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22화 (22/1,329)

제11화 일반 외과에게 바이탈(vital)은 기본이다 (2)

‘누구지? 동기나 선배가 아니면 나한테 인사를 할 여자는 없는데. 보호잔가?’

환자 보호자가 저렇게 급히 뛰어야 하는 경우는 환자에게 큰일이 벌어졌을 때뿐이었다. 그렇다면 인사를 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젊은 여자!

복도를 지나 방사선과 판독실 앞에까지 온 김지훈이 돌연 멈춰 섰다. 어쩐지 익숙한 눈빛을 본 것 같았다.

‘설마 눈이 예쁜 간호사? 날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했다는 건 내가 마음에 든다는 말 아닌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결코 속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눈빛 하나로 눈이 예쁜 간호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인사를 했을 수도 있었다.

“어우! 답답해 죽겠네.”

X-ray 필름을 들고 한동안 복도를 서성이던 김지훈이 한참 후에야 판독실로 들어갔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왔다.

송동하가 김지훈을 불렀다.

“일주일 지났다.”

“선생님! 아직.”

“아직도?”

잠시 김지훈을 노려보던 송동하가 손가락 하나를 폈다.

“딱 일주일 더 준다. 그때까지 결정 못 하면 일반 외과는 못 하는 거야. 확실히 해.”

불과 두 달도 안 돼 교수와 전공의 4년차에게 콜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김지훈에게는 정말 기쁜 일이었지만, 한 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지는 않았다.

앞날을 누가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답을 한 김지훈이 수술실로 내려갔다.

마침 눈이 예쁜 간호사가 일반 외과 수술실에서 벌어질 첫 번째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으면 아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한 김지훈이 이내 입맛을 다셨다.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김칫국을 마신 것이다.

투덜거리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신의 마음보다 그녀를 매일 보아야 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점점 답답해졌다.

여자로 인해 이렇게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가부간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나답지 않게 지금 뭐 하는 거야. 신경을 확 끊든지, 아니면 말을 붙여 보든지. 싫다고 하면 말고, 좋다고 하면 술이나 한잔하지, 뭐. 이렇게 쉬운 걸 왜 고민만 하고 있었지?’

스트레스를 받긴 받은 모양이었다.

평소 성격과는 달리 너무 고민했다.

남은 일은 타이밍을 잡아 말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수술실이 비는 때가 없었다. 누군가는 꼭 한 명이 있었다. 좀처럼 단둘이 마주할 기회가 오질 않았다.

‘수술 끝나면 바로 나가지 좀 마라. 딱 한 번만. 응?’

드디어 기회가 왔다.

수술에 참여하는 간호사가, 도구 하나가 부족하다며 준비실로 갔다. 마침 유석재도 오더를 내러 나간 참이었다.

은근히 가슴이 떨린 김지훈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나 주저하던 끝에 슬며시 눈이 예쁜 간호사에게 접근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 할 말이 있어요.”

깜짝 놀란 간호사가 움찔거렸다.

“뭔데요?”

왜 이렇게 놀라지?

내가 뭘 실수했나?

그때 그 목소리가 맞나?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쳤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신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최대한 평상시의 목소리를 유지했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있어요?”

“왜요?”

되묻는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런데 막상 답을 생각해 놓지 않았다.

통상의 영화 대사가 나가고 말았다.

“시간 있으면 영화나 보실래요?”

잠시 고민하던 간호사가 눈빛을 반짝였다.

“무슨 영화요?”

이런! 요새 무슨 영화가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순발력이 필요했다.

“음, 그건 일단 본다고 해야 정하죠.”

간호사가 웃는지 마스크가 움직였다.

“좋아요.”

앗싸!

왜 이렇게 기쁠까?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그럼 토요일에 볼까요? 3시쯤 어떠세요.”

“좋아요. 어디서요?”

“종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볼까요? 아니면 종로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릴게요.”

“예, 좋습니다.”

돌아서며 만면에 웃음을 보이던 김지훈이 다시 간호사를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보죠?”

“못 알아보시면 어쩔 수 없죠.”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그냥 알아보다니, 무슨 운명의 커플이라도 되나?

김지훈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난 한 번도 못 봤지만, 내 얼굴은 봤겠구나.’

좀처럼 마스크를 벗는 일이 없는 간호사들과는 달리 의사들은 수술이 끝난 후에 곧잘 마스크를 벗었다. 김지훈도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봐요.”

“네.”

