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1화 (41/1,329)

제9화 아듀! 서울 (3)

김지훈은 숙소로 올라오자마자 고경아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통화가 길게 이어졌다. 방송에 나온 얘기를 하며 한동안 웃었다.

“내가 그렇게 긴장했어요?”

(그럼요. 눈에 딱 보이던 걸요 자연스럽게 찍으셨으면 훨씬 멋지게 나왔을 텐데.)

“솔직히 카메라 앞에 서니까 무지 떨리긴 했어요. 그래서 안 멋있다는 거예요?”

(아니요, 멋있었어요. 지훈 씨, 이제 출발할 시간 되지 않았어요? 이러다 늦으시겠어요.)

어느새 한 시간이 거의 다 지났다.

“그럼 잘 지내요. 연락할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고경아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가득했다.

왠지 멀리 떠난다는 느낌에 더욱 아쉽기만 했다.

그 시간, 금경태 과장이 대학 총장인 신동석과 마주하고 있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양복과 올백으로 넘긴 반백의 머리가 잘 어울렸다.

몸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는지 60대 초반이었지만 10년은 젊어 보였다. 몸에 밴 것 같은 신현수의 단정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만했다.

“부르셨습니까, 이사장님?”

재단 이사장이 연로해 신동석이 재단의 이사로서 운영을 총괄했다. 그 탓에 대부분 이사장이라고 불렀다. 신동석도 총장보다는 이사장으로 불리는 것을 더욱 마음에 들어 했다.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학교 일과 재단 일을 같이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은 신동석 이사장이 여유로운 눈으로 금경태를 보았다.

“일반 외과를 아주 잘 이끌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처럼 병원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병원 문제는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서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자식 놈 문제 때문에 만자고 했어요.”

“신현수 선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평판이 어떤가요? 내 자식이라 생각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금경태 과장의 눈이 반짝였다.

신현수는 자신과 신동석 이사장을 이어 줄 확실한 끈이었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의사로서의 능력이나 품행은 물론 인성까지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우리 과를 지원했기 때문에 다른 과 스태프들에게도 물어보았는데, 모두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자제분을 두셨습니다, 이사장님.”

신동석 이사장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말이에요, 현수 그놈이 어릴 때부터 욕심이 아주 많았어요. 뭐든 아주 열심히 했고, 의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에요. 나도 물론 최고의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금경태 과장에겐 자신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유능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동석 이사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난 유능한 의사가 아니라 최고의 의사를 원해요. 그래야 나중에 현수가 병원을 이끌어야 할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 아닙니까?”

“아!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금 과장이 신경을 많이 써 줬으면 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현수 선생이 최고의 의사가 된다면 제게도 영광인 일입니다. 이미 우리 과는 물론 다른 과에도 언질을 주었고, 지방에도 연락을 넣었습니다.”

“그래요? 내가 말하기 전에 알아서 미리 일을 처리해 주니까 더욱 금 과장을 믿을 수밖에 없군요. 잘 부탁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사장님.”

신동석 이사장이 금경태 과장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 다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커피 한 모금을 마신 신동석 이사장이 턱을 만지며 눈가를 좁혔다.

‘현수가 직접 내게 부탁할 정도면 분명 위기를 느꼈다는 말인데. 그렇게 자존심 강한 놈이 라이벌 의식을 느낄 정도로 뛰어난 놈이 누굴까?’

신동석 이사장이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이제 석 달밖에 안 됐지만, 혹시 이번 인턴들 중에 눈여겨볼 만한 선생이 있습니까?”

금경태 과장이 귀신같이 신동석의 의중을 알아챘다.

“몇몇 있기는 합니다만, 신현수 선생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릅니다.”

“흐음, 그래요. 어제 방송에 인턴 한 명이 나왔다고 하던데, 그 선생은 어때요?”

“나름 인턴으로서 일은 잘합니다만, 특별하게 볼 정도는 아닙니다. 방송에 나온 것도 운이 많이 따른 탓입니다. 응급실을 돈 인턴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데다, 하필이면 아이 아버지가 방송국 PD인 덕을 본 것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신동석 이사장이 소파에서 일어나 집무용 의자에 옮겨 앉았다.

“어찌 됐든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니까 그 인턴 선생도 신경을 써 주세요. 그리고 다음 주에 시간 내서 술이나 한잔할까요?”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신현수 선생에게 시범을 보이도록 했어야 했는데, PD가 워낙 완강하게 말을 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요? 방송이야 조금만 신경 쓰면 얼마든지 나갈 수 있으니까 괘념치 마세요. 그럼 일 보세요.”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사장님.”

돌아서는 금경태 과장의 등 뒤로 신동석 이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 인턴 선생 이름이 뭡니까?”

“김지훈입니다, 이사장님.”

금경태 과장이 급히 돌아서서 대답을 했다.

신동석 이사장이 가볍게 웃으며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의사가 된 지 이제 석 달밖에 안 된 인턴이 웬만큼 뛰어나지 않고서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겠지. 김지훈이라…….’

김지훈이라는 이름을 되뇐 신동석 이사장이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머리와 양복은 물론 구두까지 세심하게 살핀 후에야 이사장 실을 나섰다.

‘그래 봐야 현수만 하겠나.’

아무리 뛰어나야 이제 인턴이었다.

신현수가 인턴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동석 이사장의 머릿속에서 김지훈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짐을 챙긴 김지훈이 응급실에 들렀다.

서울에서 첫 텀으로 돌았고, 그사이 일도 많았던 탓에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김지훈이 들어서자 간호사들이 반갑게 맞았다.

막 퇴근을 준비하던 수간호사가 활짝 웃었다.

“김지훈 선생님, 지금 내려가세요?”

“네.”

