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5화 (45/1,329)

제11화 가만히 앉아서는 배우지 못한다 (2)

유심히 보고 기억해 둔 것이 아주 다행이었다.

varidase(소염제)

cefa(antibiotics:세파 계열 항생제의 약자)

aaap(acetaminophen:해열 진통제)

3T(tablet:알) #3(pided three) P.O.(per oral) for 3day

열거한 3개의 약을 한 번에 한 알씩 하루에 3번 입으로 3일간 먹으라는 뜻이었다.

온통 영어 약자였지만, 실제로 한글보다 쓰기가 빠르고 쉬워 오더는 물론 차팅까지 거의 영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더를 낸 김지훈이 보조를 섰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깨질까요?”

“글쎄요. 우리가 아나요. 솔직히 안 깨지는 인턴 쌤을 본 적은 없어요.”

솔직해도 너무 솔직했다. 한숨을 쉰 김지훈이 당직실로 들어가 세수를 했다.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후! 수처 한 번에 긴장하면 나중에 수술은 어떻게 하려고 이러냐. 나도 참 문제다!’

깨지는 것보다 수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다.

김지훈이 후줄근한 모습으로 숙소에 들어섰다.

“지훈아, 너 마라톤이라도 뛰고 왔냐?”

“수처하고 왔다.”

손일석이 혀를 찼다.

“넌 왜 사서 고생을 하냐. 어차피 깨질 텐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부터 난리야.”

“그래도 지금 아니면 해 볼 과가 없잖아. 한 번이라도 더 하면 그만큼 잘할 수 있고, 일반 외과의 기본이잖아.”

“닥치면 다 하는 거지. 수처가 뭐 별거 있어?”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어후! 넌 이럴 때가 제일 부러워. 패기가 아주 쩔어요. 수처를 한 번도 못 해 본 놈이 자신감은. 너도 성형외과 돌잖아.”

“니 다음에 바로 돌긴 하지.”

“여유 떨지 마라. 너도 곧 내 꼴 된다.”

손일석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양손을 부처의 손 모양으로 만들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수양이 깊으면 모진 세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법. 아미타불.”

“지랄을 해요.”

김지훈이 벌러덩 침대에 누우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스(peace).”

“너도 지랄을 하세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손일석의 목소리에 김지훈이 잠에서 깼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좀 맛있으려나?”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들은 식당에 도착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 어제보다 먹을 만했다.

“어제보다는 맛있네. 주방 아줌마가 다른 사람인가?”

“이게 맛있다니, 네가 벌써 힘든 모양이구나. 아니면 벌써 적응한 거냐?”

꾸역꾸역 밥을 먹는 김지훈과 달리 손일석은 간신히 식판을 비웠다. 찬물로 입가심을 하는 사이 크게 김지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응급실에서 식당에까지 전화를 한 것이다.

손일석이 툭툭 치며 속삭였다.

“또 왔나 봐. 너, 내일 2배로 깨지겠다.”

“죽을래?”

“푸흐흐흐! 수고해. 나도 슬슬 근무 준비를 해야겠다.”

손일석이 혀를 날름거리며 사라졌다.

‘저 자식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혀를 내밀어.’

밥이 채 소화도 되기 전에 얼굴을 꿰매야 하는 환자가 2명이나 더 왔다. 여전히 긴장되고 힘들었다. 입원할 만한 환자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김지훈이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숙소로 향했다.

어느새 밤 12시가 넘었다.

다음 날 저녁 6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장성기 과장이 김지훈을 외래로 불렀다. 어제 수처한 환자 3명의 차트가 진료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깨졌다.

정말 시원하게 깨졌다.

얼마나 시원한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깨졌을까?

분명 하라는 대로 최선을 다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도 모른 채 깨진 것이 억울했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혼냈을 리는 없었다. 장성기 과장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을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생각인지 김지훈이 저녁 식사를 하자마자 병원 밖으로 나갔다. 주변을 샅샅이 뒤진 끝에 정육점을 찾았다.

