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약속 지킵니다 (1)
김지훈은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힘이 들 때마다 목표와 환자만 생각했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신현수.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일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정갑수.
그들을 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고경아와 통화를 하면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그래도 내심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주먹만 날리지 않았을 뿐 폭력은 폭력이었다.
“경아 씨,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있어요?”
(저도 오프이긴 한데, 왜요?)
“바람이나 쐽시다.”
(어디서요?)
“멀리 가기에는 그렇고, 우리 한강이나 가죠. 대낮에 맥주 한잔하는 것도 괜찮거든요.”
(또 술이에요?)
고경아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내가 무슨 술꾼인 줄 아네. 경아 씨 만날 때 말고는 한 잔도 못 먹어요.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정말이에요?)
정말일 리가 없었다.
아니면 엄청나게 큰 잔으로 한 잔일 것이다.
“그럼요.”
(음! 그럼 좋아요 그런데 경희는 어떻게 하죠.)
지금 같은 기분에서는 그냥 단둘이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밉지 않은 방해꾼이었다.
“혼자 두기 그러면 같이 가요. 혹시 투덜대면 오빠가 맛있는 거 사 주기로 했다고 하세요.”
(정말이죠?)
이런! 고경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고경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주말에 봐요.”
목소리를 듣고 나면 참 편안했다.
주말 약속에 들뜬 김지훈의 기분이 완전히 돌아왔다. 그래서인지 일까지 즐거워졌다.
“선생님, 드레싱 하나 부탁할게요. 혹시 가능하시면 비지에이까지 안 될까요?”
“이건 윤서연 선생 일인데.”
“지금 복사하러 외부 나가셨는데, 조금 급해요.”
“급하긴, 거짓말도 잘하네. 알았으니까 가져와요.”
“아유! 김지훈 선생님밖에 없다니까요. 선생님처럼 엑설런트한 인턴 선생님은 처음 봐요.”
부탁을 잘 들어주어서인지 간호사가 아양까지 떨었다.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이제는 툭하면 층을 가리지 않고 김지훈에게 부탁을 했다.
심지어 환자가 화를 낼 때도 김지훈을 찾았다.
“이런 것까지 부탁하면 어떻게 해요.”
“선생님밖에 없어요. 주치의 선생님들은 바쁘고, 다른 인턴 선생님들은 가 봐야 소용도 없어요. 선생님, 이번 한 번만 제발. 제가 주스 드릴까요?”
“됐습니다, 어디예요?”
참 희한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토닥거리면 환자들이 조용해졌다. 김지훈의 넉살과 웃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그동안 환자들에게 신뢰를 얻은 덕이 더 컸다. 그럴수록 몸은 더 힘들어졌지만, 마음은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동 복도를 지나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병실에서 난리가 났다.
‘현수하고 서연이 같은데,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김지훈이 병실로 다가갔다.
513호였다.
환자 한 명이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쉬면서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찌르는 거야? 허억! 숨차 죽겠어! 힘들어!”
“환자분, 우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의 목이 두껍고, 박동이 약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꼭 필요한 검사입니다.”
다소 무미건조한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 인턴이지? 안 해.”
당연한 말이었지만, 사실 인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인턴도 의사냐는 비웃음이 섞인 말이었기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당연했다.
“인턴은 의사 아닙니까?”
신현수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제대로 하면 누가 뭐래? 나 숨 찬 거 안 보여?”
“그럼 전공의 선생님께 검사를 받으시겠습니까?”
“내 팔목을 좀 봐. 온통 피멍이야.”
“알겠습니다. 환자분이 우릴 의사로 대우 안 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윤서연 선생, 나갑시다.”
인턴으로서는 하기 힘든 말이었다.
어쩌면 신현수이기에 가능한 말일지도 몰랐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신현수가 병실 밖으로 나오다 김지훈과 딱 마주쳤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다인실 환자들은 정말 통제가 안 돼. 그렇게 대우를 받고 싶으면 특실로 갈 것이지.”
신현수가 차갑게 한 마디 내뱉고는 병동으로 갔다.
뒤따라 나온 윤서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연아, 무슨 일이야? 현수는 왜 저래?”
“비지에이 오더가 나왔는데, 잘 안 됐어. 그래서 현수한테 부탁했는데, 환자가 막무가내로 안 한대.”
‘신현수가 부탁을 들어줬어?’
순간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먼저였다.
“몇 번이나 찔렀는데?”
윤서연이 말꼬리를 흐렸다.
“다섯 번…….”
많이도 찔렀다. 환자가 화를 낼 법도 했다. 하지만 반말을 하며 인턴 운운한 환자도 잘한 것은 아니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에는 의사나 환자에게 모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한 시간 정도 지난 뒤에 다시 해 봐.”
“안 돼. 스태프 선생님이 지금 빨리 해서 결과 나오는 대로 가져오라고 했어. 어떡하지? 가뜩이나 그 선생님한테 찍혔는데, 어떡해.”
“급한 환자야?”
“시오피디(COPD:만성 폐쇄성 호흡기 질환) 환자야. 급하기도 하지만, 환자가 너무 예민해. 사실 어제도 이런 일이 있어서 많이 혼났거든. 나, 어떡하지?”
호흡기 파트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지만, 윤서연은 거의 울상을 지었다.
윤서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무엇이 먼저인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했다.
김지훈이 냉정하게 물었다.
“혼나는 건 둘째 문제고, 지금 당장 비지에이를 해야 하는 환자야, 아니야?”
