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기본을 모르면 깨지는 것이 당연하다 (1)
다음 날, 수술실 간호사들의 분위기가 묘했다.
평소 눈에 띄는 인턴이라고 해도 눈길조차 잘 주지 않던 간호사들이 김지훈을 볼 때마다 수군댔다.
“어제 이혁민 선생님이 저 선생님하고 둘이 수술을 했대.”
“둘이? 저 선생님 인턴이잖아”
“그러니까 놀랄 일이지.”
“어머머! 그러게, 혹시 친척이나 뭐 그런 사이 아닐까?”
“그건 모르지만, 정형외과 돌 때도 되게 잘했잖아. 응급실에서도 이거, 이거였댄다.”
간호사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땠는데?”
“1년차 뺨치게 일을 잘했대. 너, 신현수 선생님 알지?”
“이사장님 손자?”
“그래, 그 선생님도 무지 엑설런트하잖아. 그런데 응급실 돌 때 저 선생님 아니었으면 사고 낼 뻔했다고 그러더라.”
“무슨 사고?”
“심근 경색 환자가 있었는데, 조금만 늦었으면 거의 죽을 뻔했대. 인투베이션이 잘 안 됐대나 어쨌대나. 그때 저 선생님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고 바로 해결했다고 그러더라. 환자도 그 덕에 살았다고 하고.”
“그래? 이제 4월인데 인턴 선생님이 대단하네.”
인턴이 1st를 섰다는 사실에 수술실 간호사들의 관심이 김지훈에게 집중됐다. 지난 일들에 관한 말까지 돌았다.
수술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뒤통수가 따가운지 김지훈이 두리번거렸다
‘오늘 분위기 왜 이래? 등에 뭐가 묻었나?’
김지훈이 수술복을 확인하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일과가 모두 끝났다.
시계가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의국 문을 두드렸다.
4년차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김지훈입니다. 일반 외과에 지원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제각기 일을 하던 4년차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송동하는 말이 없었고, 다른 4년차들이 호기심을 보였다.
“4월인데, 너무 일찍 하는 거 아니냐?”
“아닙니다, 확실히 결정했습니다.”
“네가 지원한다고 무조건 뽑히는 거 아니다. 학생 때 성적도 중요하고, 인턴도 열심히 돌아야 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았어, 가 봐. 일 열심히 하고.”
잔뜩 긴장한 김지훈과는 달리 4년차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해마다 벌어지는 일이 올해는 조금 일찍 벌어졌다는 표정이었다.
김지훈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의국을 나섰다.
몇 마디뿐이었고, 4년차들이 결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일반 외과를 향한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마치 큰일을 치루고 난 후처럼 긴장이 가시질 앉았다.
4년차들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동하야, 우리 과 돌면서 리포트 받은 것도 그렇고, 쟤가 마이크로 퍼포(미세 천공)까지 발견했지? 수술할 때 보면 1년차보다 눈을 더 크게 뜨는 놈이잖아. 확실히 한 놈은 제대로 건졌어.”
“이혁민 교수님이 괜히 찍었겠어? 어제는 퍼스트를 다 세우시더라.”
4년차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수술이었는데?”
“함몰 유두.”
“야아! 요새 브레스트(유방) 수술에 부쩍 신경을 쓰시던데, 퍼스트를 세우셨다고? 대단하네. 아주 단단히 찍으셨네.”
송동하가 턱을 만지며 물었다.
“저 정도면 과장님 파트를 돌고도 남겠지?”
“인턴 한두 명 봤어? 저런 놈 보기 힘들다.”
“그렇긴 한데, 오늘 얼핏 들었는데 신현수가 우리 과 할 거라는 소리가 있어.”
“신현수? 총장님 아들 말하는 거냐?”
“응. 걔도 이번에 인턴이잖아.”
“그래? 일은 잘한대?”
“평판은 좋아. 응급실 돌면서 이혁민 선생님께 리포트도 받았고.”
“진짜 빵빵한 놈은 따로 있었네. 신현수가 우리 과 들어오면 과장님이 누굴 선택하겠냐. 실력이 없어도 그럴 판인데, 평판까지 좋으면 게임 끝이다. 백도 실력이잖아. 내년에는 1년차들 여러모로 만만치 않겠어.”