삼겹살 한 근을 1센티미터 간격으로 잘라 달라고 했다.

응급실에 부탁해 니들 홀더와 화이트 실크(봉합용 실의 한 종류) 한 다발과 바늘 몇 개를 얻었다. 대신 간호사의 손에 아이스크림 10개를 안겨 줘야 했다.

따르륵! 따르륵!

손바닥으로 니들 홀더를 돌리며 소리를 낸 김지훈이 책상에 앉아 수처 연습을 시작했다. 임상 실습을 돌던 때가 생각났다. 인턴이 된 지금도 그 당시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꿰매고 또 꿰맸다.

30센티미터 길이의 화이트 실크 10개를 사용해 삼겹살을 다시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족히 100바늘은 꿰맸다. 가위로 실매듭을 잘라 내 삼겹살을 펼친 후 다시 연습을 했다.

숙소를 드나들던 동기들이 희한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허리가 뻐근해질 즈음 응급실에서 콜이 왔다.

(쌤, 수처할 환자 있어요.)

최대한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수처를 했다.

다음 날 오후, 또 깨졌다.

역시 시원하게 깨졌다.

오후 드레싱을 하는 내내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데일리를 만들고, 저녁을 먹자마자 숙소로 달려갔다.

냉장고에 보관했던 삼겹살이 흐물흐물했다.

‘씨펄! 한 근 더 사?’

잠시 갈등하던 김지훈이 니들 홀더를 들었다.

경험상 오늘 한 번은 더 연습할 수 있었다.

살이 물러 꿰매기가 쉽지 않았다.

바늘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간격과 길이가 들쭉날쭉했다. 그 탓인지 바늘이 빠르게 무뎌졌다.

그에 김지훈은 매점으로 달려가 주스 한 박스를 산 후 응급실로 달려갔다.

“간호사, 바늘 몇 개만 더 얻읍시다.”

“쌤, 이거 병원 물품이에요.”

“이거 먹고 우리 힘차게 일합시다.”

주스를 내밀자 간호사가 못 이기는 척 바늘을 가져왔다. 마침 응급실에 온 환자를 몇 명 처리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악어와 최성훈을 만났다. 악어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최성훈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헉! 안녕하세요.”

김지훈이 인사를 하며 지나치자 악어가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은 먼지 나게. 살살 다녀, 이 새끼야. 일도 X나게 못하는 새끼가 바쁜 척은. 최성훈.”

“예.”

“저 새끼 성형외과하고 흉부외과 돌 거야. 우리 과 환자하고 겹치면 확실하게 처리해. 새벽이라고 봐주면 네가 죽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도 일 똑바로 해. 100일 당직 끝났다고 어제처럼 자빠져 자지 말고. 노티 받으면 바로바로 내려가. 이 새끼들이 인턴까지 단체로 빠져 가지고, 언제 한번 날 잡는다. 알았어?”

김지훈이 복도를 빠져나오며 고개를 흔들었다.

최성훈이 어제 새벽에 30분 정도 늦었다고 악어에게 신나게 깨졌다는 소리는 들었다. 한 번 찍으면 정말 악어처럼 물고 늘어지는 모양이었다.

“쪼잔한 새끼.”

그때 조인트 까이는 소리와 동시에 ‘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성훈이 다리를 잡은 채 끙끙대고 있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조인트를 맞았을 때의 고통은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른다.

도대체 몇 바늘을 꿰맸는지 셀 수도 없었다.

시간만 나면 삼겹살과 씨름을 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으며 몇 번 훼방을 놓았지만, 김지훈에게 한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왜 전임 인턴들이 장성기 과장과 수처에 빨간 줄도 모자라 별표까지 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정도에 포기하면 내가 성을 간다.’

오기가 생겼다. 수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뻔뻔하게 일반 외과를 지원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더욱 열심히 드레싱을 하고 회진을 돌았다. 응급실 환자도 최선을 다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그렇게 나흘째 되던 날, 오래간만에 변상훈 과장에게 노티 할 환자가 왔다.

외상으로 인해 발생한 기흉(pnumothorax) 환자였다.

