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31화 (31/1,329)

제5화 아프니까 환자다 (1)

입술을 꼭 깨물며 김지훈을 노려보던 윤서연이 마치 보란 듯이 활짝 웃었다.

“좋아요. 갑수 형, 몇 시에 가요?”

정갑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오케이. 일 끝나는 대로 바로 가자. 저녁은 근사한 데서 내가 살게. 그럼 나도 지훈이한테 부탁 하나 하자.”

“부탁이요?”

“드레싱 하나 해 줘. 대상 포진 환잔데, 저녁 먹고 나서 바로 하면 돼. 알았지?”

김지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 외과에서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지 않고서는 이럴 수가 없었다.

“형이 하고 가야지,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해요.”

“야, 일석이 부탁은 잘만 들어주면서, 그깟 드레싱 하나 갖고 뭘 그래?”

“경우가 같아요? 솔직히 바쁜 과도 아니고, 당직도 없는 피부과 돌잖아요. 그리고 술 마시러 간다면서요. 이건 아니죠.”

정갑수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외과에서도 이러더니 정말 많이 컸네. 강남 가려면 일찍 가야 차가 안 밀려. 간만에 부탁하는 거니까 그냥 해, 인마. 우리 똑바로 하자.”

마치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정갑수가 김지훈의 대답도 듣지 않고 신현수와 저녁 얘기를 하며 실실 웃었다. 선배라고 해도 지금은 인턴 동기다.

김지훈이 인상을 확 구겼다.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릴 표정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손일석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인턴끼리라도 큰 소리가 나면 잘잘못을 떠나 결국 둘 다 욕을 먹는다. 정갑수야 상관없었지만, 김지훈에게는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서연아, 너 술 못 마시잖아?”

윤서연이 김지훈을 보며 대답을 했다.

“한번 먹어 보려고.”

“훨씬 센 술인데, 그러다가 큰일 난다.”

정갑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소주가 발렌타인하고 비교나 되냐? 하긴 먹어 봤어야 맛을 알지. 현수야, 서연아,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병동을 나서는 정갑수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간 응급실과 일반 외과에서 대신해 준 일이 얼마인지 일일이 기억하기도 힘들었다. 미안해하며 부탁을 해도 부족한데, 하는 행동이나 말투가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손일석이 아니었으면 벌써 폭발했을 것이다.

‘이번에도 넘어가면 한도 끝도 없이 저럴 인간이다.’

입술을 질근질근 씹던 김지훈이 정갑수가 사라진 계단으로 향했다. 손일석이 가운을 잡으며 말렸다. 김지훈이 뿌리치려는 순간, 병동 간호사가 다급하게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선생님, 5층에 드레싱 있대요.”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12시 45분이 넘었다.

아차 싶었다. 오전에 반드시 해야 할 드레싱을 잊은 것이다. 더구나 1시부터는 환자들이 식사를 한다. 가뜩이나 식욕이 없는 환자들 앞에서 처치를 할 수는 없었다.

“씨펄! 정갑수, 운 좋은 날이네.”

김지훈이 성질을 내며 5층으로 향하자 손일석이 따라왔다.

“일석아, 넌 복사하러 나가야 한다며.”

여전히 화가 난 목소리였다.

“밥은 먹고 일해야지. 지훈아, 잘 참았어. 정갑수하고 싸워 봐야 너만 손해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저걸 그냥 두고 봐. 나 참! 내가 술 마시는 사람 일까지 해 줘야 되냐? 발렌타인이 뭐 어째? 소주 먹는 놈들은 병신이냐.”

아직도 화를 못 참겠는지 김지훈이 씩씩거렸다.

“당연히 소주 못 먹는 게 병신이지. 악어와의 일도 있는데 또 큰 소리 나면 너도 좋을 게 없어. 참아, 인마. 아니면 드레싱을 해 주지 말든지. 대신 내일 정갑수가 지랄하면 그냥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겠어. 저렇게 일하는데 나중에 환자나 제대로 볼지 모르겠다.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지.”

“다운 3번 당했지, 일 저따위로 하지. 전공의가 되겠냐? 어떤 과를 지원해도 100프로 떨어진다.”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100프로.”

해서는 안 될 악담이었지만, 생각만으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갑수가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환자를 위해서도 그게 좋은 일이었다.

