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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25화 (25/1,329)

제2화 멘토(mentor) (1)

종로 피맛골의 밤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대야만 한 냄비에 김치찌개가 나오자 고경아가 탄성을 질렀다.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경아 씨는 맥주 먹을래요?”

“아니요, 전 어차피 못 먹어요.”

“그래도 처음인데, 한 잔은 받아요. 건배.”

“건배.”

한 잔은 싹 비워졌지만, 한 잔은 그대로였다.

이러저런 말이 오갔다. 고향이 원주고, 지금은 병원 앞에서 동생과 자취를 한다고 했다. 타향살이와 자취에 익숙한 김지훈이었기에 말이 잘 통했다.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자 으레 직장인들이 그렇듯 김지훈도 병원 얘기를 꺼냈다. 수술실이 어쩌고, 일반 외과가 어쩌고 하던 중 우연히 악어 얘기가 나왔다.

“지훈 씨, 조심하셔야겠네요. 사실 그 선생님 좋아하는 간호사들 한 명도 없어요. 사람이 너무 막 행동해요. 키는 조그만데, 얼굴은 험상궂고. 정말 좋아할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쵸, 악어는 정말 심해요. 인턴들을 얼마나 괴롭힌다구요. 선배만 아니었으면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러진 마세요. 전에 한 번은, 실수도 아닌데 얼마나 화를 내던지 간호사 한 명이 운 적도 있다니까요. 들어 보니까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래요. 악어란 별명이 딱 어울려요.”

“맞아, 딱 어울려. 경아 씨, 내 말 좀 들어 봐요. 악어 그 인간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나도 정형외과 돌 때 말이에요.”

술안주로 가장 좋은 게 자리에 없는 사람 씹는 것이다.

더구나 고경아가 맞장구까지 쳐 주니 이만 한 안주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악어를 씹었다.

한참을 웃고 떠드는 사이 소주 2병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고경아 앞에 놓인 잔에 담긴 술뿐이었다.

‘정말 한 잔도 안 먹네. 이제 2병 마셨는데, 꽤 올라오네. 실수하기 전에 가야겠다.’

술이 오르면 남자는 수컷이 된다.

팔팔한 청춘이기에 더 그렇다.

호박이 수박으로 보이고, 치마만 두르면 다 여자다.

하물며 눈만 예쁜 것이 아니라 얼굴도, 마음씨도 예쁜 여자가 눈앞에 있다. 늑대로 돌변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흐릿하게 11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이 보였다.

“벌써 11시네요. 경아 씨랑 있으니까 시간이 너무 잘 가는데요.”

“어머! 늦었네요.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그럼 마지막 잔 비우고 갑시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잔을 홀짝 비웠다.

토요일 종로의 밤거리는 아직도 분주했다.

간신히 택시를 잡았다. 히터를 틀었는지 택시 안이 따뜻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연거푸 하품을 했다.

‘마지막 잔만 먹으면 취하네. 또 자면 안 되는데.’

마음과는 달리 고개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김지훈이 술과 잠에 취해 고경아에게 기댔다. 흠칫 놀란 고경아가 살며시 머리를 밀어냈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던 김지훈이 이내 다시 졸았다.

잠이 든 김지훈이 고경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슬며시 눈길을 준 고경아가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눈이 부셨다.

깜짝 놀라 일어난 김지훈이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숙소였다.

목을 돌리며 기지개를 편 김지훈이 눈을 껌뻑거렸다.

어제의 일이 가물가물했다.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 겨우 2병 먹고 이게 무슨 꼴이야.’

슬슬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시간도 넘게 늦었다. 재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슈퍼마리오를 보았다. 그나마도 상영 내내 잤다. 술자리는 즐거웠지만, 고경아는 한 잔도 안 먹었다. 어쩌면 혼자 웃고 떠들었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한 것이라고는 돈 5만 원을 쓴 것뿐이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첫 데이트를 이렇게 보내다니!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김지훈이 부르르 고개를 떨었다.

‘아후! 다시 만나기는 글렀네.’

터벅터벅 세면실로 들어가 물을 틀던 김지훈이 멍하니 손바닥을 보았다.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아!”

고경아의 전화번호였다.

김지훈이 갑자기 히죽히죽 웃었다.

전화번호를 준 이유가 뭘까?

