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구미 생활이 점점 재밌어진다 (1)
연애의 고수는 아닐지 몰라도 풍부한 경험이 있는 손일석이 있지 않은가!
‘조금 불안하긴 해도 이 방면은 나보단 일석이가 낫지. 그런데 뭐라고 핑계를 대고 물어보지? 그 자식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일에 몰두했다.
인턴의 권한이 많은 탓인지, 모든 생활이 점점 재밌어지고 있었다. 그 탓인지 그렇게 맛이 없었던 밥까지 맛있었다.
***
어느새 술 약속이 있는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성형외과 수술이 두 건 잡혔다.
김지훈이 응급실을 커버한 이후 수술 건수가 늘어 장성기 과장이 항상 싱글벙글 웃었다. 외과 의사에게 수술은 자신의 일을 넘어 일종의 즐거움이었다.
첫 수술은 친구와 싸우다가 코뼈가 부러진 환자였다.
이런 경우 보험이 되지 않아 치료비가 꽤 나올 것이다.
‘그러게, 왜 싸워. 몸 버리고, 돈 날리고 잘한다.’
비골 골절(nasal bone fracture).
코 주변의 부종이 완전히 가라앉아야 정복을 할 수 있다,
입원한 지 5일 만에 부종이 사라져 이삼 일 정도 빠르게 수술을 시행했다.
장성기 과장이 끝이 뭉뚝한 수술 도구를 코 안에 집어넣어 들어 올렸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엇나갔던 코뼈가 제자리를 찾았다.
약한 안정제를 투여해 몽롱한 상태에 빠졌던 환자가 움찔거렸다.
장성기 과장이 손가락으로 힘을 가하며 코뼈가 다시 주저앉는지 확인한 후 수술을 끝냈다.
“잘됐다. 끝내자.”
대부분의 경우처럼 폐쇄적인 방법으로 간단하게 코를 세웠다.
김지훈이 한 일이라고는 옆에 서서 구경한 것뿐이었다.
수술실에서 정복을 했지만, 수술인지 아닌지 애매모하기만 했다. 곧바로 광대뼈 골절 환자의 수술이 이어졌다.
교통사고 환자였다.
자동차 보험사에서 치료비를 내지만, 자부담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고는 안 내고, 안 당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광대뼈 골절(zygomatic arch fracture).
전신 마취가 필요했다.
서울에서 보았던 마취과 전공의 김진호가 들어와 마취를 했다. 잠시 후, 김진호가 나가고 신현수가 마취 상태를 살폈다.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마취 유지를 현수한테 맡기시네. 역시 엑설런트한 놈이야.’
김지훈이 슬며시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신현수가 쓱 한번 쳐다보고는 마취 기록에만 열중했다.
‘자식! 점점 더 쌀쌀해지네.’
이내 김지훈도 수술에 집중했다.
장성기 과장이 입안으로 접근해 광대뼈를 들어 올렸다.
손쉽게 뼈가 맞춰졌지만 장성기 과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광대뼈를 누르자 쉽게 주저앉았다.
“플레이트(plate:뼈를 고정시키는 티타늄 판) 박자. 마취과, 시간 좀 걸린다.”
“예, 과장님.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신현수가 바로 대답을 했다. 연락을 받고 들어온 김진호가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잠시 환자 상태를 살핀 후 다시 신현수에게 마취 유지를 맡겼다. 상당한 신뢰였다.
마취는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자발 호흡을 정지시키고, 의식까지 마비시킨다.
수술하는 내내 혈압과 호흡, 그리고 필수 장기의 기능까지 체크해야 한다. 즉 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이다.
바이탈을 다루는 또 다른 형태였다.
‘나도 최소한 저 정도는 배워야 한다. 아니, 인투베이션부터 바이탈 유지까지 기본이 되는 것은 다 배우고 만다.’
슬며시 느껴지는 긴장감에 김지훈이 슬쩍 어깨를 돌렸다.
더 넓게 절개를 했지만 그래 봐야 입안이었다.
