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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43화 (43/1,329)

제10화 새로운 시작 (2)

스테이션에 앉아 꼼꼼하게 환자에 대한 내용을 추가적으로 기록한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도 도시락을 가져가야 하나요?”

“도시락이요? 갑자기 도시락은 왜요?”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단한 드레싱 세트를 의미하는 도시락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의사들이 흔히 쓰는 일종의 은어였지만, 모른다는 사실은 드레싱을 정식으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럼 드레싱할 때 카를 통째로 끌고 가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역시 구미 병원은 인턴에게 관대한 구석이 상당히 많았다.

김지훈이 드레싱 카를 끌고 나오며 소리쳤다.

“드레싱 갑시다!”

간호사들이 일제히 김지훈을 보았다.

“쌤, 지금 드레싱하시려구요?”

“네.”

“오늘 드레싱은 오전에 이미 다 했는데, 꼭 또 하셔야 돼요?”

“환자 파악합시다.”

의사가 오더를 내리고, 간호사는 이를 수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게다가 성형외과나 흉부외과는 일부분이긴 해도 인턴이 전공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김지훈의 단호한 목소리에 간호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드레싱 카를 잡았다.

드르륵! 드르륵!

드레싱 카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단순한 열상 환자들의 드레싱은 간단했다. 하지만 흉부 도관을 박았거나 수술을 한 환자들의 드레싱은 처음이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신중하고도 조심스럽게 드레싱을 했다. 다행히 큰 상처가 아니었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문제는 화상 환자였다.

대부분의 화상은 일반 외과에서 보지만, 얼굴과 손의 화상은 성형외과에서 보았다.

김지훈이 난처한 눈으로 환자를 보았다.

하필이면 안면부 화상 환자였다.

거즈로 도배한 얼굴에 그물망을 씌워 고정하고 있었다. 눈, 코, 입만 보여 마치 하얀색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여자 환자였다.

흉이라도 남는다면 환자에겐 정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더더욱 신중해야 했다.

잘 모르면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환자를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의사의 자존심이었다.

김지훈이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환자, 치료하는 거 많이 봤죠?”

“왜요?”

말투가 삐딱했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해야 하니 더욱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이 환자, 드레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잖아요. 그냥 막 열면 안 될 것 같은데, 도와줄래요?”

간호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환자에게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의사들은 거의 간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더구나 조금 더 신중한 손길이 필요할 뿐, 화상 치료도 결국 드레싱일 뿐이었다.

물론 간호사의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의외의 일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간호사가 소독 장갑을 펼치며 말했다.

“쌤, 그냥 그대로 하시면 돼요. 이마 쪽에 화상이 심하니까 거기만 조심하세요.”

화상은 특히 감염에 주의해야 하지만, 소독 장갑을 껴야 할 정도라면 상당히 심하다는 말이었다.

그물망을 벗기자 거즈들이 툭툭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화상 부위에 붙은 거즈를 제거하며 상처를 살폈다. 간호사의 말대로 이마 부분의 화상이 상당히 심했다.

김지훈이 슬쩍 간호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정 간호사가 아니었으면 드레싱하다가 도리어 이마에 상처를 낼 뻔했네요. 고마워요.”

얼굴 전체를 뒤덮은 진물을 닦아 내고 실버딘(silverdine:화상 시 쓰는 소독 연고)을 발랐다. 그리고 화상 부위가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꼼꼼히 거즈를 둘렀다.

김지훈이 양손을 모두 써 거즈를 잡자 간호사가 그물망을 씌웠다. 눈, 코, 입을 가린 그물망을 가위로 잘라 내고, 환자가 최대한 편하도록 주변을 정리했다.

처음 한 것치고는 깨끗하게 됐다.

이리저리 드레싱한 부위를 살피던 김지훈이 환자에게 인사를 하며 병실을 나왔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습니다.”

“고생하세요.”