최소한 다시 만날 용의가 있다는 말이었다.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불렀다.

“일단 해장부터 하고, 리포트를 써 볼까나.”

김지훈이 부리나케 구내식당으로 달려갔다.

어제 술 마신 걸 알았는지 마침 콩나물국이 나왔다.

고춧가루를 한 숟갈 듬뿍 넣어 시뻘게진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밥을 먹고 나자 술기운이 슬슬 사라졌다.

왠지 리포트를 쓰는 것까지 즐거웠다.

흥얼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다 썼다.

이혁민 교수의 말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 같았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김지훈이 전화기를 잡았다.

원내 전화지만, 0번을 누르면 시내 전화가 가능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김지훈이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신호 소리가 대여섯 번 더 울렸다.

‘어디 갔나?’

김지훈이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고경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집에 있었네요. 김지훈입니다.”

“어머! 지훈 씨, 무슨 일이세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죠? 제가 실수를 많이 해서 정말 미안해요.”

“주무신 것 빼고는 없어요.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술 조금만 드세요.”

고경아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혹시…….”

김지훈이 잠시 뜸을 들였다.

“말씀하세요.”

“혹시 다음 주에 시간 되시면 저녁 같이 먹을래요?”

“다음 주요? 주간 근무라 전 괜찮은데, 지훈 씨는 시간이 되시나요?”

“정 안 되면, 다음 텀이 내과니까 그때 만나죠.”

“좋아요. 시간 나실 때 미리 연락만 주세요.”

고경아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럼 약속한 겁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며 흔들었다.

앗싸!

고경아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람에 머릿결이 흩날렸다.

“언니, 그 사람 잠만 잤다며. 첫 데이트를 그렇게 하고도 또 만나?”

“그러게, 내가 왜 또 만날까?”

고경아가 탁자를 보았다.

공중전화기 위에 놓여 있었던 10원짜리 동전 2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 돌아왔다.

수술실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첫 수술을 준비하며 재수 없게도 악어와 마주쳤다.

“잘 지내냐? 곧 구미지? 기대하고 있다.”

김지훈이 고개만 살짝 숙이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선배가 아니라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악어가 콧김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저 인간도 6월에 구미로 내려가는 모양이네? 정형외과는 돌지도 않는데, 기대하긴 뭘 기대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악어를 보냐.’

수술실에 들어가자마자 잡쳤던 기분이 싹 풀렸다.

눈이 예쁜 간호사, 고경아가 있었다.

수술실 간호사에겐 상당히 숙련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초짜 간호사인 까닭에 고경아도 수술에 참여하지 못하고 잡일을 했다. 그래도 불만이 서린 눈빛은 보지 못했다.

‘경아 씨라고 일이 안 힘들고, 싫은 간호사가 없을까?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잖아. 악어는 무슨.’

문득 수술실에 활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술 부위를 드레싱하고 있는 송동하와 유석재.

마취를 준비하며 마취 기구들을 점검하는 김진호.

수술 도구를 가지런히 챙기고 있는 간호사.

모두들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혼자만 빈둥대고 있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부랴부랴 손을 씻고 수술 가운을 입었다.

연이은 수술 사이에 잠깐 짬이 났다.

김지훈이 송동하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유석재 선생님,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왜?”

“비장 수술한 환자 시티 때문에요.”

유석재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너, 아직도 리포트 못 썼어?”

“아니요. 다 썼는데, 시티는 방사선과에서 리딩(판독)을 직접 받으려구요. 리딩지만 읽어서는 잘 모르겠어요.”

“알았어, 빨리 갔다 와.”

“30분 안에 오면 되죠?”

고개를 끄덕이는 유석재를 보며 김지훈이 슬며시 수술실을 나왔다. 수술복 위에 가운만 걸치고, 병동에서 환자 시티를 찾아 부리나케 방사선과 판독실로 향했다.

판독실이 조용했다.

간간히 타자 치는 소리만 들렸다.

‘어느 선생님에게 말씀드려야 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는 사이 한 스태프가 김지훈을 알아보았다.

“첫 텀으로 응급실 돈 인턴 선생이구나? 이름이…….”

힐끗 가운에 적힌 이름을 본 스태프가 반갑게 불렀다.

“아! 김지훈이었지. 무슨 일이야?”