윤서연이 움찔거리며 대답을 했다.
“지금 해야 해. 급해.”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줘, 내가 할게.”
“할 수 있겠어?”
“그렇게 급하면 환자에게 소리를 질러서라도 해야지. 거부한다고 그냥 나와?”
“실패하면 어떻게 하려고? 너도 같이 혼날 거야.”
김지훈이 유리 주사기를 받아 들며 말했다.
“혼나는 건 둘째 문제라고 했지? 그리고 겁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못해.”
빠끔 열린 병실 문틈으로 산소마스크를 쓴 채 괴로워하는 환자의 모습이 보였다.
513호의 환자는 다 안다고 여겼는데 의외로 낯설었다. 아마도 침대가 구석에 있는 데다 말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김지훈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환자의 앞에 섰다.
환자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까만 얼굴에 비쩍 말랐다. 환자표에는 44살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10년은 더 들어 보였다.
산소 게이지가 최고 레벨인 분당 10리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소를 그렇게 마셔도 숨이 찬지 눕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목소리를 높인 게 희한할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지훈이 인사를 하자 눈만 움직였다.
역시 간호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513호 환자답게 상당히 예민해 보였다.
“저 아시죠? 그렇게 여길 들어왔는데, 그동안 인사도 못 했네요. 많이 힘들어 보이세요.”
“나, 검사 안 해요.”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가슴을 크게 움직이며 숨을 들이마셨다. 목소리가 히스테릭했다. 오랫동안 병을 앓은 탓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힘들었을 것이다.
마음으로 대해야 할 환자였다.
“숨이 많이 차 보이시네요. 말씀을 적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번 찔러서 힘드시겠지만, 우리도 이런 경우 굉장히 힘듭니다. 특히 환자분처럼 검사를 많이 하신 분들은 혈관이 줄어들어서 더 힘들어요.”
김지훈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을 했다.
환자도 익숙한 얼굴에 조금은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주치의를 불러 줘요.”
“검사는 급한데, 일이 있어서 당장은 못 오실 것 같습니다. 환자분만 괜찮으시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환자가 말없이 손목을 내밀었다.
양쪽 손목이 바늘에 찔린 자국으로 가득했다.
검사를 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의 항의였다.
김지훈이 앙상하게 마른 환자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그런데 지금 검사를 하지 않으면 제때 치료를 못 받으실 겁니다. 우리도 환자분이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시길 바라고 있어요.”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너무 힘들어요.”
숨을 쉴 때마다 쌕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전 얼마나 힘든지 잘 모릅니다. 아파 보지도 않았는데 환자분의 고통을 어떻게 알겠어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들지 않게 해 드리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여전히 환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환자의 차가운 손에 따스한 온기를 전했다.
‘아파도 참고, 지금 검사를 하셔야 합니다.’
말없는 눈빛에 김지훈의 마음이 담겼지만, 환자는 좀처럼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때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이완실 환자가 스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김지훈의 옆에 선 것이다.
“어? 할머니, 혼자 내려오셨네.”
이완실이 딴청을 피우며 검사를 해야 하는 환자를 보았다.
“자네, 이 선생님이 누군지 알잖아. 고집 부리지 말고 빨리 검사해. 다른 선생들이 와 봐야 자네만 힘들어.”
한동안 김지훈을 보던 환자가 눈을 감으며 손목을 허락했다.
“한 번만이에요.”
“고맙습니다.”
무엇이 고마울까?
고맙다는 말에 날카롭기만 하던 환자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환자는 인턴인 자신에게 정말 한 번의 기회만 줄 것이다.
기술적으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경우는 정말 어렵게 느껴졌다. 단순하기에 실수를 용납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다. 이런 환자는 바늘로 찔리는 것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동맥을 찾았다.
어린아이나 노인의 혈관처럼 미약하게 뛰고 있었다.
숨이 쉬기 어려운 까닭에 박동까지 빨라 도리어 촉진이 힘들었다. 윤서연이 실패한 이유일 것이다.
침착하게 접근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김지훈이 이미 찔렸던 자리에 다시 바늘을 꽂았다.
적어도 민감해진 피부를 다시 뚫는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여러 번 찌른 탓인지 별다른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왼손에서 감지되는 동맥의 위치에 최대한 집중하면서 서서히 바늘을 밀었다. 뭔가가 살짝 걸렸다.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환자의 동맥이었다.
대개는 수직으로 밀어야 한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이 경우에는 그러면 동맥을 뚫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바늘의 각도를 살짝 바꿨다.
동맥을 확보했다고 느끼는 순간, 과감하고도 빠르게 밀었다.
무언가 탁 뚫리는 느낌과 함께 선홍빛이 아닌 검붉은 피가 솟았다. 환자의 호흡이 그만큼 힘들단 의미였다.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많이 아프셨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됐어요?
환자가 놀라 물었다.
“잘 참으셨어요. 아까도 이렇게 참아 주셨으면 금방 됐을 겁니다. 다음에는 화내지 마시고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김지훈이 밝게 웃으며 일어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도 웃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서연의 뒤로 간호사가 보였다. 아마도 걱정이 돼서 온 모양이었다.
“검사 빨리 내보내고, 결과 나오는 대로 찾아다 주세요.”
“네, 선생님.”
주사기를 받아 든 간호사가 쪼르르 달려갔다.
김지훈이 이완실 환자를 보았다.
“할머니, 조금 있으면 간호사들 있는 데까지 혼자 나오시겠네. 큰일 났네.”
“약속 꼭 지켜.”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병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