“일석아, 그런데 발렌타인 비싼 술 아니야?”

“엄청 비싸지. 공들여 작업한 언니들 하고도 못 먹는 술이야, 인마.”

“술 못 먹는 현수나 서연이가 먹는 걸 보면 비싼 만큼 좋은 술인가 보네. 그래도 난 양주는 영 아니던데.”

손일석이 혀를 찼다.

“지훈아, 캡틴 큐나 나폴레옹하고 발렌타인을 비교하면 어떡하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했다가는 개망신당해.”

“아이고! 그런 당신은 먹어 보셨나요?”

김지훈의 말에 손일석이 입맛을 다셨다.

“나도 사실은 골뱅이에 소주가 제일 낫더라. 개운하잖아.”

“나랑 먹으니까 그렇지, 인마.”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딴 놈하고 먹으면 확실히 맛이 떨어져. 그치?”

시답잖은 소리 덕인지 다소 마음이 풀렸다.

김지훈이 일어나자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훈아, 너 손에 든 거 뭐야?”

“이거, 니들 홀더(needle holder:봉합 시 바늘을 잡는 기구).”

“그걸 왜 들고 다녀?”

“손에 익히려고. 그래야 수처라도 잘할 거 아냐.”

“어이쿠! 천상 외과 의사시네요. 열심히 하세요.”

김지훈이 웃으며 5층 간호사가 건넨 드레싱 세트를 들고 병실로 향했다. 속칭 도시락(간단한 드레싱 세트를 칭하는 은어)을 들고 사라지는 김지훈을 보던 간호사들이 수군거렸다.

“김지훈 선생님, 일을 참 잘하세요. 그동안 큰 소리 한 번 안 났잖아요.”

“아직 일주일도 안 됐다. 여기까지 버틴 인턴 선생님들은 제법 있었으니까 입방정 떨지 마. 다들 잘한다는 말 나오기가 무섭게 깨지더라. 괜히 우리만 고생해.”

5층 병동 수간호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요. 근데 지금 드레싱하는 환자 때문에 큰일이에요. 그렇게 움직이라고 말해도 꼼짝을 안 하네요.”

“그러니까 욕창이 생겼지. 우리하고 딸이 그렇게 신경을 쓰는데도 엄마가 돼서 그걸 몰라. 하여간 513호 환자들은 다들 왜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네.”

“맞아요. 비지에이 한번 할 때마다 난리가 난다니까요. 그나마 김지훈 선생님이 하시면 조용해서 다행이죠.”

환자들에 대한 불평을 터뜨리던 간호사들도 이내 자신들의 일에 열중했다.

513호. 67세 만성 B형 간염 환자, 이완실.

오랜 투병 생활 탓인지 환자의 혈색이 좋지 못했다.

김지훈이 드레싱을 위해 병실에 들어서자 보호자인 딸이 급히 일어났다. 완연히 지친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치료하러 왔어요.”

환자가 힐끗 눈길만 주었다.

딸과 함께 환자를 옆으로 누였다.

엉덩이 한가운데 500원짜리 동전만 한 욕창이 보였다.

처음 봤을 때보다 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의 얼굴과 딸의 지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왜 의사가 됐고, 인턴은 무엇 때문에 돌고 있을까?

일을 해 돈을 벌고, 일반 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해?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전에 인턴은 의사다. 의사는 환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직업이다. 거창하게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찾지 않더라도 환자를 잊은 의사는 의사가 아니다.

문득 지난 며칠간 환자들에게 단 한 마디도 안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간염에 대한 설명은 주치의의 몫이지만, 욕창 치료는 분명 자신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레싱도 1년차가 했을 것이다. 바빴다는 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이 고통일 수는 없었다. 아프고 힘든 환자를 둔 가족들은 모두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잊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너무 미안했다.

욕창 치료를 마친 김지훈이 간이 침상에 앉았다.

딱딱했다. 입원 날수를 보니 벌써 세 달째였다. 환자의 딸은 그 긴 시간을 이렇게 불편하고 딱딱한 간이 침상에서 보냈을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내 아픔만 생각했다. 정작 환자와 가족들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쁜 놈, 이러려고 의사가 된 것이 아니잖아.’

