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4화 (34/1,329)

제6화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신현수도 가만히 지켜볼 상황이 아니었다.

정갑수의 아버지가 보사부(보건 사회부:보건 복지부의 전신) 고위 공무원이다. 만일 정갑수에게 문제가 생기면 병원이나 총장인 아버지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안하무인인 정갑수와 어울린 까닭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인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자 간호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정말 싸우는 건 아니겠지?”

“정갑수는 몰라도 김지훈 선생님이 그럴 사람이니? 아마 말로 할 거야.”

“에이! 손일석 선생님 말이 맞으면 난 싸웠으면 좋겠다.”

“무슨 소리야?”

“솔직히 정갑수는 좀 맞아야 해. 대상 포진 환자 드레싱하는 것 좀 봐. 완전 엉망이야. 환자는 맨날 불평하는데 정갑수는 도리어 우리한테 뭐라고 하잖아. 저번에는 나보고 환자 컨트롤을 못한다고 뭐라고 그러더라.”

“맞아, 맞아. 일도 안 하면서 거드름이나 피우고, 술이나 먹자고 껄떡거리지를 않나. 아휴! 그때의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쳐.”

“그러니까 더 싸우면 안 되지. 정갑수야 어떻게 되는 알 바 아니지만, 김지훈 선생님이 다치면 어떡하니?”

“그건 그렇네.”

어지간히 인심을 잃었는지 간호사들도 김지훈 걱정만 했다.

정갑수가 씩씩거리며 옥상에 올라오자 김지훈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잠갔다.

“하! 문을 잠가? 씨팔 놈아, 넌 죽었어.”

“갑수 형, 먼저 얘기부터 합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해?”

정갑수가 넥타이를 풀며 나무 막대를 단단히 잡았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전혀 겁을 먹지 않자 정갑수는 순간 주춤했다. 평소 봐 왔던 김지훈의 눈빛이 아니었다.

“형이 선배인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형도 우리와 같은 인턴이라는 걸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나, 일석이나 누구든 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너, 지금 일 몇 개 시킨 것 같고 이러는 거냐? 나 참! 이 새끼가 정말. 그러니 악어한테 개쪽을 당하지.”

김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악어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모르면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닙니다. 딱 한 가지만 말할게요. 형의 일은 형이 하세요. 그러다 정 사정이 안 되면 부탁하세요. 그럼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너, 지금 나 가르치는 거냐? 싸가지 없는 새끼. 넌 내 말 한 마디면 끝이야.”

“끝이요?”

“정신 똑바로 차려. 이게,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버지한테 말하면 너 병원에서 자르는 건 일도 아니야, 이 새끼야.”

아버지?

그럼 지금까지 아버지를 믿고 설쳤단 말인가?

도대체 서른이 가깝도록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기가 차서 입을 못 열자 정갑수가 비웃음을 날렸다.

“이제 겁이 좀 나냐? 늦었어, 이 새끼야.”

마치 훈계를 하듯 나무 막대로 김지훈의 머리를 톡톡 치려고 했다. 김지훈이 슬쩍 피하자 정갑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쭈, 피해? 이 씨팔 놈이 대충 지나가려고 했더니 끝까지 개기네.”

“갑수 형, 좋은 말로 할 때 그거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정갑수의 눈이 획 돌았다.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는 것을 조금도 참지 못했다.

아니, 후배가 덤빈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이런 개새끼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무 막대를 휘둘렀다.

휭휭 소리가 김지훈의 귓가를 스쳤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힘을 주고 있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폭력은 답이 아니었다.

순간 악어와의 일도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갑수나 악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다. 이대로 지나간다면 얼마나 많은 동기들과 후배들이 괴롭힘을 당할지 몰랐다.

김지훈이 요리조리 피하자 정갑수가 악에 받쳤다.

“이 씨발 놈아, 내일부터 병원 나올 생각하지 마. 넌 끝났어. 이게 감히 누굴 건드려.”

감히?

선배면 후배를 마음대로 해도 된단 말인가?

수많은 선배들이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다. 그들 중 누구도 스스로 권위를 세우지 않았다. 동료들을 아끼고,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면 선배로서의 권위는 저절로 생긴다.

권위는 결코 말로 세울 수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정갑수는 더 이상 선배가 아니었다.

정말 화가 났다.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갑수!”

김지훈은, 느닷없는 고함에 주춤거리는 정갑수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목이 조여 왔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정갑수가 버둥거렸다.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면 선배답게 행동을 해. 아니, 최소한 당신도, 나도 모두 의사라는 걸 잊지 마.”

