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새로운 시작 (1)
은연중에 심각한 얘기를 피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천안을 지났다.
슬슬 속도가 나기 시작해 추풍령을 지났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윤서연을 보는 김지훈의 눈빛이 조금은 변했다.
‘고생 한 번 안 한 것 같은데, 생각이 깊네.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한다더니.’
BMW를 몰아도 세상모르는 부잣집 딸은 아니었다.
마냥 귀여움만 받고 자란 것 같지도 않았다.
세련된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순수한 면이 있었다.
어느새 구미에 도착했다.
“남쪽이라 그런지 따뜻한 것 같네.”
“확실히 그렇지?”
산업 공단으로 유명해 많이 듣기는 했지만, 난생처음 와 본 곳이다. 터미널 주변의 거리도 생각보다 번화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중소 도시였다.
톨게이트에서 이삼십 분쯤 가자 병원이 보였다.
5층 규모의 본관과 3층으로 지어진 별관 두 동만 있었기에 대학 병원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았다.
김지훈이 뭔가 아쉬운 기색이 완연한 윤서연을 뒤로하고 숙소로 향했다.
별관 3층이 인턴과 전공의들의 숙소였다. 병원 규모상 구미에 파견되는 인원이 적어 한 층에 모두 수용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인턴은 역시 인턴이었다.
10개 남짓의 2층 침대가 놓인 큰 방 하나가 인턴 숙소였다. 다른 방은 모두 전공의들이 사용했다.
짐을 풀고 대충 정리하는 사이 손일석이 들어왔다.
“어? 너, 왜 벌써 왔어?”
“부모님이 바람맞힐 줄 누가 알았겠냐. 기다리다 그냥 왔어. 인턴 숙소는 어디나 마찬가지네. 더러워서라도 빨리 전공의 돼야겠다. 안 그래?”
손일석이 불평을 터뜨리며 짐을 풀었다.
곧 동기 몇 명이 도착했다.
그중 유난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인턴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유심히 살펴보던 손일석이 김지훈의 옆구리를 툭툭 찔렀다.
“지훈아, 저 사람이 이경석 선생님인가 봐.”
“이경석? 다른 학교 출신이야?”
“아니, 우리 학교 7년 선배야. 성격이 불이래. 인턴 하면서 간호사하고 2번, 전공의하고 1번 싸워서 3번이나 병원을 나갔단다. 그러니까 이번이 네 번째지.”
“전공의하고? 그럼 선배하고 싸웠단 말이야?”
“당연히 전공의가 후배였지. 설마 선배한테 주먹질을 했겠냐? 그랬으면 이번에 못 들어왔다. 하여간 요주의 인물이야.”
심상치 않은 선배였다. 악어에 정갑수도 모자라 이경석까지, 구미에서도 평탄치 않을 것 같았다. 악어 하나로도 벅찬데, 그런 선배가 한 명 더 생기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석아, 네 말 확실한 거지?”
손일석이 가슴을 탁탁 쳤다.
“내가 누구냐. 우리 학교 정보통이야. 천안 애들이 말한 선배가 틀림없어. 일단 인사부터 하자. 찍히면 아주 곤란하지 않겠어?”
김지훈이 목소리를 낮췄다.
“설마 악어 같은 선배는 아니겠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평상시에는 좋은데 술이 문제래. 술이 좀 과하게 들어갔을 때 잘못 건드리면 폭발한다고 그러더라구. 빨리 가자. 이럴 땐 미리 안면을 트는 게 상책이다.”
손일석이 입 모양으로 ‘빵’ 소리를 내며 손가락 10개를 활짝 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이경석으로 의심되는 인턴에게 다가갔다. 자그마한 키에 비쩍 말랐지만, 눈빛이 매서웠다.
“안녕하십니까, 김지훈입니다. 혹시 선생님이 이경석 선생님이십니까?”
“손일석입니다.”
“응, 내가 이경석이야. 니들 몇 회냐?”