‘자기 일만 확실하게 한다고 전체 일이 잘 돌아가는 것은 아닌데. 신현수도 인턴을 마칠 때쯤이면 잘 알겠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송동하의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아직은 자신의 미래도 불확실했다. 올해 전문의를 따고 내년에 펠로우(Fellow:임상 전임 강사)로 병원에 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할 때였다.
숙소로 돌아온 김지훈이 전화기를 앞에 두고 고민을 했다.
‘일반 외과에 지원했다고 전화할까? 아니지, 이제 만났는데 그런 것까지 얘기하면 이상하잖아. 어후! 요새 내가 왜 이러지.’
친구도 많고, 후배들과도 자주 만났다.
하지만 그들이 채워 주지 못하는 외로움이 있었다.
가족이란 품이 언제나 그립기만 했다.
그 탓일까?
자꾸만 고경아 생각이 났다.
한숨만 푹푹 쉬던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낯익은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렸다.
“손일석,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임상 병리를 돈 이후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손일석은 숙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근 보름 만에 처음 봤다.
손일석이 피곤한 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놀다 놀다 지치긴 이번이 처음이다.”
“뭘 하고 놀았길래.”
“강남 좋더라. 이태원도 좋고, 호텔 나이트도 좋고. 물이 좋아도 너무 좋아. 그 덕에 월급 받은 거 다 썼다.”
“두 달 월급을 다?”
“그래도 부족해. 돈이 너무 드는 게 흠이긴 하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어.”
“투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너, 그러다 병 걸려, 자식아. 온 병원에 소문이 쫙 퍼지면 꼴좋겠다.”
“다 방비를 하지, 인마. 그리고 좀 새면 어떠냐. 비뇨기과 가서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되지.”
“야, 창피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손일석의 눈이 쫙 찢어졌다.
“그 정도 각오도 없으면 환락의 세계와는 영영 안녕이야. 너, 인마, 불타는 이 청춘을 병원에서 썩히는 게 아깝지도 않냐? 그러니 여자 하나 없지.”
‘없긴 왜 없어. 이 자식이 날 완전히 무시하네.’
입을 열려던 김지훈이 멈칫했다.
하마터면 있다고 할 뻔했다. 손일석이라면 아마도 며칠 내에 상대가 누구인지까지 알아낼 것이다. 병원에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리낄 것은 없었지만, 이제 만났는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고경아의 입장이 난처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나, 일반 외과 지원했다.”
“남은 날도 많은데 뭘 벌써 지원을 해. 천천히 하지. 뭐, 일반 외과? 너, 지금 일반 외과라고 했어?”
심드렁하게 말을 하던 손일석이 갑자기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일반 외과 지원한 거야?”
“그래.”
“신현수는 어쩌고. 너, 교수 안 할 거야?”
“겁난다고 피해? 일단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야.”
“그걸 꼭 대봐야 아냐? 이런 일은 그냥 봐도 알아. 자식이,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결국 사고를 쳤네. 일반 외과가 그렇게 하고 싶냐?”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지훈이라면 어느 과를 지원해도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만 열심히 하면 교수가 될 가능성도 많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확률이 떨어지는 과에 지원한 것이다.
신현수는 누가 보아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성격이 다소 차갑다는 것 이외에는 흠도 찾기 어려웠다.
김지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내가 바라던 의사가 일반 외과에 있었어. 난 최고의 써전(surgeon:외과 의사)이 되고 싶어.”
손일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건 나도 알지. 전문의만 따는 거면 걱정할 일이 뭐가 있겠냐. 하지만 네 꿈은 그게 끝이 아니잖아. 난 그게 걱정돼.”
손일석의 마음이 고마웠다.
평소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지만, 속은 결코 그렇지 않은 친구였다. 마음이 편해졌다.
“두고 봐, 인마. 현수만 교수 되라는 법 있어?”
“맞아, 너도 할 수 있지.”
김지훈이 웃으며 손일석에게 헤드락을 걸고는 장난스럽게 마구 흔들었다.
“야! 손일석답지 않게 너무 진지한 거 아냐?”
손일석이 캑캑거렸다.
“숨 막혀, 이 자식아. 아이고! 인턴의 패기냐. 하긴, 악어한테 덤빌 때 너도 좀 똘기가 있구나 싶었다.”
“재수 없게, 악어는.”
“누가 말리겠어. 나쁜 일도 아니고, 열심히 해 봐라. 나중에 내 탓하지 말고.”
“네 탓을 왜 해?”
