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0화 (40/1,329)

제9화 아듀! 서울 (2)

“일석이 그 자식한테 말한 내가 잘못이지. 방송 날짜는 혼자만 알고 있으라니까.”

스스로 병원의 정보통이라고 자처하는 손일석이었지만, 김지훈이 보기에는 요란한 나팔수였다. 조금이라도 재밌는 일이다 싶으면 하루도 안 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손일석이 주범은 아니었다.

일반 외과와 소아과 전공의들의 입이 더 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의 질문을 피해 가며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9시가 다 돼 숙소로 들어가다 흠칫 놀랐다.

평소 이 시간이면 한산해야 할 숙소가 동기들로 북적였다.

서울 병원 인턴 40명 중 절반이 넘게 모여 있었다.

“동기 여러분, 김지훈 인턴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자! 선생님, 이리로 오시죠.”

손일석이 호들갑을 떨며 김지훈을 TV 앞에 앉혔다.

“뭐야, 왜들 이래?”

“우리의 호프, 김지훈 선생님께서 뉴스에 나오신다고 다들 집에도 안 가고 대기하는 중입니다.”

“장난하지 말고.”

손일석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럼 우리가 왜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뉴스를 보려고 모였을까요?”

김지훈이 손일석을 슬쩍 째려보고는 TV로 눈을 돌렸다.

내심 제일 궁금한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드디어 9시 뉴스를 알리는 음악이 울렸다.

오늘 벌어진 주요 사건 사고가 방영됐다.

오랜간만에 보는 뉴스에 다들 한 마디씩 촌평을 하는 사이, 거의 끝날 시간이 됐다.

“지훈아, 오늘 맞아?”

“분명 오늘이라고 했는데.”

“잘못 들은 거 아냐?”

“아냐, 똑똑히 들었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찰나, 뉴스 화면이 바뀌었다.

어린아이가 목을 잡고 쓰러지는 장면이 나왔다.

“나온다, 나온다. 조용히 해 봐.”

손일석이 소리를 지르며 볼륨을 키웠다.

[시청자 여러분, 잘 놀던 아이가 사탕을 먹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많이 놀라시겠죠?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 한강 공원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면에 한강 공원이 나왔다.

[즐거운 나들이를 나왔던 가족이 어이없는 사고를 당한 현장입니다. 사탕을 먹던 아이가 갑자기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는데요. 이유는 사탕이 기도를 막았기 때문이랍니다. 5분 이내에 사탕을 꺼내지 못하면 사망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결국 아이의 호흡까지 정지됐지만, 다행히 근처에 있던 의사 한 분이 사탕을 제거하고 심폐 소생술까지 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자 응급실이 나왔다.

소아과 과장과 이혁민 교수 옆에 김지훈이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왔다.”

동기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경우 하임리히 법을 사용한다는데,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아울러 응급실에서 겪는 애로 사항도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잠깐 소아과 과장의 얼굴을 비추고는 곧 김지훈이 시범을 보이는 모습이 나왔고, 이혁민 교수가 응급실의 실정에 대해 설명하는 화면이 이어졌다.

[잘 보셨습니까? 의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예방이 최선이겠지만, 만에 하나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당황하지 마시고 오늘 본 하임리히 요법을 떠올리시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현장에서 심폐 소생술까지 받았던 아이는 건강하게 퇴원했다고 합니다. 방금 전 화면에 나왔던 의사들 중 시범을 보였던 의사 덕분이랍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 우리나라 의료의 앞날이 밝은 것 같습니다.]

뉴스가 끝났다.

동기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김지훈을 보았다.

“우와! 정말 네가 심폐 소생술로 아이를 살린 거야?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별거 아냐. 그냥 뉴스에 나온 게 다야.”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게 아니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사람 살리는 게 보통 일이냐? 그것도 조만한 애를 말이야. 그런데 저걸 어떻게 알고 바로 뉴스를 내보냈지?”

“아빠가 9시 뉴스 담당 PD래.”

“야! 기가 막히네. 김지훈, 너 드디어 훌륭한 인맥까지 만드는구나. 방송국 PD면 입김이 꽤 세잖아. 나도 좀 소개시켜 주라.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네. 빨리 말해 봐, 인마.”

동기들까지 아우성이었다.

김지훈이 어쩔 수 없이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물론 고경아는 쏙 빼놓았지만, 손일석의 예리한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엄지를 치켜들며 김지훈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일석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런 감동의 드라마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갑자기 네가 한강 공원에 갔는지 궁금해질까? 그것도 일요일에 말이야. 여기 일요일에 혼자 공원에 가는 불쌍한 놈 있냐?”

“없지. 뭔가 있네.”

동기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분명 이거지?”

손일석이 새끼손가락을 세우며 김지훈을 빤히 보았다.

당황한 김지훈이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야, 인마. 그냥 일이 있어서 간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일까? 욕구 불만에 가득 찼을 청춘이 한강 공원에는 왜 갔을까?”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닫았다.

이럴 때는 그게 상책이었다.

손일석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아직은 고경아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병원의 간호사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훈아, 형에게 어서 진실을 말해다오.”

‘애새끼, 정말 끈질기네.’

“아무것도 없어, 인마.”

그때 동기 중 하나가 손가락을 튕겼다.

첫 텀으로 방사선과를 돌았던 김경수였다.

“맞다, 무교동 낙지집에서 너 본 거 같다. 여자 둘하고 같이 있었지?”

뜨끔했지만 김지훈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야, 인마. 잘못 봤겠지.”

“그런가? 뒷모습이 꼭 너 같아서 긴가민가하긴 했다.”

