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1)
이완실과 김지훈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김지훈은 딸과 함께 스스로 걷는 이완실을 보며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젖어 들었다. 이것이 환자가 주는 기쁨일 것이다. 그때 문득 정갑수의 부탁이 생각났다.
‘대상 포진 환자라고 했지? 무지하게 아플 텐데. 정갑수, 환자에게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욕창을 치료하며 5분 정도 병실에 머물렀던 김지훈이 결국 대상 포진 환자를 찾았다. 통증이 상상을 초월한다더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환자의 고통이 심했다.
이런 환자를 두고 술 마시러 나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갑수는 왜 환자가 주는 기쁨을 모를까?
몸이 힘든 만큼 마음으로 돌려주는 사람이 바로 환자였다.
김지훈은 당직이 해야 할 일까지 모두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10시 반이 훌쩍 넘어 있었다.
손일석이 반색을 했다.
“지훈아, 오늘도 고생했다. 밥은 먹었지?”
“응, 맛있게 먹었지.”
“넌 일하는 게 체질이냐?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나저나 솔직히 너도 직접 보니까 살맛이 안 나지? 우린 완전 애야, 애.”
“이 자식아, 밥맛이 사라지더라. XX가 다 썩어도 싸. 뭐가 부족해서 거기다 파라핀까지 넣어. 완전 미친놈이지.”
손일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내밀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방금 전까지 기분 좋은 것 같더니 왜 이렇게 과민해?”
“그놈이 왜 파라핀을 넣었겠냐. 흑인이라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놈은 추방시켜야 해.”
“하긴, 나도 그 생각은 했다. 그냥 비뇨기과 환자니까 보는 거지, 뭐.”
하루 종일 일한 피로가 몰려와 김지훈은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손일석이 억지로 엉덩이를 들이밀며 소파에 앉았다.
“자식이, 넓은 자리 두고 꼭 내 옆에 앉아야겠냐?”
“지훈아, 너 좋다고 그러는데 왜 그래. 참! 그 환자 드레싱 안 했지?”
“누구?”
“피부과 환자 말이야.”
김지훈이 쿠션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했다.”
“뭐? 안 한다고 했잖아. 정갑수 그 인간, 인제 또 매일 부탁한다. 내일부터 어쩌려고 그걸 해?”
“대상 포진 환자잖아.”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나라고 정갑수가 예뻐서 했겠냐? 환자 때문이지. 그래도 하길 잘했어. 무지하게 아파하대. 드레싱을 하는데 얼마나 아픈지 엉엉 울더라.”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런다고 네 고생 누가 알아주기나 하는 줄 알아? 일은 네가 다 하는데, 칭찬은 현수가 받아.”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생각을 해 봐. 현수는 총장님 아들이야. 똑같이 일을 하고, 조금만 열심히 해도 칭찬을 받을 놈이라구. 거기에 워낙 확실하고 깔끔하게 일을 하잖아. 그러니 스태프들이고, 간호사들이고 얼마나 좋아하겠어.”
칭찬을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답답한 일이었다.
솔직히 김지훈도 인정을 받고 싶었다.
어쩌면 미래의 꿈이 있어 더 절박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손일석에게 냅다 쿠션을 던졌다.
“우린 의사야, 인마.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면 인정받게 돼 있어.”
“얼씨구! 히포크라테스가 여기 있었네. 지랄을 해라. 지금 상황이 네 눈엔 그렇게 보이냐? 소화기 환자가 100명이 넘는다는 걸 누가 알아주겠어.”
손일석의 말이 맞았다. 인턴은 입이 아니라 일로 말한다.
신현수는 정말 모든 면에서 FM(교범)이었다.
언제나 단정한 복장에 업무 역시 깔끔하게 처리했다.
일에 관한 한 빈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이 없을 때면 숙소에 처박히는 대부분의 인턴들과는 달리 병동을 지키며 책까지 읽었다. 일반 소설도 아닌 교과서를 잡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총장의 아들이니 대충 해도 다들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히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의 귀에도 신현수를 칭찬하는 말이 여러 번 들렸다.
동기가 칭찬을 받는 것은 부러우면서도 기쁜 일었다. 그러나 솔직히 김지훈도 신현수가 신경이 쓰였다. 어쩌면 의사로서의 능력을 떠나 넘을 수 없는 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로 꺾일 김지훈이 아니었다.
