지만 소문의 진실을 속단하기에는 일렀다.

몇 잔 더 마신 이경석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김지훈, 손일석, 오늘 정말 기분 좋다. 내가 다 쏠 테니까 인턴들 모조리 집합시켜.”

우앗! 집합이라고?

술이 번쩍 깰 소리였다.

간호사들도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김지훈을 보았다.

술 마시면 불이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일단 급한 불은 꺼야 했다. 김지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일석아, 갔다 와. 경석이 형은 내가 보고 있을게.”

“숙소에 몇 명 없을 텐데. 이러다 난리 나는 거 아니냐?”

“일단 몇 명이라도 모이고 난 다음에 얘기하자. 설마 악어처럼 난리 치겠냐.”

손일석이 눈치를 보며 숙소로 달려갔다.

김지훈이 한 잔 더 하자는 이경석을 간신히 말렸다.

“형, 애들 오면 마시죠. 술 산다면서요.”

“그럴까? 그럼 담배 한 대 꼬실르자.”

이경석이 마지막 한 모금을 맛있게 피울 때쯤 손일석이 숨을 헐떡거리며 나타났다. 동기 3명과 윤서연이 보였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분위기 나빠질지도 모르는데, 서연이는 왜 데리고 왔어?”

“나도 몰라. 애들 부르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제 발로 따라온 거야.”

어라? 그런데 윤서연이 인사를 하며 김지훈 옆에 앉았다.

이경석이 바로 옆에 있었다.

큰 소리가 날지도 모르는데 난처한 상황이었다.

일단 한 잔씩 돌린 이경석이 머릿수를 셌다.

“김지훈, 12명이 와야 하는데, 나까지 일곱이잖아. 어떻게 된 거야?”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경석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질수록 동기들과 간호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헤 웃으며 이경석의 팔을 잡았다.

“형, 맞죠. 응급실 당직 2명에 오프 2명, 응급 수술 때문에 수술 들어간 1명 빼고 다 왔어요. 100프로네. 야! 형이 부르니까 그냥 다 오네요.”

“아니지. 남은 놈들이 다 와야 100프로지, 인마.”

“에이! 형. 서울에서도 인턴 집합이 있었는데, 빠진 놈이 무지하게 많았다니까요. 그런데 형이 부르니까 근무가 없는 인턴은 다 왔잖아요. 일석아, 그렇지 않냐?”

“어? 응, 그렇지. 경석이 형, 100프로예요.”

“정말? 니들 확인해 본다.”

거짓말까지 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이경석이 눈을 부라리자 김지훈이 윤서연을 툭툭 치며 속삭였다.

“서연아, 다 온 거라고 너도 한 마디 해.”

김지훈이 있다는 말에 무작정 나온 윤서연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겁을 먹은 윤서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경석 선생님, 정말이에요. 숙소에 아무도 없어요.”

“들었죠. 인턴들 다 나왔다니까요? 형이 나오라는데 누가 안 나오겠어요.”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슬슬 눈빛이 사나워지는 듯한 기색에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렸다.

‘아후! 선배들이 다 왜 이러냐. 경석이 형, 형은 제발 악어나 정갑수 같은 사람이 아니길 바랍니다.’

도박이 필요했다. 더구나 주당은 주당을 알아본다.

이경석은 지금까지 오직 원 샷만을 고집했다.

김지훈이 글라스 2개에 소주를 부었다.

과연 술이 와장창 들어가면 완벽한 개가 될지, 아니면 술에 취한 떡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경석이 형, 사나이라면 원 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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