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2화 (32/1,329)

제5화 아프니까 환자다 (2)

손을 내젓는 환자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자! 제 손 잡고 일어나세요. 따님, 도와주실래요.”

“그럼요.”

양쪽에서 환자의 손을 잡았다. 한동안 고집을 부리던 환자가 몸을 일으켰다. 환자가 팔과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할머니, 힘드세요?”

“응.”

“그럼 문까지만 갔다 오는 거예요. 이번에 잘하시면 저녁에 또 올게요.”

“정말?”

“그럼요.”

불과 10걸음이었지만 무척 힘들어했다.

다시 침대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딸이 이마를 닦으려 하자 김지훈이 손수건을 달라고 했다.

김지훈이 환자의 이마를 닦으며 짐짓 화를 냈다.

“에이! 할머니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네. 저녁에도 반 공기 드시고 문까지 걸어갔다 오는 거예요. 안 그러면 저 안 옵니다. 저도 밥은 먹고 살아야죠.”

아무 말도 안 했지만 환자는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욕창 때문에 똑바로 누우시면 안 돼요. 불편해도 오늘은 TV를 보고 주무세요. 내일은 문을 보고. 아셨죠.”

욕창은 한 부위에만 지속적인 압력이 가해져서 생긴다. 따라서 꾸준히 자세를 바꿔 줘야 상처가 잘 아문다.

고개를 끄덕이는 환자를 보며 김지훈이 병실을 나섰다.

“젊은 선상이 참 싹싹하네. 이완실이 좋겠네.”

다른 환자의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말이 들렸다.

환자의 딸이 뒤쫓아 나와 주스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그 순간 그동안 뭔지 모를 답답함으로 꽉 막혔었던 김지훈의 가슴이 뻥 뚫렸다. 환자에겐 좋은 치료와 훌륭한 시설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의사의 관심과 정성이 더 필요할지도 몰랐다.

주스를 홀짝거리며 잠시 휴식을 취하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별관 6층으로 향했다. 손일석의 부탁이 생각난 것이다.

“드레싱 갑시다.”

“소화기에는 드레싱할 환자가 없는데요.”

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뇨기과 환자 드레싱 있지 않아요?”

“아, 그 환자! 손일석 선생님이 부탁하셨죠? 잠깐만요.”

간호사가 드레싱 카를 통째로 밀고 나왔다.

내과 드레싱이야 사소한 것들뿐이었고, 많지도 않았다. 포셉(forcep:집게)에 베타딘과 거즈만 있으면 되어 미리 간단하게 싸 놓았다. 의사들은 그걸 도시락이라고 불렀다.

비뇨기과도 인턴에게 맡길 정도면 도시락으로 충분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뭔데 드레싱 카까지 끌고 나가요?”

“가 보시면 알아요. 소화기 도시느라 바쁘실 텐데, 비뇨기과 드레싱까지 챙기시고.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긴요.”

김지훈이 웃자 간호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인턴이라면 100이면 100 짜증을 낼 상황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드레싱 카를 끌고 병실에 들어갔다.

간호사가 부지런히 드레싱 도구들을 꺼내며 환자 한 명을 가리켰다. 김지훈은 순간 당황했다.

이빨만 하얗게 보이는 흑인이었다.

“저 환자예요?”

“네, 아침에 드레싱해 놓은 대로 그대로 하시면 돼요.”

환자 침대 옆에 간이 커튼을 친 간호사가 도울 생각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뭐야, 인턴이라고 어시스트도 안 해? 이것 봐라.’

도시락만 사용해도 되는 환자라면 보조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드레싱 카를 끌고 올 정도면 보조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환자가 빤히 보고 있었다.

‘영어로 해야 되나? 어떡하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네. 아. 라. 요.”

알아듣기에 충분했다.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제가 치료할 겁니다. 부위가 어디죠?”

흑인 환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바지를 내렸다.

“어디 좀 볼까요.”

비뇨기과 환자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즈를 풀던 김지훈이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동기들과 숨어서 보던 야한 영화의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대물(大物)!

빅 사이즈(big size)!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평상시에 20센티미터라면 도대체 유사시엔 어느 정도란 말인가?

이것이 말로만 듣던 흑형의 힘이란 말인가?