“일석아, 나 한다면 하는 놈이야. 총장 아들이 아니라 총장님이 직접 와도 나 절대 기 안 죽는다. 외과를 마쳤을 때 내가 학교를 잡는지, 학교가 나를 잡는지 두고 봐.”
“네 깡이야 내가 잘 알지. 하지만 벽은 벽이다. 맨땅에 헤딩하면 머리만 깨져.”
손일석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게 내 전공이다만, 이 자식은 친구야, 아니면 적이야?”
김지훈이 씨익 웃으면서도 내심 이를 꽉 물었다.
울상을 한다고 불쌍하게 여길 사람은 없었다.
세상은 가슴이 시리도록 냉혹하지만, 결코 노력을 배신하지 않았다. 지난 6년 동안 그 사실을 충분히 깨달았다.
문득 손일석이 왜 일반 외과를 지원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김지훈은 묻지 않았다. 손일석 또한 가슴에 희망을 품었을 것이고, 언젠가는 말해 줄 것이다.
함께 같은 과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친구끼리는 가끔 말하지 않아도 통할 때가 있는 법이다.
잠시 진지해졌던 김지훈이 돌연 키득거렸다.
“갑자기 미친놈처럼 왜 웃어?”
“정갑수, 혼 좀 날 거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시간에 무슨 일인지 몰라도 대상 포진 환자 드레싱 끝날 때쯤 피부과 과장님하고 4년차 선생님이 오셨어. 나한테 정갑수 어디 갔냐고 물으시더라.”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지, 뭐.”
“술 먹으러 갔다고?”
“그건 아니고, 일찍 가면서 내게 부탁했다고 했어. 그런데 과장님하고 4년차 선생님 얼굴이 좋지 않더라. 내가 대신 몇 번 일해 준 걸 아는 눈치더라구.”
“그래, 잘하면 완전히 깨지겠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선배라도 동료들에게 일을 미루기만 하는 인턴은 혼이 나도 쌌다. 그래야 자신에게는 물론 환자에게도 좋을 것이다.
김지훈이 오전 업무를 마치자마자 513호를 찾았다.
드레싱을 하며 이완실 환자가 밥은 제대로 먹었는지, 운동은 어디까지 했는지 꼼꼼히 챙겼다.
“따님, 할머니 말씀이 사실이에요? 정말 밥 다 드시고, 문밖까지 갔다 오셨어요?”
“그럼요.”
“아이고! 우리 할머니, 잘하셨어요. 이렇게 잘하셨는데 제가 뭘 해 드려야 하나.”
이완실 환자가 김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하면서도 정말 뭔가 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앗! 그냥 한 말인데, 큰일 났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환자의 눈빛을 보니 무언가는 분명 해야 할 것 같았다. 환자와 눈을 마주치던 김지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 할머니, 제가 딱히 해 드릴 건 없는데, 끼니때마다 밥 한 공기 다 드시고 간호사들 있는 데까지 혼자 걸어오시면 업어 드릴게요.”
“정말?”
마치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럼요. 대신 꼭 혼자 걸으셔야 돼요.”
“알았어. 약속한 거야.”
“아이! 엄마도 참! 의사 선생님에게 업어 달라고 하면 어떡해요. 애도 아니고. 선생님, 죄송해요. 엄마가 자꾸 아이처럼 그러시네요.”
‘설마 진짜 업어 달라고 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할머니만 좋아지시면 그 정도는 해 드려야죠.”
옆에 있던 환자들이 핀잔을 주었다.
“이완실이 애야, 애. 하루 종일 선상만 기다려. 딸 말은 그렇게 안 들으면서 어떻게 선상 말은 잘 듣는지 몰러. 저 노인네 업어 달라고 하고도 남지. 암! 그렇고말고.”
“아녀, 나도 의사 선상님이 환자 업는 것 좀 봤으면 좋겠어. 나 같으면 당장 걸어가겠네.”
환자들과 보호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로 심한 환자들이 많은 513호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간호사가 무슨 일인가 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죠. 나도 할머니가 당장 걸어가셨으면 좋겠네요.”