“올해 졸업했습니다.”
“자식들, 잘 지내 보자. 같은 인턴인데, 그냥 형이라고 불러.”
소문이나 눈빛과는 달리 이경석이 편하게 말을 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 형님.”
“밥 먹으러 가자. 이러다 식당 문 닫겠다.”
다른 동기들과도 인사를 나눈 이경석이 식당으로 향했다.
동기들 모두 졸래졸래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소문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구미에 오느라 배가 많이 고팠을 동기들이 하나둘 수저를 내려놓았다. 먹성 좋은 김지훈도 결국 수저를 놓고 말았다.
“맛이 정말 오묘해. 일석아, 이게 경상도 음식이냐, 아니면 식당 아줌마 손맛 때문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맛대가리 정말 없네.”
“희한해. 똑같은 국인데,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짜면서도 싱거워. 단 것 같기도 하고, 신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쓴맛도 나는 것 같지 않냐?”
“그러게 말이다. 이걸 어떻게 3개월이나 먹고 살지? 맨날 나가서 먹을 수도 없고.”
식당 안을 둘러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석아, 이게 경상도 음식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잘 봐, 인마. 우리 빼고 다 잘 먹잖아. 식당 아줌마 손맛이면 저렇게 잘 먹겠냐?”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은 손일석이 두리번거렸다.
정말 다들 맛있게 먹고 있었다.
동시에 한숨이 터졌다.
즐거움이라고는 거의 없는 인턴 생활이다.
거기다 음식까지 안 맞으면 정말 낙이 없을 것이다.
줄줄이 밥과 반찬이 남은 식판을 들고 가자 식당 아줌마가 잔소리를 했다. 다들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구미에서 도는 과들은 김지훈에게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일반 외과 의사로서 필요한 기본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성형외과와 흉부외과에서는 수처와 바이탈을.
마취과에서는 인투베이션과 바이탈 유지법을.
응급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산부인과 역시 수술을 접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었다.
원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려면 해야 할 일과 주의해야 할 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했다.
김지훈이 인수인계장을 폈다.
성형외과(PS) 장성기 과장님.
흉부외과(CS) 변상훈 과장님.
두 분 모두 8년 선배로 좋다, 나쁘다 말하기 힘듦.
전체 환자는 30명 전후이며, 대부분 외상 환자들임.
환자 드레싱은 하루 한 번씩 하고 중요 환자만 두 번.
응급실 커버는 밤 12시까지 하고, 이후는 응급실에 맡김.
입원을 요하는 환자는 직접 노티를 하고, 아닌 환자는 오더 내고 외래 팔로우 업(follow up) 시키면 됨.
성형외과 수처는 해도 깨지고, 안 해도 깨짐. 아주 심하게.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안 깨진 인턴이 없음. ★★★★★
(서울에서 내려오는 텀은 X 됐다고 보면 됨. 수처해 본 적 없지? 각오 단단히 할 것. 깨졌다고 울지 마라.)
주중 오프는 화, 목 이틀이고, 주말 오프는 미리 말씀드리고 감. 3주 중 딱 한 번임.
전체적으로 일은 약간 많은 정도이지만, 스트레스는 막대함.
수처 때문에 깨지기 시작하면 정신 못 차림. ★★★★★
수처라는 단어에 빨간색 볼펜으로 별표에 동그라미까지 그려 두 번이나 강조해 놓았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깨진다는 소리였다. 울지 말라고, 농담처럼 쓴 글로 인해 얼마나 심하게 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 이유가 있었다.
과장들의 개인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구미 병원은 대학 병원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았다. 그 탓에 전공의가 파견되지 않는 과가 여럿 있었다.
성형외과나 흉부외과도 그중 하나였다.
3주마다 새로운 인턴들로 바뀌니, 모두 서투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과장들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다.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드레싱에 응급실 콜 받고 오더까지 낼 수 있으면 환자 보는 맛이 나겠는걸. 그런데 수처를 하면 왜 다 깨진다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잘해야 한다는 소리지?’
