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6화 (46/1,329)

제11화 가만히 앉아서는 배우지 못한다 (3)

장성기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마지막 주에 가라. 평일 오프는 알아서 챙기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회진 돌자.”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장성기 과장이 자꾸 웃었다. 김지훈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원 환자까지 늘었다.

“흉부외과는 입원 환자가 몇 명이야?”

데일리를 꺼내 든 김지훈이 숫자를 확인했다.

“딱 20명입니다.”

두 과를 합쳐 도합 43명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원이었다.

김지훈이 불끈 쥔 두 주먹을 하늘에 대고 흔들었다.

가슴이 벅찼다.

수처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정말 간만에 손일석을 보았다.

“지훈아, 이러다 네 얼굴 까먹겠다. 그런데 뭐 좋은 일 있어? 오늘은 완전히 떴네.”

“그래? 드디어 과장님한테 안 깨졌다.”

“설마 장 과장님?”

“맞아, 인마.”

“워! 대단한데. 삼겹살을 걸레로 만든 보람이 있구나. 가만! 이런 죽일 놈이 있나.”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의 머리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아아아! 아파, 인마. 왜 이래?”

“이 자식아, 이런 식으로 사고를 쳐? 네가 그렇게 하면 다음 텀인 나는 어쩌란 말이냐. 이거 완전히 X 됐는데. 씨펄! 나도 연습해야겠다.”

“그래, 인마. 열심히 연습해. 내가 너한테만 특별히 팁을 알려 줄게.”

“뭐야?”

손일석이 주변을 휙 둘러본 후 귀를 갖다 댔다.

“자신 있게 하래.”

잔뜩 기대하며 귀를 기울였던 손일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야?”

“응.”

“정말?”

“그래, 이게 다야.”

“얼씨구, 이 자식이 이젠 형을 갖고 노네.”

“내 말 들어 봐.”

김지훈이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결국 노력하라는 말이었다.

“어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런 놈이랑 절친을 하고 있지? 지금 네 말은 결국 잠도 자지 말라는 거잖아.”

“뭐, 일석이 너는 나보다 뛰어나니까 자도 되지 않을까?”

“흠, 그건 사실이긴 한데, 뭔가 찜찜하네.”

김지훈이 콧소리를 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너는 왜 이렇게 바빠?”

“산부인과 장난 아니다.”

“왜?”

“지훈아, 구미가 한 달에 제왕 절개를 얼마나 많이 하는 줄 알아? 전국 3위란다.”

“세 번째로 많다고?”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그래, 대구에 있는 파리마 병원이 1등이고, 여기가 3등이래. 애를 많이 낳는 건지, 이리로 다 몰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여간 하루 종일 제왕 절개만 한다. 자면서도 애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라니까.”

“그래서 4년차 선생님들까지 내려오는데 인턴도 둘이었구나. 내 스케줄이 어쩌고 그러더니 너도 고생이 많네.”

손일석이 한숨을 쉬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입방정을 떤 내 잘못이지. 절친이라는 놈이 빡세게 도니까 나까지 이렇게 되네.”

“왜 내 탓을 해. 그래도 불쌍하니까 내가 술 한 잔 산다.”

“언제?”

“다음 주 화요일이나 목요일 어때?”

손가락을 세며 곰곰이 날짜를 따지던 손일석이 반색을 했다. 오프 날짜가 딱 맞았다.

술자리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손일석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김지훈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좋았어, 목요일.”

“오케이. 간만에 알코올로 목구멍 좀 씻자.”

“좋지.”

김지훈은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손일석은 술 약속이 잡혔다는 것으로 힘을 냈다. 둘 다 주말 내내 정신없이 바빴지만 신나게 일을 했다.

이경석도 김지훈만 보면 웃었다.

“너, 참 열심히 해서 좋다. 그 덕에 나도 편하고. 고맙다.”

“에이! 형이 수처를 다 제게 주신 덕분이죠.”

7년 차이였지만, 어느새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악어와 비슷하다는 소문과는 달리, 나이가 먹어서인지 이경석은 후배들을 상당히 편하게 해 주었다.

