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6화 (36/1,329)

제7화 약속 지킵니다 (2)

그날 오후, 인수인계를 하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김지훈 선생님 말이야, 정말 대단해.”

“오늘은 왜?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이제는 김지훈을 모르는 간호사가 없었다.

“응. 오늘 1년차 선생님들도 쩔쩔매는 513호 환자 비지에이를 한 번에 하더라니까. 한 번도 안 웃던 환자가 김지훈 선생님을 보고 웃을 때는 믿겨지지가 않더라. 주치의보다 환자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럴 줄 알았어. 김지훈 선생님만 나타나면 그렇게 힘들게 하는 환자들이 순한 양으로 변하는 걸 보면 513호 환자들도 희한해. 하여간 힘든 환자들은 다 김지훈 선생님한테 맡기면 일사천리라니까. 그럼 또 들어왔겠네.”

인계를 하던 간호사가 냉장고를 가리켰다.

“당연하지. 그 환자가 한 박스 가져왔어.”

“정말?”

“그럼 내가 사 왔겠니. 꼭 김지훈 선생님부터 주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현수 선생님보다 김지훈 선생님이 더 엑설런트한 것 같지 않아?”

“맞아. 하지만 신현수 선생님도 굉장히 깔끔하게 일을 하시잖아. 총장님 아들이 그러기가 쉬워? 일만 조금 나눠서 하면 정말 칭찬 많이 받을 텐데.”

“네 말도 맞지만, 소화기 파트 돌면서 저 정도로 일하는 인턴 선생님 봤어? 환자가 2배도 넘는데 다른 과 일 도와주지, 그러면서도 빵꾸 한 번 안 내지. 혼나지 않는 게 이상한 파트인데 큰 소리 한 번 안 났잖아.”

“그렇긴 하네.”

“티 안 나게 일을 해서 그런가? 근데 김지훈 선생님 웃기지 않아?”

“뭐가?”

“그 와중에도 하루 종일 니들 홀더(봉합 시 바늘을 잡는 기구)를 손에서 놓질 않잖아. 꼭 정말 꿰매는 것처럼 흉내 내면서 말이야. 외과 하고 싶어서 죽겠나 봐.”

그때 간호사 한 명이 놀라며 복도를 가리켰다. 이완실 환자가 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어머! 할머니?”

“김지훈 선생님 불러 줘.”

“할머니, 정말 여기까지 걸어오셨어요?”

“잔말 말고 빨리 불러 줘.”

간호사가 여기저기로 전화를 했다. 연락을 받고 스테이션으로 오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야! 할머니, 정말 혼자 나오셨어요? 대단하시네.”

“그럼. 밥도 한 공기 다 먹었어.”

이완실이 ‘뭐 해?’ 하는 눈빛으로 빤히 김지훈을 보았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이완실이 스테이션까지 걸어 나올 줄은 몰랐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지훈이 엉거주춤 등을 내밀었다.

67세 노인이 어린아이로 변했다.

이완실을 업은 김지훈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할머니, 약속을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젠 안 업어 줄 거야?”

“에이! 애도 아닌데.”

“그럼 나 밥 안 먹고 운동도 안 해.”

김지훈과 김순자가 크게 웃었다.

“계속 떼를 쓰시면 치료 안 해요. 이렇게 걸으시니까 얼마나 좋아요, 할머니.”

자그맣고 가벼운 몸이었지만, 정말 따뜻했다.

막상 업고 보니 힐끗힐끗 쳐다보는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눈길이 의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이것이 환자와의 진정한 랍뽀(rapport)였다.

김지훈과 환자 사이에 믿음과 뜨거운 정이 흘렀다.

간호사들이 난리가 났다.

얼핏 약속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김지훈이 정말 환자를 업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머머! 정말 업으시네. 어쩌면 좋아.”

“정말 보기 좋다. 나 앞으로 김지훈 선생님 팬 할 거야. 저런 선생님을 어디서 보겠어?”

“호호호! 이완실 할머니 얼굴 봤어? 뭐가 그렇게 좋을까.”

인계를 하다 말고 삼천포로 샜던 간호사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나.”

“어머? 이혁민 선생님, 어떻게 오셨어요.”

