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4화 (24/1,329)

제1화 첫 데이트 (2)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가가 살짝 붉어졌던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송동하와 유석재가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바이탈부터 살폈다. 그리고 난 후 소변이 잘 나오는지, 수술 부위와 연결된 드레인을 타고 나오는 분비물은 이상이 없는지를 보았다.

정말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모든 과정이 환자의 목숨과 관련이 있었다.

‘수술실에서도 수술 전후에도 확인할 것이 이렇게 많았구나. 나도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고 싶다. 아니, 반드시 돼야 해.’

김지훈이 환자 처치에 집중했다.

“으으으! 여기가…….”

환자가 입을 열었을 때는 마치 자신이 살린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반 외과 의사들이 보여 준 능력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환자가 안정되며, 숨 가쁘고 급박했던 순간이 지났다.

흥분과 긴장 끝에 감도는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김지훈이 별생각 없이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이었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했다.

‘어, 벌써 이렇게 됐나? 늦었다, 큰일 났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김지훈을 본 유석재가 씨익 웃었다.

“송동하 선생님, 지훈이 약속 늦었겠는데요.”

“맞다, 너 약속 있다고 했지? 수술 때문에 늦은 건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왜 이래. 너, 혹시 여자 만나냐?”

김지훈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굳이 말을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급하겠다. 빨리 가라.”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숙소를 향해 광속으로 달렸다.

‘아무리 급해도 처음인데 이 꼴로 만날 수는 없지.’

늦었지만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준비를 마치고 나니 시침은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지훈이 허탈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첫 데이트 때 한 시간이나 기다려 주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정류장까지 가는 시간을 더하면 정말 절망적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가는 길에 파란색이 선명한 그랑블루 포스터가 보였다.

가쁜 숨에 한숨까지 겹쳐졌다.

길 건너의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막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빨간불이 들어왔다.

‘어후! 시간이란 시간은 다 뺏기네. 하긴, 지금까지 기다릴 리가 없지. 이놈의 돈은 뭐 하러 10만 원씩이나 찾았을까.’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리며 길 건너에 시선을 주었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정류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에 눈이 예쁜 간호사가 있을까?

곧 파란불이 들어왔다.

김지훈이 잠시 머뭇거렸다.

길을 건넜다가 허탕을 치면 꽤 심란할 것이다.

‘그래도 첫 약속이었는데, 약속 장소까지는 가자. 그래야 나중에 할 말이라도 있지.’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 김지훈이 횡단보도를 건넜다. 중간쯤 건넜을 때,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색 반코트에 하얀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약간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어깨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잘 어울렸다. 여인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혹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두 달 동안 보아 왔던 눈빛이 분명했다.

‘눈이 예쁜 간호사가 확실해. 설마 날 기다린 걸까?’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맞든 틀리든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김지훈입니다.”

“절 바로 알아보셨네요.”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시간도 넘게 늦었는데 타박을 하지 않았다.

눈만 예쁜 것이 아니었다.

‘얼굴도, 마음도 예쁘다!’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후에 갑자기 응급 수술이 떠서 제시간에 나오질 못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김지훈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약속 시간이 지나도 안 오시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 봤어요. 일반 외과 수술이 있다고 해서 대충 눈치를 챘어요. 아무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선생님도 수술 들어가셨는지 물어보진 않았으니까 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생각까지 깊어 보였다.

더욱 미안해진 김지훈이 급히 버스 정류장을 가리켰다.

“기다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늦긴 했지만, 영화 보러 가실까요?”

여인이 살짝 눈을 흘기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한 시간도 넘게 기다렸어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늘은 제가 풀코스로 대접을 하겠습니다.”

“생각해 볼게요.”

김지훈이 무안한 듯 머리를 넘기며 미안한 마음을 감췄다.

종로로 가는 버스가 금방 왔다.

마침 뒷자리가 비어 있어 함께 앉았다.

어깨에서 전해지는 감촉이 좋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고경아예요.”

이름도 예쁘다!

물론 김지훈의 생각일 뿐이었다.

“전 스물여섯인데, 경아 씨는…….”

“스물셋이요. 저도 선생님처럼 올해 들어왔어요.”

“그러시구나. 병원도 아닌데, 선생님이란 말은 좀 어색하네요. 편하게 부르세요.”

“그럼 지훈 씨라고 해도 될까요?”

“그럼요.”

학생 때였으면 서로를 오빠 동생으로 불렀을 것이다.

새삼 사회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영화를 볼지는 정하셨어요?”

“그랑블루 어때요? 영상미가 뛰어나다고 극찬을 하는 것 같던데. 재밌지 않을까요?”

“어머! 저도 그 영화 보고 싶었어요.”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크고 반짝이는 눈과 웃음이 정말 잘 어울렸다.

“잘됐네요. 그럼 도착하는 대로 영화표부터 끊죠.”

“저, 배고픈데 저녁도 사 주실 거죠?”

“그럼요, 당연하죠. 풀코스라고 했잖아요.”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스민 바람에 고경아의 생머리가 흩날렸다.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머리카락 향기도 되게 좋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종로에 도착했다.

파고다 공원 옆 단성사!

그랑블루!

연인들의 영화가 확실했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수많은 커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김지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이건 완벽한 선택이야.’

슬금슬금 줄이 짧아졌다.

드디어 매표구 앞에 섰다.

김지훈이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2장 주세요.”

“오늘 영화표는 전부 매진이에요.”

이제 5시 30분이었다.

영화 상영 시간도 두 번이나 더 남아 있었다.

“매진이요?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매진이에요?”