1st 자리에 서서도 수술 시야가 너무 나빴다. 그간의 경험 덕분에 김지훈이 별 탈 없이 어시스트를 서긴 했지만, 사실상 3rd나 다름없었다. 약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골절 부위를 플레이트로 연결해 고정하고 상처를 봉합했다. 절개창이 작은 데다 입안을 통해 접근해야 해서 수술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험이 많은 장성기 과장이었지만 제법 시간이 걸렸다.
오래간만에 점심을 건너뛰었다.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풀며 병동으로 올라갔다.
간호사가 변상훈 과장이 응급실에서 찾는다고 했다.
‘무슨 환잔데 직접 가셨지?’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김지훈이 응급실로 향했다.
변상훈 과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우측 흉부에 흉부 도관을 박은 환자의 안색이 창백했다.
수액과 피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도관에 연결된 물통이 붉은 피로 가득했다.
지금도 도관을 따라 줄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김지훈이 재빨리 환자의 바이탈을 체크했다.
다행히 저혈량성 쇼크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피가 멈추지 않는다면 쇼크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심각한 표정으로 10여 분을 지켜보던 변상훈 과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흠! 김지훈, X-ray하고 CT 좀 걸어.”
흉부 X-ray에 찍힌 우측 폐가 전체적으로 허옇게 보였다.
공기는 까맣게 보이고, 액체는 하얗게 보인다.
흉곽 내에 액체가 차 있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여?”
외상 환자에 늑골 골절이 동반돼 있다면 생각할 수 있는 임프레션(impression:임시 진단)은 하나였다.
“다발성 늑골 골절에 혈흉(hemothorax)이 동반된 환자로 보입니다.”
“잘 봤어. 수술 적응 증은 알아?”
“1,000시시(CC) 이상의 출혈에 도관을 통해 나오는 피가 멈추지 않는 경우로 알고 있습니다.”
급한 대로 중요하면서도 흔한 질환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김지훈이 술술 대답했다. 변상훈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딱 이 환자의 경우네. 열어야겠지? 수술 준비하자. 한 명 더 필요한데, 누굴 부르나.”
변상훈 과장이 여기저기 전화를 거는 사이 응급실도 빠르게 돌아갔다. 김지훈이 중간중간 수시로 바이탈을 체크해 환자가 안정 상태인지 확인했다.
수술에 필요한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김지훈이 응급 수술 스케줄을 작성해 마취과로 달려갔다.
마취과 과장들이 곧 바로 퍼미션(permission:동의)을 내렸다.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리거나 예측되는 경우 수술실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수술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인턴 선생, 준비되는 대로 바로 올리라고 해.”
김지훈이 바로 응급실에 환자를 올리라는 연락을 했다.
일반 외과, 정형외과, 산부인과의 수술이 한창이었다.
‘가슴을 열려면 전공의 선생님이 필요할 텐데, 다들 바쁘시네. 누가 들어오지? 이럴 때 가슴을 어떻게 여는지 확실하게 봤으면 좋겠는데.’
아쉽지만 구미에서도 인턴은 인턴이다.
가슴을 여는 수술에서 1st를 설 일은 없었다.
곧 환자가 올라왔다.
환자의 위험도가 높아 마취과 과장이 직접 마취를 주관했다. 변상훈 과장과 함께 드레싱을 하는 사이 정갑수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지훈을 보자 잔뜩 구겨졌던 정갑수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저 인간은 여길 왜 왔어?’
김지훈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변상훈 과장이 정갑수를 보며 재촉을 했다.
“인턴 선생, 빨리 씻고 들어와. 김지훈, 네가 퍼스트 서야겠다. 할 수 있지?”
마이너 수술도 아닌 가슴을 여는 수술에서 이게 무슨 소린가? 그럼 정갑수가 2nd나 3rd?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평소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를 선택한 이상 가슴을 여는 수술은 거의 볼 수 없는데, 정말 천금 같은 기회였다.
“예, 과장님.”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바짝 긴장을 했다.
함몰 유두 수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변상훈 과장이 과감하게 흉부를 절개했다.
늑골을 따라 약 15센티미터 정도 피부와 근육을 절개한 후 늑골 하나를 10센티미터가량 제거했다. 위아래에 위치한 늑골에 리트랙터(retractor:끝이 ‘ㄷ’ 자 형태를 띤 수술 도구)를 걸었다.
“인턴 선생, 당겨.”