“선생님 덕에 응급실이 꽤 좋아졌어요.”

“제 덕에요?”

“방송에 나온다고 기구들을 새걸로 싹 바꿨잖아요. 말썽 부리는 기구들이 없으니까 일하는 맛도 나고, 한결 편하죠. 고마워요. 그런데 어쩐 일로 들르셨어요.”

“첫 근무를 여기서 시작했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죠.”

“정말 인사하러 들르신 거예요?”

“네.”

“어쩜! 지방으로 파견 갈 때 들른 선생님은 김지훈 선생님이 처음이에요. 하여간 선생님 때문에 여러 번 놀라네요. 조심해서 내려가시고, 11월에 봐요.”

“그래요. 그럼 잘 지내세요,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김지훈 선생님.”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정겨웠다.

응급실을 나선 김지훈이 병원을 바라보았다.

불과 3개월이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이런 걸까?

터벅터벅 주차장으로 간 김지훈이 윤서연을 찾았다.

저만치에서 손을 흔드는 여인이 보였다.

‘설마 저 여자가 서연이야?’

가까이 다가간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윤서연에게는 죄였다.

쫙 달라붙는 청바지에 면 티를 입었을 뿐이었지만 어디를 가도 눈에 띌 것 같았다.

적당히 진하면서도 옅은 화장이 윤서연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탄력 있는 몸매에 봉긋한 가슴까지, 남자라면 누구나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미모였다.

“서연이 너 꾸미니까 못 알아보겠다.”

“예쁘다는 거지?”

“그래, 아주 남자들이 줄을 서겠다. 그런데 이게 네 차야?”

“응. 짐은 뒤에 싣고, 앞에 타.”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며 조수석에 앉았다.

“야! 차 좋네. 이게 말로만 듣던 BMW?”

“의사 된 기념으로 아빠가 사 준 거야. 그냥 국산 차 사 달라고 했는데, 이 차가 훨씬 안전하다고 그러시네.”

윤서연이 살며시 웃으며 키를 돌렸다.

부르릉!

BMW 316G 모델이 힘찬 엔진음을 터뜨렸다.

윤서연이 음악을 틀고 스피커 볼륨을 올렸다.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흘러나왔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너의 모습, 시간은 우리를 점점 갈라놓는데…….]

하필이면 이런 가사가!

윤서연이 황급히 노래를 껐다.

구미로 가는 길은 멀었다.

우리나라에 차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가뜩이나 먼데 도로마저 꽉 막혀 차가 거북이걸음을 했다.

슬슬 졸음이 몰려왔지만, 자는 건 운전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억지로 눈을 뜨고 있자 윤서연이 웃으며 캔 커피를 내밀었다.

“지훈아, 넌 왜 일반 외과를 지원했어.”

“글쎄, 왜 했을까?”

“이왕이면 돈 잘 버는 과가 좋잖아.”

“돈 좋지. 솔직히 많이 벌고 싶기도 해. 하지만 내 꿈과 희망이 돈보다 훨씬 더 중요해.”

윤서연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김지훈의 꿈과 희망은 무엇일까?

“네 꿈이 뭔데?”

“내 꿈? 최고의 의사이자 최고의 써전이 되는 것.”

“최고의 의사? 그게 무슨 말이야?”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 단순히 실력만 뛰어나다고 최고는 아닌 것 같아. 열심히 노력하고 배우다 보면 언젠가는 최고의 의사가 무엇인지 알겠지.”

김지훈이 넋두리처럼 말을 하다 손을 흔들었다.

“야야! 병원 밖에서는 다른 얘기 하자.”

“그래, 알았어. 그런데 너 혹시 만나는 사람 있어?”

“만나는 사람이야 많지.”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 왜 이럴까?

“지훈이 너는 하여튼. 만나는 여자 있냐고.”

윤서연이 핀잔을 주자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없겠어? 당연히 있지.”

“정말? 어떤 사이인데?”

윤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래, 나는 여자 만나면 안 돼?”

“그건 아니지만, 일석이 말로는 너 만나는 사람 없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윤서연의 진지한 모습에 김지훈은 순간 정색을 했다.

이제 막 고경아를 만났다.

만나면 항상 편했지만, 그래야 두 번이었다. 연인이 될지, 아니면 남남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직장이 다르다면 혹시 모를까?

함부로 말했다가 관계가 깨지기라도 하면 고경아의 입장이 무척 난처해질 수도 있었다.

“남자들끼리도 비밀이 있는 법이야. 일석이라고 내 생활을 다 알겠냐? 윤서연, 나 무시하지 마라. 나도 제법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마음만 먹으면 여자 친구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어.”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말에 윤서연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 정도의 여자가 있었다면 손일석이 모를 리 없었다.

윤서연을 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글래머여서 그런가?

눈만 돌리면 결코 훔쳐보지 말아야 할 부위가 보였다.

“그러는 넌 있어?”

“넌 어디 보고 얘기하는 거야?”

“엉? 그게… 야! 이제 봄 다 지나갔네.”

김지훈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웬 날씨 타령이야. 나야 당연히 있지.”

“야! 그럴 줄 알았어. 하긴 남자 친구가 없을 수가 없겠지. 그냥 네가 웃기만 해도 남자들은 다 쓰러질 거다. 하하하! 그런데 누구야?”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과장된 말과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몰라? 항상 널 보며 웃는 내가 안 보여?’

“내 마음에는 있는데, 그 사람은 내가 안 보이나 봐.”

“얼라? 그런 놈이 다 있어? 감히 서연이를 무시하다니, 이런 죽일 놈이 있나.”

윤서연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김지훈이 헛기침을 터뜨렸다.

“미안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윤서연이 나직한 한숨을 터뜨렸다.

알고도 이러는 건지,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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