“김지훈, 너 이 씨팔 놈, 이거 안 놔.”

김지훈이 멱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정갑수가 캑캑거렸다.

“일만 제대로 하면 돼. 그러면 말 안 해도 선배 대접을 받아. 아니, 의사로서 대접해 줄게.”

“이… 이 개새끼, 내가 가만있을 줄 알아? 아버지한테 말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옷 벗게 만든다.”

또 아버지를 찾아?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옷을 벗긴다고?

정갑수가 무슨 권리로?

멱살을 쥔 김지훈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아버지한테 말을 해? 좋아, 그렇게 해. 당신이 선배라서 참아 왔는지 알아? 지금까지 내 자신과 날 믿어 주는 사람들을 위해 참았어. 하지만 당신은 아냐. 알아? 넌 선배도 아냐, 이 개새끼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 김지훈이 주먹을 날렸다.

꽝!

등 뒤에 있던 버려진 나무 문짝에 구멍이 뻥 뚫렸다.

정갑수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극도로 화가 난 김지훈의 목소리가 도리어 착 가라앉았다.

“마음대로 해 봐. 난 너 따위에게 지지 않아. 그러려고 악착같이 6년을 버틴 게 아니야.”

이를 악문 채 정갑수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을 풀었다.

정갑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정갑수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옥상 문을 열자 손일석이 다급하게 뛰어들어 왔다.

“지훈아, 너 설마!”

김지훈에게 소리를 지르며 멍하니 서 있는 정갑수를 살핀 손일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아, 잘 참았어. 잘했어, 이 자식아.”

윤서연이 겁먹은 얼굴로 달달 떨고 있었다.

“미안하다, 서연아.”

거친 숨을 고르며 김지훈이 병동으로 내려갔다.

간호사들이 눈치를 살피며 수군거렸다.

“상황을 보니까, 잘된 것 같지?”

“응. 이제 정갑수도 일 좀 하겠네.”

김지훈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들이 주먹을 쥐며 소리 없는 파이팅을 외쳤다.

피식 웃고 만 김지훈이 누군가의 기척에 눈을 돌렸다.

“이거 먹어. 잘했어, 지훈아. 난 네가 결코 주먹 같은 건 쓰지 않을 줄 알았어. 고마워.”

윤서연이 캔 커피 하나를 내밀었다.

“고맙다.”

김지훈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날 내내 손일석이 시간만 나면 김지훈을 찾았다.

다음 날 아침까지 정갑수의 가운만이 덩그러니 의자에 걸려 있었다.

김지훈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정갑수와 환자는 별개였다. 기분이 나쁘다고 환자에게 소홀하면 정갑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간호사 한 명이 엘튜브와 비지에이 주사기를 들고 왔다.

“김지훈 선생님, 부탁 좀 하나 할게요.”

“뭔데요?”

“608호 환잔데, 이것 좀 해 주세요.”

소화기 환자가 아니었다.

“우리 파트 환자가 아니네요?”

“환자가 되게 깐깐해서 한 번에 못하면 난리가 나요. 선생님 아니면 못할 것 같아요. 부탁 좀 할게요. 5층 환자 얘기 다 들었어요.”

아마도 이완실 환자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얘기?”

“아이! 다 아시면서. 환자들하고 사이가 정말 좋다면서요.”

간호사가 코맹맹이 소리까지 내며 애교를 떨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병실로 행했다.

“고마워요, 김지훈 선생님.”

간호사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김지훈이 환자를 보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누구야?”

환자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이었다.

‘이분도 꽤 깐깐하시네.’

내과를 돌며 정말 중요한 것을 배웠다.

의사로서 정확하게 일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마음과 정성을 다할 때 환자도 의사에게 믿음을 주었다. 때론 거짓말과 넉살도 필요했다.

“저 모르세요? 난 몇 번이나 할머니 봤는데.”

“그런가? 그런데 왜?”

이상하게도 할머니들의 반말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할머니, 조금 고생하셔야겠어요. 코 줄 끼고, 팔 한 번 따끔할 거예요. 잘하실 수 있죠?”

“며칠 전에 찔렀는데.”

“이걸 하셔야 좋은 약도 쓰고, 배도 편해지죠. 그래야 빨리 나으실 거 아니에요. 조금만 참으세요. 시작합니다, 할머니.”

넉살 때문일까?

환자가 김지훈을 째려보다 눈을 감았다.