정갑수가 리트랙터를 당겼다.
흉벽의 근육과 늑골이 벌어지며 수술 시야가 확보됐다.
분홍빛에 군데군데 검은 점이 박힌 폐가 보였다.
“젊은 사람이 담배 피운 지 좀 된 모양이다. 니들은 담배 피우지 마라. 검게 보이는 이게 다 타르다.”
변상훈 과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벤틸레이터(ventilator:인공호흡기)가 실린지를 통해 공기를 밀어 넣었다 뺄 때마다 폐가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들었다.
“김진호 선생님, 출혈 부위 확인합니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수술인 탓에 마취 유지는 김진호가 직접 관장했다. 신현수가 다소 불만 섞인 눈으로 옆에 서 있었다.
“예, 과장님. 1분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과장과 전공의 관계였지만, 학교 동기인 까닭에 오가는 말이 부드러웠다. 김진호가 벤틸레이터를 멈추고는 옆에 달린 공기주머니(ambu:앰부)를 잡았다. 충분한 산소를 투여하기 위해 빠르게 앰부 배깅(bagging)를 했다.
“확인하셔도 됩니다.”
인공호흡이 중단되며 폐가 움직이지 않자 변상훈 과장이 출혈 부위를 찾았다. 김지훈이 과장의 손을 따라 흉곽 내에 남은 피를 석션과 거즈로 제거했다.
“그렇지, 퍼스트는 이렇게 서면 돼. 지훈아, 저기서 피가 나는 거 아니냐.”
김지훈이 근처의 피를 닦으며 자세히 살폈다.
폐 일부와 흉곽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예, 출혈 부위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때 김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1분입니다.”
잠시 환자의 호흡을 유지하는 동안 수술이 중단됐다.
“김진호 선생님, 환자 바이탈은 어때요.”
“스테이블(stable:안정적) 합니다.”
바이탈을 확인한 변상훈 과장이 정갑수를 보며 물었다.
“인턴 선생, 이름이 뭐야?”
“정갑수입니다.”
“정갑수 선생, 우리 과도 아닌데 불러서 미안하지만, 확실히 끌어. 시야가 나쁘면 수술하기 힘들어진다. 그럼 환자가 어떻게 되겠어?”
안 그래도 수술 중 몇 번이나 갈비뼈 사이가 좁아졌다. 리트랙터를 제대로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갑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상훈 과장이 혀를 찼다.
곧 수술을 다시 진행해도 좋다는 마취과의 사인이 났다.
변상훈 과장이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출혈 부위를 봉합했다.
‘바이탈이 걸렸을 경우에는 과감하고 신속하게 먼저 출혈부터 잡는다.’
이후 꼼꼼하게 폐와 흉곽을 살핀 후 김지훈에게 물었다.
“김지훈 선생, 더 이상 피 나는 데 없지?”
김지훈도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예, 없는 것 같습니다.”
‘출혈 부위를 잡고 나면 다른 손상이 있는지 반드시 살핀다. 이때는 꼼꼼하고, 신중하게. 아울러 어시스트들에게도 확인을 한다.’
일반 외과에서 서드를 했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올랐다.
집도의들의 자세는 과를 막론하고 다를 바가 없었다.
수술이 크건 작건 원칙은 동일했다.
김지훈이 수술의 원칙 중 하나를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바이탈을 확인한 후 흉곽을 닫기 시작했다.
잘랐던 늑골을 다시 이어 주고 근육 층까지 봉합한 변상훈 과장이 장갑을 벗었다. 아직 피부 봉합이 남았다.
김지훈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퍼스트 서 봤어?”
“서드는 많이 해 봤고, 퍼스트는 이혁민 선생님이 함몰 유두 수술하실 때 한 번 서 봤습니다.”
“그래? 열심히 본 모양이구나. 아직은 부족하지만, 조금 더 노력하면 아주 잘하겠어. 마무리해.”
“예?”
변상훈 과장이 웃음을 보였다.
“수처를 그렇게 했는데, 자신 없어?”
“아닙니다, 선생님.”
마스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변상훈 과장이 나가자 지금까지 불만이 가득했던 정갑수가 웅얼거렸다.
“에이, 씨발. 더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