손일석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건 경수 네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지훈이가 1명도 아니고 여자 2명을 만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야. 그렇지? 설마 네가 나를 배신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있어?”

“그래, 난 널 믿는다. 넌 결코 2명의 여자를 독식할 놈이 아니지.”

뉴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시껄렁한 얘기만 오갔다. 급기야 김지훈이 맥주를 사는 것으로 말이 흘렀다.

김지훈이 지갑을 탈탈 털었다.

“4만 3천 원. 이게 다야.”

손일석이 동기들의 머릿수를 세었다.

“역시 지훈이가 인기는 있어. 아직도 16명이나 남았네. 4만 원으로는 턱도 없다. 자! 다들 5천 원씩 각출. 맥주 사러 가는 사람은 면제.”

오래간만에 많이 모였다.

모두들 학교 다닐 때 기분이 나는지 5천 원에 목숨을 걸었다. 김지훈도 5천 원을 아끼겠다고 열심히 가위바위보를 했다.

만세!

이겼다.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며 손을 휘휘 저었다.

“뉴스에 나온 놈이 이 정도는 내야지.”

“맥주 사 오잖아, 인마.”

“이기겠다고 용쓴 놈이 바보지.”

돈도 내고, 심부름도 하고 어째 일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즐거운 밤이었다. 모처럼 많은 동기들이 모여 자리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지훈아, 너 다음에 구미 가지? 거기서도 사고 한번 쳐라.”

“왜?”

“네가 사고를 쳐야 이만큼 모이잖아. 간만에 정말 즐겁다.”

동기의 말에 손일석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구미 가는 놈들 지훈이 팍팍 밀어줘라. 사고 치면 바로 연락해서 다시 뭉치자.”

손일석의 말에 큰 웃음이 터졌다.

거의 자리가 끝날 무렵, 김지훈이 잔을 높이 들며 외쳤다.

“마지막 서울의 밤을 위하여!”

“위하여!”

맥주 다섯 박스가 오징어 몇 마리와 함께 모두 사라졌다.

드디어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이 왔다.

부지런히 오전 일과를 끝내고 지방에 파견 갔다 서울로 올라올 동기들을 위한 인수인계장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 어젯밤 뉴스를 본 간호사들의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실물이 화면보다 낫다는 둥.

표정이 너무 딱딱했다는 둥.

어떻게 애를 살렸냐며, 대단하다는 둥.

김지훈은 쑥스럽기도 하고, 마무리할 시간도 부족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서둘러 일을 마친 김지훈이 일반 외과 외래로 내려갔다.

과장과 이혁민 교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고개만 끄덕인 과장과는 달리 이혁민 교수는 방심하지 말라는 따끔한 충고와 함께 구미에 가서도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잊지 않았다.

“그럼 겨울에 보자. 열심히 해라.”

“예, 선생님. 가 보겠습니다.”

숙소로 올라가는 길에 윤서연을 만났다.

마치 우연인 것처럼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윤서연, 네가 이쪽에 웬일이야. 퇴근 안 했어?”

“응. 잠깐 볼일이 있어서. 지훈아, 너 오늘 내려가?”

“응, 그래야 내일 근무 준비를 하지. 너도 구미 아냐?”

“맞아. 구미 첫 텀으로 뭐 도는데?”

“성형외과하고 흉부외과.”

“힘들겠다. 구미에는 뭐 타고 갈 거야?”

“버스타고 가야지.”

“일석이하고 가?”

“아니, 부모님이 올라오셨나 봐. 같이 식사하고 그러면 막차 타고 내려가겠지.”

윤서연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그럼 혼자 가겠네. 다른 약속 없으면 내 차 타고 같이 갈래? 나 혼자 운전하면서 내려갈 생각하니까 솔직히 겁이 나. 거리도 멀고.”

“어? 너, 차 있었어?”

“어머! 차 갖고 다닌 지가 언젠데.”

“그랬어? 난 이제야 알았네.”

부럽다는 눈으로 윤서연을 보던 김지훈이 잠시 망설였다. 아직 특별한 관계는 아니지만, 고경아를 만나면서 윤서연의 차를 타고 구미까지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운전은 자신 있는데, 초행이라 무서워서 그래. 저녁에 도착할 텐데, 가는 동안 만일 사고라도 나면…….”

여자 혼자 운전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정말 문제일 것이다.

‘내가 뭘 고민하고 있는 거야. 동기하고 차 같이 타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래, 알았어. 언제 갈 건데?”

윤서연이 반색을 했다.

“그럼 같이 가는 거지?”

“그렇다니까. 난 최대한 빨리 출발했으면 좋겠는데.”

“걱정 마. 나도 내일 일이 있어서 미리 짐을 챙겨 놨어. 한 시간 후에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내려와.”

“주차장에서 한 시간 후. 오케이.”

김지훈이 손을 흔들고는 휙 하니 숙소로 올라갔다.

‘휴우!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지훈이가 먼저 다가오면 얼마나 좋을까!’

은근히 자존심 상해하면서도 윤서연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선배와 동기를 막론하고 추파를 던지는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신했다.

170에 가까운 키에 몸매와 얼굴도 빠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대단한 재력가라는 사실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런데 김지훈은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많고 많은 동기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현수의 반만이라도 내게 관심을 보인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도 않을 텐데.’

솔직히 같은 인턴이라는 것을 빼면 모든 면에서 김지훈은 신현수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집안이나 배경은 물론 말쑥한 외모와 매너까지, 여자라면 홀딱 빠지고도 남을 신현수였다.

그런 신현수가 자신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버리지 못했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성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윤서연이 여자 인턴들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가운을 벗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윤서연이 인턴에서 여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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