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분위기가 묘하다 (1)
잠시 후, 진료실 앞에 선 김지훈이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과장 금경태.
일반 외과 최고의 실력자다.
둥글둥글한 얼굴에 넉넉한 인상을 가졌지만, 야심이 무척 많은 의사였다. 가느다란 눈매가 날카롭게 반짝였다.
이혁민 교수가 지원자들을 소개했다.
“과장님, 올해 우리 과를 지원한 인턴 선생들입니다. 이제 4월인데 벌써 3명이나 왔습니다. 다들 학교 성적도 좋고, 인턴으로서 업무도 잘한다는 평이 많습니다.”
“오! 그래, 다들 앉지.”
이혁민 교수를 따라 줄줄이 소파에 앉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김지훈이나 손일석과는 달리 신현수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처럼 보였다.
“신현수 선생은 잘 알고, 다른 인턴 선생들은 이름이 어떻게 되나?”
“김지훈입니다.”
“손일석입니다.”
“일찍 지원한 만큼 우리 과가 하고 싶단 말이겠지. 다들 열심히 해서 내년에 다시 볼 수 있도록 하자. 신현수 선생.”
“예, 과장님.”
“이사장님과 총장님은 잘 계시지?”
“저도 요새는 잘 못 뵀습니다.”
“그렇겠구나. 인턴도 열심히 돌면 꽤 바쁘지.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고?”
“예, 다들 잘해 주십니다.”
신현수의 말에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과는 언제 돌지?”
“다음 달에 구미에서 돕니다.”
“구미에서? 이 교수.”
“예, 과장님.”
“구미에 연락해서 잘 좀 가르치라고 해. 아니다, 내가 직접 전화하는 게 낫겠어. 신현수 선생은 학교 성적도 좋고, 일 잘한다는 소리는 나도 들었으니까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만 해.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럼 다들 나가 봐. 이 교수는 남고.”
금경태 과장은 김지훈이나 손일석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신현수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가 보겠습니다, 과장님.”
힐끗 김지훈을 본 신현수가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저 새끼, 오늘 뭔 일 있나? 왜 저렇게 쌀쌀맞아? 그건 그렇고 지훈아, 내 말이 맞지? 우리에게는 아예 관심도 주지 않잖아. 아무리 신현수 백이 좋다지만, 과장님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너나 나나 별 볼 일 없나 보다.”
손일석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아버지가 총장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인마.”
“얼씨구! 성인군자 하나 났네.”
“가서 일이나 해. 나 먼저 올라갈게.”
김지훈이 계단을 따라 오르며 눈에 힘을 줬다.
‘아무리 아버지가 총장이라고 해도 꿀릴 거 없어. 이 정도에 내 꿈을 포기할 거면 졸업도 못 했다. 이놈의 세상, 덤빌 테면 또 덤벼 봐. 멋지게 붙어 주마. 집안이 좋다고 최고의 써전이 되는 건 아니잖아. 반드시 내 꿈을 이루고 만다.’
약간은 어두웠던 김지훈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최고의 써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믿었다. 경쟁자가 있다면 도리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단 한 마디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갑자기 계단을 급하게 뛰어 내려갔다.
“일석아.”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가던 손일석이 돌아섰다.
김지훈이 씨익 웃자 손일석이 주먹을 힘차게 흔들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혁민 교수를 보며 물었다.
“내년에 티오가 어떻게 되지?”
“올해하고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킴(현역) 4명에 난킴(예비역) 4명입니다.”
“신현수 선생은 난킴이니까 상관없고. 정갑수 알지? 우리 과 지원할지도 모르니까, 인턴 성적 잘 좀 챙겨 줘. 나중에 문제 안 생기게.”
이혁민 교수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모르나? 지금 우리 과 돌잖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성적이야 공정하게…….”
금경태 과장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이혁민 선생, 진료 부장 해야지. 그래야 과장도 하고, 병원장도 노려 볼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정갑수의 아버지가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보사부(보건 사회부:보건 복지부의 전신) 고위직에 있어. 내가 공연히 챙기는 줄 알아?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쯧!”