이혁민 교수가 유석재와 함께 눈앞에 서 있었다.

“컨설트(consult:조언을 위한 타 과 의뢰) 보러 왔다. 그런데 누구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 중이고?”

간호사들이 웃기만 하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게요, 말로 설명해 드리기는 어렵고요.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김지훈 선생님 좀 보세요.”

이완실을 업고 막 복도를 돌아 나온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를 보고는 그대로 굳었다. 이혁민 교수가 의아함을 넘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색한 웃음을 터뜨린 김지훈이 꾸벅 인사만 하고는 부지런히 513호로 향했다.

“할머니, 됐죠? 저 분명히 약속 지켰으니까 할머니도 계속 밥 잘 드시고 운동하셔야 돼요.”

“알았어. 그럼 치료는 자주 올 거지?”

“그럼요. 욕창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곧 퇴원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할머니, 저 가 봅니다.”

김지훈이 부랴부랴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이혁민 교수가 크게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욕창 환자랑 약속을 했단 말이지. 그래서 오늘 업어 준 거고. 하하하! 김지훈이 저놈 진짜 웃기는 놈이네.”

“네, 그렇다니까요. 김지훈 선생님 덕에 음료수가 끊일 날이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고.”

“환자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좋으신지, 거의 매일 주스가 한 박스씩 들어와요.”

간호사들 입에 오르내리면 둘 중의 하나였다.

엑설런트하거나 개판이거나.

“그래?”

“김지훈 선생님 정말 일만 잘하시는 게 아니라 꼭 주치의 같다니까요.”

그때 김지훈이 헐레벌떡 달려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응, 일 잘하고 있다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래? 열심히 하는 게 잘하는 거다.”

이혁민 교수가 흐뭇하게 웃으며 컨설트를 봤다.

마침 할 일이 없었던 김지훈이 뒤를 따랐다.

이혁민 교수가 유석재를 따라 513호로 들어갔다.

“니 소화기 돌지.”

“예.”

“여기 소화기 환자 중에 욕창 환자가 있다며.”

유석재가 재빨리 컨설트 용지를 보였다.

이완실 환자였다.

김지훈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 침대 앞에 섰다.

이혁민 교수가 환자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방금 전에 니가 업었던 분 아니가?”

“맞습니다, 선생님.”

“흐음! 어디 보자, 욕창이 심하나?”

“아닙니다,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욕창 부위를 살피던 이혁민 교수가 중얼거렸다.

“거의 다 나았는데 나한테 컨설트를 낸 걸 보니까 내과가 바쁘긴 바쁜 모양이다. 할머니, 이거 누가 치료했어요.”

이완실이 김지훈을 가리켰다.

“그래요, 좋은 선생님을 만났네요. 앞으로도 하라는 대로 하시면 금방 좋아질 겁니다. 그럼 치료 잘 받으세요.”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후 컨설트 용지에 답을 쓰던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니는 일도 많을 텐데, 지금 뭐 해? 왜 나를 쫓아다녀.”

“오늘 일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

“오늘 오프가?”

“예, 선생님.”

“1년차 되면 퇴근이 뭔지도 모를 텐데, 빨리 퇴근해라.”

이혁민 교수와 유석재가 외과 병동으로 향했다.

손을 흔드는 유석재를 보며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가 남긴 컨설트 용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욕창은 삼사 년차가 봐도 충분한 문제였다. 하지만 환자를 위한 마음에 직접 왔을 것이다.

‘교수가 되셨는데도 이렇게 환자를 보시는구나.’

배워야 할 것이 끝도 없었다.

병동으로 가던 이혁민 교수가 유석재에게 물었다.

“뭐 들은 소리 없나?”

“김지훈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네.”

1년차를 두고 인턴에 대해 묻는 것이 미안한 모양인지 이혁민 교수가 말을 돌렸다.

“전진우가 소화기 도는데 김지훈 때문에 정말 편하답니다.”

“전진우? 그놈아 내가 찍었는데 내과 간 놈 아니가.”

“예, 맞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 잘하는 놈이 편하다고 할 정도면 꽤 잘한다는 말이제.”

“그런 거 아닐까요?”

“맞다. 신현수에 대한 말은 없었나.”