환자가 무덤덤하게 인사를 했다.

“환자가 꽤 속상한 모양이네요.”

“여자잖아요.”

“신경 좀 써야겠네. 이 환자의 드레싱은 하루 두 번이죠. 내일 아침에 몇 시쯤 하면 되나요?”

“쌤, 안 오셔도 돼요.”

김지훈과 간호사가 동시에 동그랗게 눈을 뜨며 서로를 보았다.

“왜요, 드레싱 안 해요?”

“이번 주는 서울에서 인턴 선생님들이 내려오는 주니까 아마 과장님이 점심때쯤 들러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지금까지 화상 환자도 일요일에는 한 번만 해 왔어요.”

일반 외과를 돌면서 환자의 드레싱은 하루 두 번이 원칙이라고 들었다. 단순히 소독약만 발라 주는 것은 드레싱이 아니었다. 드레싱의 목적은 상처의 감염을 확인하고, 아울러 환자의 상태까지 간접적으로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김지훈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부터는 하루에 두 번 합니다.”

“두 번이요? 전부 다요?”

“당연하죠. 그게 환자를 치료하는 원칙이에요. 특히 화상 입은 여자 환자는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어요?”

간호사가 할 말이 없는지 말을 돌렸다.

“원래 서울에서 쌤들 내려오는 주에는 응급실 빼고 모든 과가 주말 오프 아니에요? 쌤은 안 쉬어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일단 환자에 대한 파악은 해야죠. 내일 아침 9시쯤에 올 테니까 다른 간호사들에게 잘 전해 줘요. 그리고 과장님 오시면 바로 연락 주고요.”

“왜요, 회진도 따라 도시게요?”

간호사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내려왔다고 인사도 해야 되고, 공식적인 오프도 아닌데 회진은 당연히 따라 돌아야죠.”

“성형외과나 흉부외과 하실 거예요?”

“아니요, 일반 외과 지원했어요.”

넌 뭐냐?

간호사가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드르륵! 드르륵!

모든 드레싱을 마치고 스테이션에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유석재 선생님, 구미셨어요?”

“그래. 1년 내내 너랑 붙어 다니는데, 몰랐어? 다음은 천안이지?”

“예. 선생님도요?”

“응.”

“야! 잘됐네요. 100일 당직은 끝나신 거죠?”

“그럼. 이젠 숨 좀 쉬고 살자.”

분위기는 정형외과보다 훨씬 부드럽게 보였지만, 유석재도 꽤 고생한 모양이었다. 하긴 과장 파트를 돌면 일반 외과 100일 당직이 더 힘들 것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리긴 했다.

간호사가 유석재를 보며 투덜거렸다.

“유석재 새앰, 인턴 선생님 좀 말려 줘요.”

새앰? 은근히 부드럽게 들렸다.

쌤과 새앰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쨌든 유석재와 간호사들이 상당히 친한 것은 틀림없었다.

“왜요, 김지훈 선생이 뭐 잘못했어?”

“오자마자 드레싱을 하잖아요. 안 해도 되는데. 내일도 두 번 한대요.”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지훈이 말이 맞는데. 그동안 환자는 나 몰라라 하고 편하게 돈 거지. 지훈아, 꼭 두 번 해라. 내일은 몇 시에 할 거야? 난 9시쯤 하려고 하는데.”

시간이 겹쳤다.

드레싱 카가 2개이긴 하지만, 간호사의 인원이 문제였다.

평일에는 어쩔 수 없지만, 주말에는 가급적 같은 시간대를 피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럼 제가 8시에 할게요.”

“오케이. 드레싱 열심히 해라. 미리 해 두면 내년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인펙션(infection:감염) 됐는지 확실하게 확인하고. 알았지?”

“예. 잘 모르겠으면 선생님께 물어봐도 되죠?”

“그럼 언제든 물어봐. 그리고 김지훈 선생이 인턴이라고 제대로 안 하면 다들 각오해요.”