기다란 튜브가 코에 들어가자 환자가 눈물까지 흘리며 괴로워했다.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며 입안으로 들어온 튜브를 뱉어 냈다. 심지어 손으로 잡아 뽑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대부분의 인턴들은 짜증을 냈다. 김지훈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내 가족이었다면 환자가 아니라 한 번에 하지 못하는 의사에게 짜증을 냈겠지.’

“할머니, 힘드시면 조금만 쉴게요.”

환자가 진정되기를 기다린 후 다시 시도했다.

“할머니, 들어갑니다. 숨 천천히 쉬시고, 침 한 번 꿀꺽해 보세요. 한 번 더 꿀꺽. 그렇죠, 잘하시네요. 한 번만 더.”

환자가 몇 번 침을 삼키는 시늉을 하자 튜브가 제일 괴로운 부위인 목구멍을 통과했다. 대략 50센티미터 정도 들어갔다.

엘튜브에 공기를 밀어 넣으며 배에 청진기를 대 위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을 했다.

정확하게 들어갔다.

김지훈이 환자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할머니가 잘하신 덕에 내가 고생을 안 했네요. 그럼 따끔 한 번 해야죠?”

“또 있어?”

엘튜브 때문에 목소리까지 변했다.

환자가 더욱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 도리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에이! 할머니도. 아까 말했잖아요. 잘하시면서.”

비지에이(aBGA:동맥혈 가스 분석)를 위해서는 동맥을 찔러야 한다. 수액을 달기 위해 정맥을 찌르는 것도 환자들에게는 고통이었다.

특히나 오랜 입원으로 지친 환자들은 더욱 힘들어 했다. 하물며 깊숙이 숨어 있는 동맥을 찔러야 하는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환자의 손목을 잡은 김지훈이 숨을 골랐다.

앙상하게 뼈마디만 남은 손목에 마음이 아팠다.

손목에서 엄지손가락 쪽으로 주행하는 요골 동맥을 찾았다.

동맥의 박동이 무척 약했다.

신중하게 찔러야 할 지점을 확인한 김지훈이 천천히 바늘을 찔렀다. 피부를 통과한 예리한 바늘 끝에서 저항감이 느껴졌다.

노인의 혈관은 젊은 사람보다 훨씬 딱딱해진다.

심한 경우에는 바늘을 튕겨 내기도 한다.

‘단번에 관감하게.’

강하고 빠르게 수직으로 찔렀다.

빨간 피가 유리 실린지를 밀어내며 주사기에 차올랐다.

“할머니, 끝. 잘 참으셨어요.”

김지훈이 남은 도구들을 챙기자 옆 침대에 누워 있던 환자가 중얼거렸다.

“젊은 선상이 참 용하네. 혹시 서로 아는 사이여?”

“왜요?”

“이 할망구가 얼매나 지랄 맞은 줄 알어? 바늘로 찌를 때마다 얼매나 궁시렁거리는지, 다른 의사들은 다 진저리를 쳤어. 그런데 오늘은 조용허니께 알다가도 모르겄네.”

코에 줄을 낀 환자가 타박을 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밥이나 먹어.”

“뭐가 쓸데없는 소리여. 젊은 선상이 싹싹한 게 참 좋네. 나도 뭘 해야 되믄 선상님이 꼭 해 줘야 혀. 약속하지?”

“그런 말씀 마시고, 빨리 퇴원하세요.”

“이잉? 그렇구만. 그게 정답이네.”

점심 먹으러 가야 하는데 말이 길어질 판이었다. 그때 마침 보호자가 들어왔다.

코 줄을 끼고 있는 환자를 보더니 갑자기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어유! 우리 어머니 이런 거 하려면 보통 애먹는 게 아닌데, 고생 안 하셨어요?”

“고생은요, 할머니가 힘드셨죠.”

“젊은 선생님이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실까. 이것 좀 드세요.”

보호자가 과일 주스 한 박스를 내밀었다.

극구 사양했지만 막무가내로 쥐어 주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주스 2개를 꺼내고는 나머지를 병동 간호사에게 내밀었다.

“엘튜브 한 할머니가 주신 거니까 맛있게 먹어요.”

“어머! 또 받으셨어요? 재주도 좋으셔.”

간호사가 호들갑을 떨며 주스를 받아 들었다.

병동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김지훈, 인턴이 촌지를 다 받았네. 대단해.”

“이게 촌지냐, 마음이지. 마음은 가끔 받아, 인마.”

정갑수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말끔히 사라졌다.

단순한 처치를 했을 뿐이었지만, 환자도 의사를 치료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