“에이구!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가 이 정도만 해도 정말 좋아요.”
기분 좋은 말이었다.
513호를 나선 김지훈이 다른 일들을 마치고 한숨을 돌릴 무렵 정갑수가 씩씩거리며 나타났다.
스테이션에 있던 신현수와 윤서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후! 씨팔! X 같아서 그만두든가 해야지.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대충 상황을 짐작한 김지훈과 손일석이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웃었다.
“형, 왜 그래.”
신현수가 웬일인지 관심을 보였다.
“드레싱 부탁했다고 X같이 깨졌다. 그렇게 급하면 직접 하든지. 6시에 딱 퇴근했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8시 넘어서 하는 회진은 또 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씨부렁거리던 정갑수가 김지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야, 김지훈. 넌 일반 외과 때도 그러더니 말 좀 제대로 못 해 주냐? 과장님하고 4년차한테 내가 부탁했다고 그대로 얘기하는 놈이 어디 있어?”
‘그럼 그렇지. 내 탓할 줄 알았어.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면 일석이 말대로 계속 저러겠지?’
환자 때문에 떴던 기분이 동료 때문에 가라앉았다.
김지훈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술 마시러 갔다고 말할까요?”
“뭐?”
“형 부탁 때문에 드레싱을 한 게 아니에요. 원래 안 하려고 했는데, 환자가 워낙 아파해서 한 것뿐이에요. 전에 제가 분명히 말했죠, 형 일은 형이 알아서 하라구요.”
정갑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어?”
“싸가지요? 지금 형이 나한테 그런 말할 자격이 있어요? 그동안 형 일을 대신한 건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당직도 없는 피부과 돌면서 술 마시러 간다고 드레싱 부탁하는 건 정말 아니죠.”
“그래서 지금 고깝다는 거야?”
“이건 감정 문제가 아니에요. 최소한 자기 일은 챙기면서 부탁을 하라는 겁니다.”
정갑수가 픽픽 웃다 말고 느닷없이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볼펜 통을 집어 던졌다. 김지훈이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간호사들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런 씨팔 놈이 학교 몇 년 같이 다녔다고 누굴 호구로 아나. 이 새끼야, 내가 만만해 보여? 내가 너 오늘 확실히 교육 시켜 주마. 이 새끼가 선배를 뭐로 보고.”
화를 풀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급기야 정갑수가 가운을 벗어 던지자 손일석이 급히 일어났다.
“갑수 형, 왜 이래요?”
“넌 뭐야? 이런 씨팔 놈들이 쌍으로 덤비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기세였다.
이건 아니었다.
선배라고 폭력을 쓰는 꼴은 악어만으로도 충분했다.
더구나 선배라고는 해도 일에 있어서는 같은 인턴이다.
누가 보아도 자신이 잘못한 일을 두고 후배들의 탓을 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천천히 가운을 벗으며 손일석을 잡았다.
“일석아, 뒤로 나와.”
“지훈아, 왜 그래. 참아, 인마.”
“넌 빠져 있어. 갑수 형,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어쭈, 합시다? 네가 지금 나랑 한번 해보겠다 이거야?”
김지훈이 한마디만 툭 던지고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옥상에서 보죠. 아무도 따라오지 마라.”
부들부들 떨던 정갑수가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구석에 있던 나무 막대를 들고 계단으로 뛰어갔다.
“이런, 개새끼. 오늘 아주 죽여 버린다.”
윤서연이 사색이 됐다.
“현수야, 일석아, 저러다 지훈이 큰일 나겠어. 어떻게 좀 해 봐.”
간호사들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손일석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으! 참으라니까? 지훈이 저 자식 흥분하면 갑수 형 완전히 개 박살 날 텐데.”
“무슨 소리야?”
신현수가 이제야 반응을 보였다.
“예전에 동네 양아치 2명이 시비 걸었다가 지훈이한테 무지하게 맞았어. 저 자식이 싸움을 안 해서 그렇지 걸리면……. 어후! 이럴 때가 아니다. 갑수 형 어디 부러지기 전에 가 봐야겠다. 씨펄, 갑수 형도 사람 봐 가면서 저래야지. 그동안 지훈이가 해 준 게 얼만데 도리어 저러냐.”
손일석과 윤서연이 부리나케 옥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