유석재가 과장된 몸짓으로 간호사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혹 떼려다 혹 붙였다.

작년에 구미를 돌 때, 사람 좋기로 유명했지만, 일에 관해서는 욕심이 많았던 유석재다. 간호사가 엉뚱한 사람에게 투정을 부린 것이다.

마지막 차트를 덮는 유석재를 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인턴과 1년차와의 실력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대충 세어도 50명이 넘는 환자를 드레싱하는 사이에 모두 파악한 것이다. 유석재의 성격상 대충 보았을 리 없었다.

이것이 바로 1년차의 위엄이요, 내공이었다.

“드레싱 갑시다.”

드르륵! 드르륵!

이번에는 유석재가 드레싱 카를 끌고 나갔다.

이제 막 들어온 정 간호사가 울상을 지었다.

신환만 없으면 한가해야 할 토요일 밤이 평일과 똑같이 굴러가고 있었다.

다음 날 점심 무렵,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병원으로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상훈아, 우리가 전공의도 아니고 화창한 주말에 이게 뭐냐? 환자를 안 볼 수도 없고.”

“성형외과나 우리 과나 전공의 티오가 너무 적어. 3명 뽑아서는 답이 없다. 서울에서 2명 돈다고 1명 보내 줄 리도 없고, 천안도 1명으로는 부족하잖아. 넌 돈도 잘 벌 텐데, 개업이나 하지 그러냐?”

“개업할 거면 구미에 오지도 않았다. 앞으로 몇 년만 열심히 근무하면 천안이나 서울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 참고 근무해야지.”

구미 병원은 규모는 작아도 대학 병원 브렌치(brench)로 종합 병원이었다. 특수한 몇몇 과를 제외하고는 모든 과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인접한 대구에 거대 병원들이 여러 개 있어 입지가 애매모호했다. 더구나 교수 직을 희망하는 의사들 대부분이 규모가 큰 서울이나 천안을 원했다.

그 탓에 스태프들을 구하기 어려웠다. 재단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교수 직을 원하는 의사들을 삼사 년간 구미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인 타협책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태프들이 대충 근무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태프들에게 의사로서 갖는 사명감이 없었다면 구미 병원은 예전에 종합 병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을 것이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과장들이 병동에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재빨리 차트를 모았다. 그중 한 명이 전화기를 들어 김지훈에게 연락을 했다.

몇몇 신경 써야 할 환자들의 차트를 확인한 장성기 과장이 드레싱 카로 다가갔다.

“과장님, 오전에 드레싱 다 했는데요.”

“누가?”

“새로 온 인턴 선생님이 8시에 와서 다 하고 가셨어요.”

장성기 과장과 변상훈 과장이 눈을 마주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일단 회진부터 돕시다.”

장성기 과장이 드레싱도 확인할 겸 병실로 향했다.

절반 정도 돌았을 무렵, 김지훈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막 화상 환자의 병실에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김지훈입니다.”

“김지훈? 새로 왔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은 장성기 과장이 드레싱 카를 가져오라고 했다. 화상 처치를 하며 힐끗 김지훈을 보고는 남은 회진을 돌았다.

김지훈이 장성기 과장을 환자에게 안내하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차트만 보는 것과 과장의 설명을 직접 듣는 것은 확연히 달랐다. 환자의 어떤 상태에 집중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스테이션에서 기다리고 있던 변상훈 과장의 회진이 이어졌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는 같아도 성형외과와 흉부외과의 관점이 달랐다. 특히 기흉 환자를 보는 변상훈 과장의 모습은 신중하면서도 세심했다.

‘두 분 다 세심하게 환자를 보신다. 성형외과는 확실히 외면에 관심을 두고, 흉부외과는 바이탈을 많이 신경 쓰는구나.’

김지훈이 나름 두 과의 특징을 파악했다.

그때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안면부 열상을 입은 성형외과 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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