환자가 헉헉거리며 힘들어 할 때쯤 변상훈 과장이 응급실로 들어섰다. 흉부 도관을 박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던 김지훈이 재빨리 환자에게 안내했다.

청진을 하고 X-ray를 본 변상훈 과장이 거침없이 우측 흉부 바깥쪽에 칼집을 내고 흉부 도관을 박았다. 환자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곧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도관 고정해.”

“예?”

“맨날 수처 때문에 깨지는데, 이것도 못해?”

“아닙니다.”

김지훈이 가장 굵은 실로 피부를 떴다.

“너, 일반 외과 지원했다고 했지? 손으로 타이(tie:매듭)해.”

봉합 후 매듭은 니들 홀더나 손으로 직접 만든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손으로 타이를 할 때 실에 가해지는 힘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위험한 부위를 다루는 일반 외과나 흉부외과는 흔히 이 방법을 사용했다.

김지훈이 먼저 피부에 걸린 실에 여유를 남기고 매듭을 만들었다. 흉강 내로 들어간 굵은 도관을 몇 번 실로 돌려 단단히 고정한 후 다시 타이를 했다.

변상훈 과장이 도관이 잘 고정됐는지 확인했다.

“타이는 곧잘 하네. PK 때 연습 좀 한 모양이지? 그런데 김지훈, 넌 아직도 왜 수처에 그렇게 자신이 없어. 맨날 깨져서 그래?”

“솔직히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지훈, 국소 마취 때 통증은 사라져도 감각은 일부 남는 건 알지?”

“예, 마취를 해도 환자들이 불편해하는 건 봤습니다.”

“그래, 그거야. 가뜩이나 환자들은 겁먹고 있는데 자극을 느끼면 가만있겠어? 수처는 아무리 잘해도 그냥 수처야. 자신 있게 해. 주저하고 머뭇거리면 환자가 움직일 텐데, 스킨 에지(skin edge:피부 절단면)가 맞을 수가 있겠어? 장 과장이 너무 빡빡한 건 맞지만, 얼굴에 관해서는 절대 틀린 소리가 아니다. 게다가 성형외과가 흉에 보통 민감해?”

김지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신중함이 지나쳐 머뭇거리고, 그로 인해 결국 스킨 에지를 맞추지 못한 것이다.

경험이 없는 김지훈의 눈에는 안 보여도 장성기에게는 확연하게 보이는 문제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지금처럼만 해. 그렇게 혼나고도 더 열심히 하는 것을 봐서 알려 준 거야.”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꽉 깨물자 변상훈 과장이 웃었다.

매일 오던 안면부 열상 환자가 이틀이나 오지 않았다.

장성기 과장은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삼겹살과 씨름하는 것에 슬슬 지쳐 갈 무렵, 드디어 환자가 왔다.

환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김지훈이 니들 홀더를 잡았다.

삼겹살에 대고 근 천 바늘은 꿰맸다.

손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변상훈 과장의 조언까지 들었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덜 깨지고 싶었다.

신중하면서도 바늘을 찌를 때는 과감하게.

단 10바늘이었지만 10분이 채 안 걸렸다.

다음 날, 오후 5시쯤 장성기 과장의 호출을 받았다.

외래 문을 앞에 두고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오늘도 깨질까?’

불안한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서자 책상 위의 환자 차트가 보였다. 장성기 과장이 물었다.

“이거 네가 수처한 거 맞아?”

“예, 제가 했습니다.”

힐끗 김지훈을 본 장성기 과장이 엉뚱한 말을 했다.

“병실 환자들은 별일 없고?”

“드레싱할 때까지 특별한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래? 그리고 너 오프는 안 가냐?”

그러고 보니 화, 목 오프도 가지 않았다. 수처에 목을 맨 탓이었다.

“다음 주에 가겠습니다.”

“주말 오프는?”

“선생님들 일정에 맞춰 가겠습니다.”

적당하게 기분 좋을 법한 멘트를 날리는 것을 보니 처신도 제법 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