“다음 주에도 계속 이번 주처럼 할 거야?”

“목요일만 빼고요.”

“왜?”

“그날 오프 가려구요.”

“그래, 너도 좀 쉬어야지. 가만 있자, 목요일이면 나도 오프네. 잘됐다, 그날 나랑 술이나 먹자.”

헉! 이럴 수가!

인턴들에게 이경석의 말은 법과 다름이 없었다.

김지훈이 떨리는 가슴을 안고 간신히 숙소로 올라갔다.

김지훈에게 말을 전해 들은 손일석이 머리를 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술 먹으면 불이다.

이는 곧 개가 된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라는 모양이었다.

한 달에 두세 명 정도도 보지 못했던 기흉 환자가 주말에 2명이나 왔다.

변상훈 과장이 흉부 도관을 박다가 김지훈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잠을 못 자 두 눈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일반 외과 하는 놈이 흉부외과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바이탈을 다루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자식! 제대로 알긴 아는구나.”

비록 일주일이었지만 김지훈처럼 열심히 일하는 인턴은 보지 못했다. 인턴인 것을 빤히 아는 입원 환자들의 눈도 달라졌다. 그만큼 정성을 다한다는 소리였다.

잠시 스테이션에 앉아 김지훈을 보던 변상훈 과장이 응급실을 나서며 정말 의외의 말을 했다.

“김지훈 선생.”

“예, 선생님.”

“다음번에는 네가 박아라.”

“예?”

“벌써 4번이나 봤잖아. 일반 외과 할 놈이 그 정도면 할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냐?”

김지훈은 어리둥절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새앰, 정말 대단하네요.”

간호사가 쌤이 아닌 새앰이라고 부르며 감탄을 했다.

“뭐가요?”

“장 과장님께 안 깨지셨다면서요. 그리고 체스트 튜브(흉부 도관) 박는 인턴 쌤은 아마 새앰이 처음일 거예요.”

“그건 가 봐야 알죠.”

그때 다른 간호사들이 쪼르르 몰려들었다.

“새앰,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뭔데요?”

“정말 TV에 나왔었어요? 산부인과 친구가 그러던데요. 생각해 보니까 나도 본 것 같아요. 뉴스 맞죠?”

그럼 그렇지.

손일석이 간호사들에게 말 안 할 놈이 아니었다.

“에이! 서울 병원 응급실 찍을 때 잠깐 나온 거 갖고.”

“아니라고 하던데. 어린애 하나 구했다면서요. 새앰, 자세하게 얘기 좀 해 봐요.”

김지훈이 손사래를 치며 응급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김경수가 슬그머니 나타나 간호사들을 모았다.

“그건 내가 잘 알지.”

“정말요, 쌤?”

“그럼 그때 같이 있었잖아. 경석이 형, 내가 재밌는 얘기 해 드릴게요.”

마침 응급실이 한가했다.

일주일이 지나 김경수가 말을 놓을 정도로 서로 많이 친해졌다.

소곤소곤 나직한 대화가 오갔다. 김지훈에 대해 듣던 간호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머! 정말 끝내주는 새앰이네. 그런데 마지막 말도 정말이에요?”

김경수가 주변을 살폈다.

“정말 악어하고 한판 붙었다니까.”

이경석이 웃었다.

“선배한테 개겼어? 나보다 더한 놈이 있었네.”

“이경석 쌤,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눈치 없는 간호사의 말에 다른 간호사들이 팔을 꼬집었다.

“아야! 왜 그래요.”

“넌 조용히 해. 근데 이번 인턴 쌤들 중 신현수 쌤이 제일 멋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김지훈 새앰이 더 멋지네.”

“그래도 신현수 쌤이 훨씬 더 멋져요. 잘생겼잖아요. 그리고 마취과 과장님이 엑설런트하다고 엄청 칭찬하신대요. 그렇죠, 김경수 쌤.”

김경수와 이경석이 한숨을 쉬며 입맛을 다셨다.

“경수야, 들어가자. 앞으로 현수나 지훈이만 불러. 알았지?”