남자가 봐도 정말 막강하고도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마른침을 삼킨 김지훈이 말없이 드레싱만 했다.

‘그런데 왜 괴사가 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무기의 일부분이 꺼멓게 죽어 형체를 잃은 상태였다.

“왜 이렇게 됐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파라핀. 너. 어. 써. 요.”

“파라핀?”

가끔 사이즈를 비관한 남자들이 파라핀의 위험성을 모르고 넣는 경우가 있었다. 처음에는 문제가 없지만, 파라핀이 점차 모세 혈관을 막아 결국 조직이 죽고 만다.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꼴이었다.

하지만 물경 20센티미터다. 도대체 뭐가 부족해 파라핀을 넣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걸 왜 넣었어요?”

“쎄. 지. 라. 구.”

드레싱을 하다 말고 김지훈이 인상을 구겼다.

‘여자를 아예 죽일 셈이었구나. 미친놈.’

수컷의 본능은 사이즈와 관계가 없는 모양이었다.

슬쩍 환자 표를 보았다.

25살밖에 안 됐다.

‘에휴! 나이도 어린 놈이 뭐가 부족해서 파라핀까지 넣었냐. 차라리 잘됐네. 우리나라에서 애먼 짓 하느니 아예 없애는 게 낫다. 일석이 이 자식은 이게 뭐가 부럽다고 살맛이 안 나.’

마무리를 한 김지훈이 물끄러미 환자를 보았다.

“다 됐어요.”

“고. 마. 워. 요.”

“고맙긴, 간수나 잘해요.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살맛이 아니라 밥맛이 없어졌다.

환자는 분명한데, 생각하면 할수록 화까지 났다.

드르륵, 드레싱 카 소리가 나자 간호사가 달려왔다.

“저러고 싶을까요? 저런 사람은 확 추방시켜야 하는데.”

김지훈의 말에 간호사가 얼굴만 붉혔다.

사람마다 나름 만족하는 기준이 다 다를 것이다.

흑형들 사이에선 20센티미터도 평범할지 모른다.

별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인종을 떠나 그 새끼는 개새끼다.

오후도 분주히 지나갔다.

일찌감치 일을 마친 신현수가 책을 읽고 있었다.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능력이 있었다. 옆에 앉아 간간이 뭔가 대화를 나누던 윤서연이 김지훈을 보자 반색을 했다.

“지훈아.”

“왜?”

“내가 다음에 저녁하고 술 한 잔 살게. 갑수 형하고 현수랑 같이 가자.”

“난 양주 못 먹는다.”

“너, 술 잘 먹지 않아?”

‘윤서연, 얘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네. 정갑수랑 술 마시다가 체할 일 있냐? 양주가 아니라 양주 할아비라도 그 인간하고는 안 마신다.’

“됐다. 니들끼리 맛있게 먹어. 오프 때도 9시가 넘어야 일이 끝나는데 언제 먹냐.”

역시 냉담했다.

‘김지훈, 너 정말 계속 이럴 거야?’

윤서연이 지그시 숨을 참았다.

“현수야, 지훈이가 제일 힘든데 조금씩 나눠서 할까?”

그제야 책에서 눈을 뗀 신현수가 윤서연을 째려보았다.

“서연아,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자고 했지. 다른 사람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일이나 잘하자. 6시다. 갑수 형 기다리겠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욕을 해라.”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뭐?”

“말이라도 같이하자고 하면 어디 덧나? 내년에 같은 과 할지도 모르는데, 넌 왜 말을 그렇게 하냐. 누가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줄 알겠다. 솔직히 기분 나쁘다.”

“내가 틀린 말 했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서로 도와 가며 일하면 얼마나 좋아. 꼭 내 일, 네 일 나눠야겠어? 그렇다고 내가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

“의사라면 최소한 자기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야?”

“원칙은 그렇지.”

“그럼 된 거잖아. 당직 잘 서라. 가자, 서연아.”

김지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맞는 말이지만, 같이 고생하는 동기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프를 가는 신현수를 보며 김지훈은 입맛만 다셨다.

“뭐야, 그럼 내가 틀린 말 했어?”

신현수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병원을 나서던 윤서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지훈을 자극하려고 신현수와 나왔는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현수야, 너 지훈이하고 무슨 일 있었어?”