전공의가 없어 내심 기대를 했고, 역시 인턴에게 상당히 많은 권한을 주고 있었다. 은근히 긴장되면서도 흥분되는 일이었지만, 김지훈 역시 수처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미리 겁먹을 이유는 없었다.
사실 인턴이 안 깨진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었다.
‘수처는 외과 의사에게 기본이라고 하셨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액티브(active)하게 돌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 삼겹살에 대고 수백 바늘을 수처했던 보람을 찾아야지.”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고 숙소를 나서자 손일석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어디 가?”
“병동에.”
“왜?”
“환자 파악 좀 하려고.”
손일석이 혀를 찼다.
“배 속에 일벌레가 들었냐. 난 쉬련다. 이따가 근처 한 바퀴 돌게 빨리 와. 이 동네 물 좀 확인하자.”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의 언니와 물 타령은 언제까지 할까?
본관 3층이 일반 외과, 성형외과, 흉부외과 병동이었다.
김지훈이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성형외과하고 흉부외과 돕니다.”
“그러세요.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쌤.”
“쌤?”
“호호호! 선생님이요.”
간호사들의 말에서 경상도 억양이 물씬 묻어났다.
‘여자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예쁘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웃으며 차트를 모았다.
두 과의 환자가 총 30명 정도였다.
김지훈이 한참 동안 환자의 차트를 보며 데일리를 확인했다.
차트에 쓰인 환자에 대한 기록과 데일리 간의 차이가 꽤 있었다.
수정할 내용이 의외로 많았다.
‘안 되겠어. 환자들을 직접 봐야겠다.’
김지훈이 병동을 돌았다.
단순히 데일리를 정확하게 작성할 생각이었지만, 나름 회진을 도는 꼴이었다. 은근한 긴장에 김지훈이 애써 웃으며 환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새로 온 의사 선생님이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입원하신 지 꽤 오래되셨네요. 몸은 좀 어떠세요.”
환자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토요일 저녁에 회진을 도는 경우는 없었다.
온다고 해도 과장들이 직접 오지, 젊은 의사들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시네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다음 환자를 보았다.
22살의 젊은 남자 환자였다.
우측 가슴에 체스트 튜브(chest tube:흉부 도관)를 하나 꽂고 있었다. 기흉(pnemothorax) 환자였다.
튜브에 연결된 물통에서 공기가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었다. 폐 밖으로 새어 나온 공기가 잘 배출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퇴원이 멀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역시나 환자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아프세요?”
“예.”
“그래도 빨리 퇴원하려면 걷는 운동은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여자들과는 달리 경상도 남자들의 말투는 나이를 떠나 모두 다 딱딱했다. 말과 표정이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조금은 주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김지훈이 슬쩍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쏠려 있었다.
그때 기흉 환자가 무언가를 물으려고 했다.
김지훈이 내심 당황하며 재빨리 다른 환자에게 다가갔다.
어떤 질환을 막론하고, 지금은 학생 때 배운 지식이 다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섣불리 말했다가 큰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주치의인 과장이 환자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배우는 것이 먼저였다.
보다 조심스럽게 환자들과 인사를 나눈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입맛을 다셨다. 인턴이 30명이나 되는 환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다.
더구나 액티브하게 일을 하고 싶어도 환자들의 질병과 상태를 모르면 의욕만 앞세우는 꼴이었다. 도리어 잘못된 말이나 판단으로 환자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도 있었다.
‘뭐 하나 얻기가 정말 쉽지 않네. 또 공부를 해야 하나.’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일반 외과를 지원한 이상 성형외과까지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오래 끌 고민이 아니었다.
최고의 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더욱이 여러 질환이 동시에 겹치는 환자도 많았다.
일반 외과 환자만을 공부해서는 환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인턴이라는 수련 과정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의외로 쉽게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