“이경석 쌤, 삐지셨어요.”

“그럼 안 삐져? 오프 날 술 사 주고 밥도 사 준 건 난데, 멋있는 놈은 따로 있었네. 이젠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왜 그래요, 쌤. 우리가 얼마나 쌤을 좋아하는데.”

이경석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김경수가 인상을 확 쓰며 뒤따라 들어가자 간호사들이 크게 웃었다.

***

두 번째 주 첫날이 시작됐다.

수처 환자가 있다는 말에 김지훈이 신이 나 응급실로 달려갔다. 한참 수처를 하던 김지훈이 문득 등골이 서늘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장성기 과장이 떡하니 서 있었다.

순간 긴장감이 쫙 몰려왔다.

‘평소 하던 대로 하자. 신중하고도 과감하게.’

아직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어깨로 닦으며 수처에 집중했다.

마침내 수처가 끝났다. 불과 2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상처를 11바늘이나 꿰맸다.

아직도 장성기 과장이 뒤에 서 있었다.

냉정하고도 날카로운 눈빛이 떠나질 않았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봉합한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성기 과장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설마 또 다른 문제가?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 때처럼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드디어 장성기 과장의 입이 열렸다.

“마음에 든다. 잘했어.”

짜릿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희열이 온몸을 관통했다.

완벽하다는 말도, 최고라는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수처에 관한 한 최고라는 성형외과 과장에게 인정을 받았다.

외과 의사의 기본을 충실히 익혀 가고 있다는 말이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 대가였다.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은근히 벅차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눌렀다.

‘자만하지 말자. 이제 외과 의사로서 반드시 익혀야 할 첫 번째 기본을 시작했을 뿐이다. 더 열심히 해서 필요한 기본기들을 최대한 익혀야 해.’

“감사합니다, 과장님.”

장성기 과장이 별일 아니라는 듯 아무 말 없이 진료실로 돌아갔다. 간호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새앰, 장성기 과장님이 저런 말씀하시는 거 처음 들었어요. 한턱 쏘세요.”

“그래, 인마. 맛있는 거 사.”

이경석까지 거들었다. 김지훈이 쑥스러운 웃음을 보이며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쌤, 또 아이스크림이에요?”

새앰이 아니라 쌤으로 불렀다. 뭔가 불만이 있다는 강력한 표현이었다.

김지훈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슬며시 아이스크림 봉지를 밀었지만 간호사들의 눈빛은 단호했다.

이경석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성기 형한테 칭찬까지 들었는데 쪼잔하게 이게 뭐냐, 인마. 우리 예쁜 간호사들, 목요일에 지훈이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그때 다 나와.”

“정말요, 쌤.”

“그럼. 지훈아, 괜찮지?”

어이쿠! 판이 커졌다.

하지만 달랑 손일석과 둘이 이경석을 대적하기보다는 간호사들까지 함께 있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할 것이다.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 형님. 그 대신 반반입니다.”

“반반? 에라이! 짠돌이. 알았어. 간호사들 술은 내가 살 테니까 넌 내 술 사. 오케이?”

“좋습니다, 형님.”

어째 이경석에 대한 소문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정말 좋은 선배였다.

물론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정말이었다.

한 주의 시작이 좋아서인지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의욕이 너무 넘쳤는지 화요일 오프까지 반납했다.

근 일주일 만에 고경아와 통화를 했다.

살짝 삐진 목소리였지만, 김지훈이 성형외과 일을 얘기하자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경아 씨, 다음 주 주말이 오프예요. 그때 시간 되죠?”

(별일은 없어요.)

“그럼 토요일에 올라갈게요. 그동안 전화 제대로 하지 못한 거 한꺼번에 갚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해요.”

(어떻게요?)

“그건 비밀입니다. 미리 알면 재미없잖아요.”

(알았어요, 기대할게요.)

“그럼 그때 봐요.”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끙’ 소리를 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비밀이라고 말한 것이다.

평소 매사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생각하며 일했다. 그런데 고경아의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을 그냥 내뱉고 있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다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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