“왜?”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해?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신현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이를 물었다. 머릿속은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들로 가득했다.

자신도 하지 못한 인투베이션을 하던 김지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김지훈보다 더 뛰어나야 했다. 그런데 일반 외과를 함께 지원했다는 것까지 이상스럽게 신경이 쓰였다.

‘김지훈은 내 상대가 아니야.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최선을 다하는 한 그깟 인투베이션 좀 먼저 했다고 날 이기진 못해.’

윤서연이 신현수를 툭툭 쳤다.

“왜 그러냐니까?”

“윤서연, 지금 술 먹으러 가는 자리다. 쓸데없는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냉랭한 말투에 유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현수가 지훈이를 라이벌로 생각하는구나. 현수 넌 완벽하지만 차가워. 난 속까지 차가운 사람은 싫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김지훈이 좋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인간성과 의사로서의 능력을 가졌다.

‘돈이 없으면 어때. 그런 건 우리 집이 알아서 하면 돼.’

윤서연이 갑자기 놀란 척을 했다.

“어머! 깜빡했다. 나 오늘 집에 일이 있어. 현수야, 미안해. 나중에 다시 보자. 갑수 형한테도 미안하다고 전해 줘.”

윤서연이 대답도 듣지 않고 종종걸음을 쳤다.

신현수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다.

김지훈을 단순히 뛰어난 동기 정도로 생각하고 싶었지만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자존심 문제였다.

순식간에 저녁 6시가 됐다.

점심을 못 먹어 꽤나 배가 고팠다. 하지만 환자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김지훈이 드레싱을 위해 속칭 도시락(간단한 드레싱 세트)을 들고 513호로 향했다.

이완실 환자가 딸인 김순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엄마, 고집 그만 부리고 한 숟갈만 먹어요. 그 선생님 우리 때문에 점심도 못 드셨는데, 저녁은 드셔야죠.”

이완실이 입을 꾹 다문 채 TV만 보았다.

그때 김지훈이 밝게 웃으며 들어섰다.

“할머니, 왜 안 드시고 계세요. 내가 꼭 먹여 드려야 되나?”

이완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TV에서 눈을 떼고 있었다. 김순자가 미안해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해요, 선생님.”

“그런 말씀 마세요. 할머니, 그럼 저녁 드실까요? 밥 반 공기에 문까지. 기억하시죠?”

이완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어린아이에게 하듯 67세 환자에게 밥을 떠먹였다.

약속대로 반 공기를 다 먹자 김지훈이 환자를 번쩍 들어 바닥에 내렸다. 그러고는 김순자와 함께 이완실의 손을 잡고 문으로 향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새 힘이 생길 리 없었지만, 원래 움직일 수 있었던 환자였다. 슬며시 문밖으로 이끌자 이완실이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이 손가락 2개를 폈다.

“잘 걸으시면서 왜 그래요. 두 발만 더.”

못 이기는 척하고 이완실이 문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문득 오래전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가 생각난 김지훈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이완실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서렸다.

“어, 할머니 웃으실 줄도 알아요? 난 못 웃으시는 줄 알았네. 다음에 올 때는 웃고 계셔야 돼요.”

“알았어.”

“그럼 치료 좀 할게요. 돌아누우시고.”

김순자가 도우려 하자 김지훈이 몰래 손을 들어 막았다.

이완실이 낑낑대며 혼자 몸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욕창을 치료한 김지훈이 등에 방석과 이불을 대 주었다.

“할머니, 엄청 잘 움직이시네요. 정말 잘하셨어요. 그럼 저 갈게요.”

“언제 또 와?”

“흐음! 그럼 8시쯤에 한 번만 더 운동하세요. 만일 할머니가 제 말 잘 들으면 이따 9시에 다시 올 거구요. 아니면 내일 아침에 와요. 어쩌면 안 올지도 몰라요.”

“알았어. 꼭 와.”

이렇게 약한 존재가 환자였던가?

주치의도 아닌 인턴인 김지훈이 단 하루 살갑게 대한 것으로 인해 이완실은 마음을 열고 있었다.

“알았어요. 제가 보고 있을 거예요.”

웃으며 나가려는 김지훈의 손에 이완실이 주스 한 캔을 쥐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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