“오늘은 끝났으니까 내일 오세요.”

매표소 여직원이 매몰차게 창구를 닫았다.

난처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암표상까지 찾았다.

무슨 일인지 암표상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단속 중인가?

고경아도 무척이나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첫 데이트에 반드시 영화를 봐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영화만큼 큰 힘 들이지 않고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것도 없었다.

단성사와 바짝 붙어 있는 피카디리 극장이 보였다.

“경아 씨, 피카디리로 가 보죠.”

고경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피카디리 앞에 선 김지훈이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주인공이 김지훈을 보며 웃고 있었다. 빵떡모자에 담배 파이프까지 물었다.

너, 설마 슈퍼마리오?

게임기 오락 속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라니, 매진보다 더 난감한 일이었다. 게임에 미쳤다면 모를까, 여자들이 좋아할 취향의 영화가 절대 아니었다.

고경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슈퍼마리오? 이건 무슨 영화예요?”

“슈퍼마리오가 게임 이름인데, 그걸 영화로 만들었네요. 이거라도 볼까요?”

그냥 아쉬움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잠시 고민하던 고경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말 보실래요?”

“재미있으니까 극장에서 상영을 하겠죠.”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첫 데이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도 제일 좋은 자리가 남았다는 사실에 더욱 찜찜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진 않았다.

‘설마 대형 화면으로 오락하는 건 아니겠지. 최소한 영화로 만들었을 정도의 스토리는 있을 거야.’

김지훈이 표 2장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물었다. 상영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시간도 남았는데 저녁부터 먹죠. 뭐 먹을까요?”

“먹자골목 가요. 생선 구이 좋아하거든요.”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

대개의 여자들이 다 그렇지 않은가?

솔직히 의외였다.

‘생선 구이를 엄청 좋아하나? 어쨌든 나랑 식성이 비슷해서 좋긴 하네.’

“그럴까요? 나도 좋아하는데 잘됐네요. 배고파 죽겠네. 빨리 가죠.”

허기를 느낀 김지훈이 서둘렀다.

오늘도 점심을 못 먹었다.

첫 데이트가 주는 긴장감이 의외로 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골목에 들어서기도 전에 고소한 냄새가 났다. 주변이 연탄불에 구워진 생선에서 난 하얀 연기로 가득했다.

“경아 씨, 아는 데 있어요?”

“전에 두세 번 와 봤던 게 다예요.”

“그럼 사람 바글바글한 집으로 가죠. 그런 데가 제일 맛있더라구요.”

꽁치와 삼치 구이를 시켰다.

노릇하게 구워져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고경아도 맛있게 먹었다. 김지훈은 밥 두 공기를 비우고도 모자랐는지 고경아가 남긴 밥에 손을 뻗었다.

“안 드실 거면 제가 먹을게요.”

“어머! 생선 묻었는데, 하나 더 시켜서 드세요.”

“괜찮아요. 입에 들어가면 똑같은데요, 뭐.”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던 고경아가 웃었다.

“많이 드시네요.”

“못 먹고 살아 봐요. 그래도 일반 외과는 낫죠. 정형외과 돌 때는 배고파서 등짝에 배가 붙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실 거예요. 다들 불쌍하다고 하거든요.”

“병원에서 우리 얘기를 하시나 봐요?”

“가끔요. 수술실에 들어오시면 자주 보잖아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갑자기 고경아의 얼굴이 발개졌다.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남은 밥을 후딱 해치웠다.

영화 상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슈퍼마리오!

앞으로 널 또 보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10분도 안 돼 김지훈이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냥 대형 화면으로 보는 오락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이 우스꽝스러운 악당을 물리치고 있었다. 게다가 더빙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들었던 성우들의 목소리가 그나마 있을지도 모를 재미마저 날려 버렸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경아를 보았다.

‘어, 열심히 보네? 이런 영화 좋아하나?’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중하려고 해도 따분하기만 했다. 가지고 들어간 팝콘과 콜라까지 다 먹었다.

고경아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푹신한 의자.

따뜻한 등짝과 배에서 전해지는 포만감.

따분하기만 한 영화.

그간 쌓인 피로.

완벽한 수면제였다.

김지훈이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가끔 영화 소리에 눈을 떴지만, 1분도 버티지 못했다.

따르르릉!

영화가 끝났다는 벨소리에 김지훈이 깜작 놀라 눈을 떴다.

갑자기 마치 전화기를 찾는 것 같은 시늉을 했다.

“네, 인턴 김지훈입니다.”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잠에서 깬 김지훈이 멋쩍게 웃었다.

첫 데이트부터 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민망한 마음에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영화는 재밌었나요?”

“아니요. 처음에는 궁금해서 봤는데, 정말 재미없었어요. 이런 걸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없나 봐요.”

어이쿠! 너무 솔직하다.

영화에 대한 혹평은 김지훈을 향한 간접적인 비난이었다.

‘그럼 바로 깨우지. 사람 무안하게 끝까지 그걸 왜 봐.’

분명히 미안하기는 한데, 은근히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곤하게 주무시던데요. 영화가 좀 재미없으면 어때요. 지훈 씨 덕분에 맛있는 저녁도 먹고, 오래간만에 종로에도 온 걸요. 기분은 좋아요.”

고경아의 마음을 알자 더 미안해졌다. 그래서인지 9시가 다 됐지만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조금 늦어도 괜찮으면 술이나 한잔할래요?”

“술이요? 난 잘 못 마시는데.”

“바로 옆이 피맛골인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가격도 싸고, 안주도 무지 푸짐해요.”

“한 시간 정도는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인 고경아가 일어났다.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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