“일 처리가 굉장히 깔끔하다고 하던데요.”

“응급실에서 보니까 그렇더라. 다른 말은 없었고.”

“다른 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이제 1년차입니다, 선생님. 인턴 선생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나요.”

유석재의 눈치가 이상했는지 이혁민 교수가 다시 물었다.

“들은 게 있구나. 말해 봐라.”

유석재가 뜸을 들이자 이혁민 교수가 재촉했다.

“뭐 하나?”

“너무 일을 칼처럼 구분해서 그런지, 조금 차갑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자기 파트 일 이외에는 도와주질 않는 모양입니다. 유일하게 윤서연의 일은 도와준다고 하는데, 지훈이의 일은 손도 안 댄다고 합니다.”

윤서연이 누군지 알 턱이 없었지만, 이혁민 교수도 관심을 둘 인턴이 아니었다.

“둘이 사이가 안 좋나?”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현수 그놈아 고쳐야 할 긴데. 김지훈이는 안 그렇제?”

“소화기 환자만 100명이 넘는데, 다른 과의 일까지 도와준답니다. 사람이 좋은 건지, 일이 좋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둘 다 좋은 일이다. 내가 니들 둘은 참 잘 뽑았다.”

유석재가 얼굴을 붉혔다.

“선생님, 갑자기 저는 왜.”

“니 같아도 믿는 놈한테 일을 부탁하지 않겠나? 동기들이 믿으니까 일을 맡기고 다른 사람 말도 해 주는 게 아니겠나. 먼저 사람이 돼야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석재 니도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마라.”

“예, 선생님.”

병동에 도착해 차트를 보던 이혁민 교수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유석재를 보았다.

“참! 니 그거 봤나?”

“뭘 말입니까?”

“니들 홀더 말이야. 컨설트 볼 때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도 니들 홀더를 돌리고 있대.”

“아하! 예, 저도 봤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니도 그 짓은 안 했잖아.”

“저야 뭐…….”

유석재가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하! 참 기특한 놈이야. 천생 써전(surgeon:외과 의사)인데, 잘 키워야겠다.”

이혁민 교수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따르륵! 따르륵!

니들 홀더에 달린 톱니가 물릴 때마다 소리가 났다.

가위처럼 손가락을 끼우는 구멍이 있었지만,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조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봉합을 할 때 니들 홀더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야! 요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김지훈이 낑낑대며 니들 홀더를 잡고 돌리는 연습을 했다.

앞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김지훈을 보고 웃었다.

“김지훈 선생님, 언제까지 그러실 거예요? 그리고 오늘 오프일 텐데, 안 가세요? 어제도 늦게 가셨잖아요.”

“이완실 할머니 드레싱은 하고 가야죠. 그런데 왜요? 소리 때문에 신경 쓰여요?”

“뭐, 솔직히 신경은 쓰이죠. 살살 하세요. 그러다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불릴지도 몰라요.”

“별명?”

“호호호! 우리까리는 따르륵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따르륵 선생?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간호사가 니들 홀더를 가리켰다.

“그거 잡을 때마다 따르륵, 따르륵 소리 나는 거 안 들리세요? 하루 종일 그러다 아예 손에 붙겠어요.”

“난 잘 모르겠던데, 소리가 거슬렸나 보네요. 미안해요. 그럼 다른 데 가서 하지, 뭐.”

“어머! 그러시면 안 되죠. 저만 욕먹어요.”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욕은 또 왜 먹어요?”

“따르륵 소리가 나면 선생님이 옆에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하죠.”

“사람 헷갈리게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계셔야 병동에 급한 일이 생겨도 마음을 놓죠. 안 계시면 불안해요.”

김지훈이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일하라는 소리네. 좋은 소린지, 나쁜 소린지.”

“설마 나쁜 소리겠어요? 우리가 선생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에이구! 고맙네요. 마음 놓고 일 시킬 일꾼이 하나 있어서 편하다는 소리죠?”

“그건 아닌데. 호호호!”

간호사가 큰 소리로 웃었다.

김지훈도 덩달아 웃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신현수가 안경을 벗고는 이마를 주물렀다.

‘어차피 내 상대가 아닌데,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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