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9화 (39/1,329)

제9화 아듀! 서울 (1)

신현수는 여전히 책과 벗했고, 정갑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였다가도 김지훈이 나타나면 인상을 구기며 다른 병동으로 사라졌다. 그것만 빼면 변화가 없는 일상이었다.

“아! 따분해. 뭔가 재밌는 일 없을까?”

손일석의 말이 씨가 된 것일까?

며칠 후, 병원이 소리 없이 발칵 뒤집혔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병원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응급실도 난리가 나 청소는 물론 깨끗하게 물품들을 정비했다. 평소 불량이거나 더러웠던 기구나 침구들이 모조리 새것으로 교체됐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아,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갑자기 병원이 너무 깨끗해졌어. 어제 응급실에 들렀는데, 기구까지 싹 새것으로 교체했더라구.”

“봄맞이 대청소하나 보지.”

손일석이 탁자에 턱을 괸 채 무덤덤하게 답했다.

“너, 요새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봄 타나 봐. 의욕도 없고, 재밌는 일도 없고. 요샌 내 정보망에도 하찮은 일만 걸려.”

“일이 없어서 그래, 인마. 아주 뺑뺑이를 돌려야 그런 생각을 안 하지.”

“그러게 말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따스했다.

손일석이 따르륵, 따르륵 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김지훈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이세요.”

“이혁민 선생님이요?”

교수가 인턴에게 직접 전화할 일은 없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전화를 받았다.

“예, 김지훈입니다.”

(김지훈 선생, 지금 빨리 응급실로 내려와라.)

대답을 할 새도 없이 툭 끊어졌다.

“간호사, 나 응급실에 있을 테니까 혹시 일 있으면 그리로 연락해요.”

“무슨 일이세요?”

“몰라요.”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부랴부랴 응급실로 향했다.

졸고 있던 손일석이 어느새 옆에 있었다.

“넌 왜 와?”

“뭔가 촉이 느껴져.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응급실에 무슨 재밌는 일이 있겠냐?”

“이혁민 선생님이 응급실에서 널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해. 분명 뭔가 있어.”

응급실에 들어서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멈칫거렸다.

환자는 없고, 의사와 엉뚱한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뭐야, 저거 방송국 카메라 아냐?”

손일석이 고개를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김지훈을 본 이혁민 교수가 손짓을 했다.

“김지훈 선생, 이리 와라. 이분, 알제?”

어라?

승희 아빠 정훈철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MBS에서 병원에 대한 방송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런 자리에 왜 날 부르신 거지?’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이혁민 교수가 흡족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김지훈 선생, 주말에 한강 공원에서 일이 있었다며?”

“예? 아! 예.”

“그 일 때문에 오셨다.”

김지훈이 정훈철을 보며 물었다.

“그 일 때문이라니요?”

“아이 이름이 승희였던가? 어제 잘 퇴원했는데, 다른 아이들도 똑같은 일을 당할까 봐 무척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야. 그래서 9시 뉴스에 하임리히 요법도 소개하고, 응급실의 중요성도 보도하신다고 오셨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선생님, 저는 왜 부르셨습니까?”

“정 PD님이 꼭 너를 불러야 한다고 하시네.”

뉴스 보도라니, 얼떨떨한 일이었다.

“제가 뭘.”

“기다려라. 니가 할 일이 있다. 그럼 정 PD님, 소아과 선생님께서 하임리히 요법을 소개하고, 김지훈 선생이 시범을 보이면 되는 겁니까?”

“예, 그렇게 해 주시면 됩니다. 교수님께서는 마지막에 응급실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을 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응급실이 환하게 비추는 밝은 조명으로 인해 후끈거렸다.

멀뚱멀뚱 서 있던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의 손짓에 급히 달려갔다. 소아과 과장과 함께 셋이 나란히 섰다.

정훈철 PD가 다가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말이야 간단했지만, 방송에 나온다니 이혁민 교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마른하늘에 날벼락 수준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 설명한 정훈철 PD가 손을 들며 말했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김지훈 선생님, 소아과 과장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면 제가 사인을 드릴 겁니다. 그때 인형으로 시범을 보이시면 됩니다. 자자! 한 번에 끝냅시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김장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 있자 정훈철 PD가 어깨에 힘을 빼라는 시늉을 했다.

‘갑자기 불러서 이러는데, 어떻게 힘을 빼요.’

난생처음 카메라 앞에 섰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조명 뒤로 간호사들과 어느새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기들의 얼굴까지 보이자 더 긴장이 됐다.

“자! 자연스럽게. 몸에서 힘 빼시고. 큐!”

소아과 과장이 한 장의 그림을 보며 하임리히 요법을 설명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의사였지만,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임리히 요법은 다음과 같이 시행합니다.”

정훈철 PD가 김지훈을 보며 사인을 보냈다.

‘큐!’

김지훈이 인형을 안고 시범을 보였다. 곧이어 이혁민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이내 카메라 도는 소리가 사라졌다.

정훈철 PD가 손뼉을 치며 김지훈에게 다가왔다.

“역시 의사분들답게 잘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부자연스럽네요. 다시 한 번 가겠습니다. 편안하게 해 주세요. 김지훈 선생님, 어깨에 힘 빼시고.”

조명과 마이크를 확인한 정훈철이 큐 사인을 던졌다.

똑같은 일을 다시 반복했다.

어후! 방송이란 것이 원래 이런 건가?

뉴스 말미에 잠시 나온다는데, 몇 번이나 반복했다.