“시티 판독 받으러 왔습니다.”

“그래? 줘 봐.”

김지훈이 시티를 걸며 예전에 들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똑같이 노티를 해야 한다고 하셨지.’

“36세 된 남자 환자입니다. 교통사고로 인한 비장 파열로 비장 적출술 시행받은 지 이틀째입니다.”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수술을 받았어?”

“예, 토요일에 응급으로 수술했습니다.”

“이미 다 치료가 끝난 환자잖아. 오늘 필름 내리면 내일 중에 리딩지가 올라갈 텐데, 왜 직접 받으러 왔어? 합병증이라도 생겨서 새로 찍었나? 아니네, 수술 전 시티네.”

“예, 맞습니다.”

“그런데 왜?”

“비장 파열이 시티에서 어떻게 보이는지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야 수술 전에 어디를 어떻게 수술할지 결정할 수 있다고, 이혁민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스태프가 갑자기 묘하게 웃었다.

“김지훈 선생, 혹시 외과에서도 리포트 써?”

“예.”

“하하하! 이혁민 선생님도 대단하지만, 너도 대단하다. 1년에 한두 명은 응급실 돌면서 리포트를 쓰는 건 봤지만, 외과 돌면서 리포트 받는 인턴이 다 있었네.”

단순히 알고 싶어 왔다고 하면 나대는 꼴이 될 것 같아 솔직하게 이혁민 교수의 오더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더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스태프가 친절하게 시티에 대한 소견을 설명했다. 시티상 배 속에 고인 피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리고 비장 파열이 의심되는 부분이 어디인지 알려 줬다.

“여기, 보이지. 이 부분에서 비장 파열을 의심할 수 있는 소견이 보이네. 거의 다 잘렸는데, 이 정도면 환자가 꽤 위험했겠어.”

“예, 쇼크가 왔었습니다. 수술 때 보니까 2,000시시 이상 흘린 것 같았습니다.”

“1분에 비장을 통과하는 혈액의 양이 얼마였지?”

오래전에 배웠고,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미 리포트까지 썼다. 김지훈이 바로 대답을 했다.

“1분에 100리터 이상입니다.”

“그렇지? 그런 비장이 반 이상 파열됐는데 쇼크가 안 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수술은 잘됐고?”

“예. 주말에 중환자실에 있다가 오늘 아침 병동으로 옮겼습니다. 환자 상태는 스테이블(stable:안정적)합니다.”

“다행이네. 더 궁금한 건.”

“지금은 없지만, 있으면 다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바로 나한테 와.”

고개를 끄덕이며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린 스태프가 일어섰다.

잠시 후, 판독실에서 김지훈라는 이름이 들려왔다.

얼핏 대단하다는 말이 들렸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빨개질 일이었다.

월요일도 그렇게 지났다.

생각해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같은 날들이 아니었다. 각기 다른 질환을 가진 환자들은 언제나 새롭고도 어려운 대상이었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단 한 명의 환자도 제대로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새 하루가 후딱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분주한 하루가 지나갔다.

간간이 고경아의 예쁜 눈을 볼 때마다 김지훈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물론 고경아는 새침한 눈으로 지나쳤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직장이니까 이럴 수밖에 없겠지. 하긴 의사랑 간호사랑 데이트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서로 불편한 일이 많겠구나.’

그래도 약간은 아쉬웠다. 김지훈이 남몰래 방금 곁을 스쳐 지나간 고경아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때 이혁민 교수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다음 수술 환자를 기다리던 송동하가 다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아직 선생님 환자 수술 차례가 안 됐는데요.”

“안다. 내가 일이 좀 있어서 당겨야겠다.”

응급실 부장이긴 하지만, 이혁민 교수 정도의 레벨로는 수술 일정을 자의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과장 정도는 되고, 마취과도 납득할 만한 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도 파트 스태프의 오더다.

“알겠습니다. 마취과에 부탁을 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미리 양해를 다 구했다. 마침 빈방이 있어서 환자만 내리면 된다.”

“그럼 이삼 년차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수술은 대부분 1년차와 최고 연차가 담당한다.

이삼 년차는 주로 병동과 중환자실을 담당하고, 사람이 모자라거나 마이너 수술일 경우에 참여했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김지훈이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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