금경태 과장이 혀를 차자 이혁민 교수의 표정이 굳었다.
사람인 이상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칙과 능력에 따라 보직을 맡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정갑수에 대한 문제는 신중해야 했다.
모자란 능력이야 키우면 된다. 하지만 환자에게 열과 성을 다하지 않는 의사는 의사로서 자격이 없다. 지난 두 달간 기본도 숙지하지 못했다면 이는 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과장님, 나중에 잡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말하는 거 아닌가. 자네도 생각 좀 해. 욕심을 가지라구. 내가 응급실 부장까지 밀어줬는데, 진료부장 자리를 임동완 교수한테 뺏기면 내 체면이 뭐가 되나? 우리 파트 스태프로 뽑은 보람이 있어야지.”
금경태 과장의 핀잔에 이혁민 교수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의사 사회 역시 연줄과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정갑수가 일반 외과를 지원하지도 않았는데, 굳이 과장과 논쟁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말씀 끝나셨으면 가 보겠습니다.”
진료실로 돌아온 이혁민 교수가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앞으로 정갑수가 크게 변하지 않는 한 정말 아닌데.’
일반 외과는 대개 세 파트로 나뉜다.
위장 파트.
간담도 파트.
대장 항문 파트.
각각의 파트 모두 중요도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의 야심으로 파트가 뒤틀렸다. 간담도 전공인 금경태 과장은 위장 파트를 맡았던 전임 과장이 퇴직하자마자 2개의 파트를 하나로 만들었다.
당시 이혁민 교수는 전임 과장 밑에서 위장 파트를 이끌었다. 외과 의사로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행정 쪽으로는 힘이 없었던 까닭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 병원 역시 실적을 중요시 여겼고, 실적은 곧 수입이었다.
야심만만한 금경태 과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실적을 올리고 싶어 했다.
답은 파트를 합쳐서라도 자신의 환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단번에 환자가 2배로 늘자 당연히 금경태 과장의 실적이 대단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지만, 뜻밖에 재단도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금경태 과장의 정치력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때 환자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이혁민 교수의 신념이 일부 무너졌다. 사안만 달랐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휴우!”
이혁민 교수가 한숨만 내쉬었다.
‘구미에 직접 전화를 하신다고?’
신현수가 아무리 재단 이사장의 손자라지만, 이제 인턴인 의사를 두고 할 행동이 아니었다.
정갑수의 아버지가 얼마나 높은 직에 있는지 모르지만, 역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긴 복지부가 병원의 목줄을 잡고 있으니 대단한 연줄일 수도 있었다.
‘아직은 다들 인턴이라 너무 성급하게 판단할 때는 아니지만 올해는 시작부터 좋지 않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혁민 교수가 병동으로 올라갔다.
오후 회진을 끝낸 후 송동하와 함께 의국으로 들어갔다.
“송동하 선생, 점심 먹으러 가자.”
“점심이요?”
“응, 유석재하고 김지훈이 불러라.”
잠시 후, 김지훈과 유석재가 들어오자 대뜸 물었다.
“김지훈 선생, 점심 뭐 먹을래?”
“예?”
“전에 맛있는 거 산다고 했잖아. 오늘이 마지막 근무 아닌가? 니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김지훈이 송동하와 유석재를 보았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 놓고 말하라는 눈짓을 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전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래. 그럼 니 냉면 좋아하나. 요새 날씨가 이상해. 밤에는 추워도 낮에는 더워서 냉면 생각이 나네.”
“예, 저 냉면 정말 좋아합니다.”
안 그래도 허구한 날 구내식당 밥 아니면 찌개만 먹었다.
냉면 생각을 하니 갑자기 군침이 돌았다.
이혁민 교수를 따라 냉면집으로 갔다.
“이런 맛에 일한다니까.”