“그때 왜 안 말렸냐고 할까 봐 그런다, 왜?”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이런 놈을 친구라고 믿고 살았으니 내가 미친놈이지.”
김지훈이 투덜거리자 손일석이 헤 웃었다.
“자식이, 뭐 이런 일로 삐져. 김지훈, 너답지 않다. 어쨌든 내 정보망으로는 네가 전공의 지원 1호야. 이런 날 술이 빠질 수가 없지. 너, 오늘 오프냐?”
“응.”
“그럼 우리 딱 한 병씩만 하고 들어오자.”
“돈 없다며?”
“없지. 당연히 빈털터리지. 하지만 내 유일한 친구, 김지훈이 있잖아.”
“에라, 이 자식아. 재미는 혼자 다 보고 이럴 땐 유일한 친구냐?”
“같이 가자고 해도 안 갈 놈이.”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며 일어섰다.
어느새 잠바를 걸치고 나오자 손일석이 어깨동무를 했다.
“친구야, 너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살았을까.”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자. 골뱅이에 딱 한 병이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그래, 딱 한 병만.”
밤이 늦었다.
슬쩍 눈치를 본 김지훈과 손일석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땡!
본관 7층에서 멈췄다.
순간 싸한 느낌이 다가왔다.
“인턴 새끼들이 계단 놔두고 엘리베이터를 타? 싸가지 없는 새끼들.”
정말 악어와는 악연이었다.
1층으로 내려가는 내내 악어의 욕을 들어야 했다.
“시펄 놈, 엘리베이터 한 번 탄 거 가지고 생난리를 치냐.”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인턴 때 엘리베이터 탔다가 죽도록 맞았을지도 몰라. 쪽팔려서 말은 못 하고 애먼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거 아닐까?”
“선배한테는 허리가 90도로 꺾어지는데 누가 악어를 때렸겠냐. 그래도 그럴듯한데, 정말 맞았을까?”
“에휴! 그냥 내 생각이야. 괜히 동네방네 떠들지 마라. 그나저나 누가 악어 좀 시원하게 패 줬으면 좋겠다.”
“나도.”
병원 정문을 나설 때까지 투덜거리며 악어 욕을 했다.
정말 상대방의 성격까지 버리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악어였다.
공중전화 박스가 보였다.
그리운 이들이 생각났다.
가족이 있었다면 자신의 결정을 제일 먼저 알렸을 것이다.
‘전화할까?’
김지훈이 잠시 고민을 했다.
“일석아, 먼저 가 있어.”
“왜?”
“전화 좀 하려고.”
“누구한테?”
“있어, 인마.”
손일석이 뭔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김지훈이 눈을 부라리자 깜짝 놀라는 척하며 포장마차로 향했다.
김지훈이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예요. 자주 전화 못 드려 죄송해요. 저 일반 외과 지원했어요. 잘했죠? 기뻐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요.”
(…….)
“저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요. 이제 처음 만났는데 자꾸 생각나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네요. 쭉 만났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일반 외과에 지원한 것도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그럴까요?”
뚜뚜뚜뚜뚜!
다이얼이 늦었다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김지훈이 물끄러미 손에 든 10원짜리 동전 2개를 보았다. 쩔그렁,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여보세요.)
“김지훈입니다.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고경아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김지훈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저… 별일은 아니고, 오늘 일반 외과에 지원했어요.”
(어머! 축하드려요.)
“축하요? 붙은 게 아니라 지원했다니까요.”
고경아가 맑게 웃었다.
(지훈 씨 같은 사람이 떨어지면 누가 붙겠어요.)
“고마워요.”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그 사람이야?)
아마도 동생일 것이다.
“동생하고 같이 있는 모양인데, 미안해요. 끊을게요.”
(전 괜찮아요. 피곤하실 텐데, 빨리 주무세요.)
“그래요, 잘 자요.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네. 참! 저녁 사 주신다는 약속 잊지 않으셨죠?)
“그럼요. 이번 주는 힘들 것 같고, 내과 돌 때 연락할게요. 그땐 맛있는 것 먹죠.”
(네, 그럼 들어가세요.)
왠지 아쉬운 마음에 김지훈이 전화를 끊지 못했다.
고경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훈 씨, 안 끊으세요?)
“먼저 끊어요.”
고경아가 또 웃었다.
(그럼 끊을게요.)
문득 가슴이 따뜻해진 김지훈이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