김지훈이 딸에게 물었다.

“따님 되시죠?”

“네.”

“어머님이 못 움직이시나요?”

“아니요, 원래 잘 움직이셨어요. 그런데 너무 지치셨는지 이번에 입원하셔서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안 하시네요. 간염으로 몸도 약하신데, 욕창 때문에 큰일 나시는 건 아니죠?”

딸이 눈가를 닦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는 환자에게서 발생하는 욕창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근육 층까지 손상되기에 감염이 되면 패혈증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상처의 치료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근본적인 치료는 환자가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었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며 환자를 보았다.

“할머니, 제 손 한번 꽉 잡아 보실래요.”

환자가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아직은 힘이 있었다.

“힘이 세시네요. 할머니, 그럼 다리도 움직여 보세요.”

환자가 누운 채로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충분히 걸을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 몸이 힘들어 욕창이 생긴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고 의욕을 잃은 탓이었다.

“제 말은 하나도 안 들으시는데, 의사 선생님 말은 그래도 들으시네요. 엄마, 주치의 선생님이 일어나 앉아 있고, 걸으라고 하셨잖아요. 지금처럼 말 좀 들으세요.”

“이젠 힘들어.”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환자들의 점심 식사가 들어왔다.

8인실이 부산해졌다. 하지만 대부분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탓에 환자들 모두 몇 숟갈 뜨다 말았다. 욕창 환자는 아예 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할머니, 왜 안 드세요.”

“먹고 싶지 않아.”

간염 환자에겐 충분한 영양 섭취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침대에만 누워 있다 보니 그마나 있던 식욕까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욕창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위험할 것이다.

김지훈이 침대 끝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침대를 반쯤 세웠다.

“할머니, 한 숟갈만 드세요.”

“싫어.”

“그러시면 안 되죠. 드셔야 됩니다.”

환자가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지 않자 딸이 수저에 밥을 조금 퍼 입에 갖다 댔다. 그러나 환자는 도리질을 하며 입도 벌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

김지훈이 안타까운 눈으로 환자를 보다 가운을 벗었다.

“할머니, 드시기 싫어도 드셔야 돼요. 그래야 욕창도 낫고, 퇴원도 하시죠. 제가 먹여 드릴게요.”

밥 한 숟갈을 떴다.

환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이 웃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냄새 좋네. 할머니가 드셔야 저도 점심을 먹죠. 배고파 죽겠네. 이러다 점심시간 다 지나요. 절 봐서라도 딱 한 숟갈만 드세요.”

환자가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김지훈이 수저를 내밀자 딸이 재빨리 반찬을 올렸다.

한 숟갈을 삼키는 데 꽤나 오래 걸렸다.

“잘 드시네. 이러면서 왜 안 드셨어요. 자! 한 숟갈 더.”

“한 번만 먹으라며.”

“할머니, 그거 갖고 되겠어요? 한 숟갈만 더요. 가만 보니까 할머니 예전에는 꽤 미인이셨나 봐요. 살만 붙으시면 할아버지들이 줄줄 따라오겠어요.”

한 번 시작하자 넉살이 줄줄 흘러나왔다.

김지훈이 애교까지 부리자 환자가 다시 한 숟갈을 입에 넣었다. 역시 오물오물 한참을 씹고서야 넘겼다. 김지훈이 물 컵을 들었다.

“체하시겠다. 자! 물 한 모금 드시고.”

“아이구! 우리 엄마 살겠네. 이렇게 잘 드시면서 왜 안 드셨어요.”

환자의 딸이 눈가를 붉히며 좋아했다.

딸의 말은 안 들어도 의사인 자신의 말은 들었다.

그게 더 김지훈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근 30분이 넘게 반 공기를 간신히 먹은 환자가 손을 저었다. 이마저도 많았는지 환자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곡기를 끊었던 것일까?

내친걸음이었다.

“할머니, 사람이 먹었으면 소화를 시켜야죠. 운동 좀 하실까요?”

환자가 깜짝 놀랐다.

“싫어.”

“뭐가 싫어요. 밥을 그렇게 드시고 안 움직이시면 소화 안 돼서 또 고생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김지훈이 환자를 번쩍 들어 간이 침상에 앉혔다.

너무 가벼웠다. 마음이 아픈 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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