유석재가 소곤거렸다.
냉면 네 그릇이 나왔다.
김지훈이 단 세 젓가락만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잘 먹네. 배부를 때까지 양껏 먹어라. 아주머니, 여기 사리 4개 더 주세요.”
사리 4개가 김지훈과 유석재의 입으로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그러고도 입맛을 다시자 이혁민 교수가 웃었다.
“니들 제법 많이 먹네. 열심히 일하면 배가 꽤 고프지.”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다.
인턴도 열심히 일하면 꽤 바쁘지?
과장이 했던 말이었다.
“몇 개나 더 먹을래?”
유석재가 머리를 긁적이며 손가락 2개를 폈다.
“김지훈이 니는?”
냉면 사리 2개 추가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 4개요.”
이혁민 교수가 깜짝 놀랐다.
“4개? 그러면 일곱 그릇이다. 니 정말 그걸 다 먹을 수 있나?”
“예.”
김지훈이 힘차게 대답하자 웃음이 터졌다.
유석재가 사리 2개를 먹는 사이 그는 4개를 해치웠다.
이제야 배가 좀 찼는지 김지훈이 젓가락을 놓았다.
“이제 배가 부르나?”
“예, 배부릅니다.”
‘이 집은 양이 적네. 솔직히 두세 개는 더 먹겠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앉은 자리에서 냉면 아홉 그릇을 먹을 수는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말했다.
“김지훈 선생, 외과는 말이다. 기본이 아주 중요하다. 무엇을 알아야 할지는 알려 줬으니까 공부 열심히 하고, 지금부터는 손도 연습해라.”
“손이요?”
“손이 느리면 외과 의사로서 자격이 없다. 우리 과 수술은 봐서 알겠지만, 기구를 거의 쓰지 않아. 타이와 수처가 기본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알겠나?”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겨울에 보자.”
이혁민 교수가 계산을 하며 크게 웃었다.
“4명이 와서 냉면 열네 그릇을 먹었네. 점심 또 한 번 샀다가는 집 팔아야겠다. 하하하!”
냉면 집을 나서던 김지훈이 딴청을 피웠다.
***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일반 외과 근무가 끝났다.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다음 근무지인 내과를 준비했다.
모든 의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과였지만, 김지훈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일반 외과를 선택한 이상 지금처럼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했다.
김지훈이 고민에 잠겼다.
진정한 의사건, 최고의 외과 의사건 간에 일단 제대로 된 일반 외과 의사가 되는 것이 먼저였다.
일반 외과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가장 먼저 수술을 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인턴이 수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마이너 수술이라지만, 1st를 선 것만 해도 입에 오르내릴 일이었다.
‘지금은 이혁민 선생님 말씀대로 기본 중의 기본인 수처와 타이 연습에 집중하자. 내과는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뭔가 해결책이 떠올랐는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엇이 필요할까?
일반 외과 질환에 대한 지식이었다. 흔히 간단한 수술로 생각하는 급성 충수염도 수술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
‘맞아, 뭘 알아야 수술도 하지. 공부를 따로 할 시간은 없고… 아! 마침 잘됐네. 내과에서 소화기 파트를 돌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어후! 근데 무지하게 힘들다던데, 거길 또 어떻게 도나.’
내과 역시 인턴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선배들이 문제가 아니라 엄청난 업무량 때문이었다. 특히 소화기 파트는 환자까지 많아 다들 기피하는 파트였다. 하지만 일반 외과 질환의 대부분이 소화기 질환과 관련이 있었다.
결코 피할 파트가 아니었다. 도리어 좋은 기회로 만들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돌연 콧김을 내뿜으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힘들면 어때. 어영부영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지. 지금은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할 때야. 이렇게 되면 소화기를 꼭 해야 한다는 말인데.’
내과는 워낙 환자가 많아 인턴도 3명이 배치됐다.
함께 근무할 동기는 신현수와 윤서연이었다.
‘설마 현수도 소화기를 한다고 하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