“좋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정훈철 PD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주변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것으로 촬영이 끝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김지훈은 이마의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방송국 사람들이 사라지자 응급실이 한산해졌다.

정훈철 PD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PD님.”

“제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함께 저녁이나 하시죠.”

어느새 6시였다.

김지훈이 깜작 놀라며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전 할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PD님, 인턴 선생이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김지훈 선생, 일단 신현수 선생에게 부탁은 해 놨으니까 남은 일만 처리하면 될 거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올라가 보겠습니다. 정 PD님, 안녕히 가십시오.”

정훈철 PD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더구나 딸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었다.

“그럼 일 끝난 후에 잠깐 얼굴이라도 봤으면 합니다. 그건 괜찮으시죠?”

김지훈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꽤 늦을 텐데요.”

“기다리겠습니다. 이혁민 교수님, 저녁 식사 후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술이요?”

“응급실 얘기도 들을 겸 제게는 좋은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교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싶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저녁 식사 자리에 병원장님과 우리 과 과장님도 참석하시니까 그때 병원과 응급실의 어려움을 들으시면 될 것 같고, 술자리는 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대접해야죠.”

“어이구! 아닙니다. PD님 덕분에 병원 홍보까지 됐는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이 길어질 판이었다.

김지훈은 잠시 말이 끊긴 틈을 타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올라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연락처는 병동에 말해 놓을 테니까 빨리 끝내고 나오레이.”

“예, 알겠습니다. 정 PD님, 안녕히 가십시오.”

응급실을 나온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에 벌어진 일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동에 올라가자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퇴근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손일석이 쪼르르 달려왔지만 말할 틈도 없었다.

“나 바빠. 이따 얘기하자.”

신현수가 책을 덮으며 조용히 퇴근을 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뭘 한 거야?’

방송 촬영을 했다는 것에 대한 흥분을 느낄 새도 없이 김지훈이 병동을 향해 달렸다. 이미 소문을 들었는지 각 병동의 간호사들이 얼굴만 보면 물었다.

“선생님, 방송국에서 와서 촬영했다면서요? 무슨 일로 출연하신 거예요?”

“몰라요. 일부터 합시다. 뭘 해야 하죠?”

간호사가 오더에 나온 물품들을 내밀며 종알거렸다.

“도대체 뭘까? 궁금해 죽겠네. 조금만 얘기해 주면 안 돼요? MBS는 맞죠?”

“나중에.”

‘그냥 카메라에 한번 찍힌 건데, 왜들 이 난리야. 두 번 찍혔다간 연예인 취급하겠네.’

은근히 뿌듯하면서도 부아가 치밀었다. 오후 시간을 모두 뺏긴 탓에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에이 씨! 현수 이 새끼는 사정 좀 봐주지. 전진우 선생님도 도와주셨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네.”

혼자 투덜거리며 일을 마친 김지훈은 밤 10시가 다 돼서야 의자에 앉았다.

‘아! 피곤하다.’

병동 간호사가 또 물어보며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 찍은 거 뉴스에 나온다던데, 언제 나온대요?”

“몰라요. 이건 또 뭐예요?”

“이혁민 선생님이 일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오시래요.”

강남 발렌타인.

웬 술 이름?

“언제 연락하셨어요?”

“한 시간은 됐어요. 그때도 빨리 와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늦었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은 김지훈이 택시를 잡았다,

이것 역시 절대적인 오더(order) 중의 하나였다.

이혁민 교수와 정훈철 PD가 함께하는 자리였다.

교수가 오라고 했으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가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애초 교수와의 대화에 인턴이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발렌타인 17년산 2병이 사라지는 동안 김지훈이 한 것이라고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대화의 내용이 흥미진진한 탓에 크게 지루하진 않았다.

모두 다 얼굴이 벌게지고 혀가 약간 꼬부라져서야 자리가 끝났다.

‘역시 교수님하고 PD는 다르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 술은 별로였지만, 오기를 잘했어. 발렌타인 17? 비싸기만 무진장 비싸고 돈값은 못하는 술이네. 그 돈으로 소주를 먹으면 수십 번도 넘게 먹겠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안다고, 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양주의 맛을 알 리가 없었다.

***

드디어 뉴스에 기획 보도가 나오는 날이 왔다.

병동 간호사들은 물론 전진우까지 김지훈만 보면 물었다.

“오늘 9시 뉴스에 나온다면서? 그런데 왜 나오는 거야? 혹시 나쁜 짓 한 건 아니지.”

“에이! 선생님도. 절대 아니죠. 소아과 과장님하고 이혁민 선생님까지 나오시잖아요.”

“따르륵 선생님, 오늘 뉴스 꼭 볼게요. 뭐 때문에 찍었는지 궁금해 죽겠네.”

“지훈아, 나도 궁금해 죽겠다.”

“별일 아니에요.”

“응급실 근무라면 모르지만, 내과 인턴인 너를 왜 찍어. 소아과 과장님과 이혁민 선생님을 찍는데 인턴을 함께 찍었다는 게 이상하잖아. 방송국에 아는 사람 있어?”

공연히 무안해진 김지훈이 머리만 긁적였다.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일이라고 해도 제 입으로 말하면 자랑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뉴스에까지 나온다니 더욱 말하기가 힘들었다.

다소 냉소적인 신현수의 표정과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윤서연까지도 왠지 부담스러웠다.

슬며시 자리를 뜬 김지훈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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