다음 수술 환자를 옮기러 가며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무슨 중요한 면접이라도 본 것 같았다.

역효과가 났다.

시간이 정말 안 갔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은 되는 것 같았다.

일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도리어 신경이 더 쓰였다.

‘어후! 이게 뭔 난리냐. 어라,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무슨 영화를 보지?’

마침 오프였다. 부랴부랴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 김지훈이 영화 포스터를 찾아 헤맸다. 평소 잘만 보이던 것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보이는지.

결국 찾았다.

포스터를 쭉 둘러보던 김지훈이 손가락을 튕겨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랑블루!

남자들의 우정 이야기였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상미가 뛰어나다는 극찬이 씌어 있었다. 파란 바다에 돌고래 한 마리가 그려진 포스터만 봐도 감이 딱 왔다.

‘그래, 이거야! 분위기 아주 좋다. 3시에 만나서 종로에 가면 대충 4시쯤 되니까 영화로 분위기 딱 잡고 나면 밤이네. 생선 구이 골목에서 대충 저녁을 먹은 후, 피맛골에서 술로 쫙 달리면. 흐흐흐! 하늘이 날 돕는구나.’

생각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김지훈의 눈이 벌게졌다.

작전을 다 짠 덕분인지 김지훈은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시간은 다시 빨라졌고, 어느덧 토요일이 왔다.

회진이 끝나자 한 주의 수술을 총 정리하고 몇몇 수술 케이스를 발표하는 위클리(weekly)가 열렸다.

송동하가 응급 수술을 한 복막염 환자에 대해 발표했다.

“미세 천공에 의해 복막염이 발생한 사례입니다. 프리에어가 거의 뜨지 않았고…….”

사실 복막염이 특이한 질환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훈에게는 정말 뿌듯한 일이었다. 더구나 발표가 끝나자 이혁민 교수가 맨 뒤에 앉은 김지훈을 보며 뜻밖의 말까지 했다.

“과장님, 이걸 지금 우리 과 도는 인턴 선생이 잡아냈습니다. 내과 1년차도 놓친 걸 말입니다.”

“오! 그래? 누군가? 설마 정갑수?”

이혁민 교수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김지훈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김지훈 선생입니다. 응급실에서도 상당히 근무를 잘했습니다. 외과를 한다고 하니까 눈여겨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자네, 외과를 한다고?”

“예, 과장님.”

“스타일은 딱 우리 과인데, 무슨 과를 하고 싶나?”

전 스태프가 다 있는 자리였다. 그 앞에서 이혁민 교수의 칭찬까지 받았다. 게다가 과장이 일반 외과 스타일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 정도면 말이라도 일반 외과를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90프로는 정해졌지만, 이제 세 번째 텀일 뿐이었다.

인생이 걸린 문제이기에 무엇보다 신중해야 했다.

6년을 넘게 혼자 살아왔기에, 스물여섯이란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김지훈이었다.

“허허허! 우리 과가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웃으며 말했지만 확실하고도 단정적인 말투였다. 호불호가 명확하고, 결정이 빠른 외과 의사들의 특징이었다.

과장의 눈 밖에 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김지훈이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피력했다.

“아닙니다, 과장님.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달도 지나지 않았고, 성급하게 말씀드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잘 생각해 봐라. 우리 과는 사람을 살리는 과다.”

무언가가 가슴을 때렸다.

바이탈은 곧 생명이다.

사람을 살리는 과란 말이 뇌리에 박혔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지. 다들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봅시다.”

위클리가 끝났다.

이혁민 교수가 웃으며 다가왔다.

“니 우리 과 하고 싶다는 말, 내 똑똑히 들었다.”

뒤를 따르던 송동하가 주먹을 쥐었다.

“지훈아, 이틀 남았다.”

‘아이고! 정말 왜들 이러실까.’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들떴다. 드디어 눈이 예쁜 간호사와의 첫 데이트하는 날이 온 것이다.

오전 11시.

유석재가 병동 일을 마치고 대기하던 김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응급실 가자.”

피곤한 와중에도 목소리가 밝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유석재가 말했다.

“선생님들 말 신경 쓰지 마. 결정은 나중에 해도 돼.”

“정말요?”

“우리 나이가 몇인데, 강제로 시키겠냐? 그냥 널 무지하게 탐낸다고만 생각해. 하필이면 마음에 드는 짓만 골라서 했잖아. 누굴 탓하겠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무슨 환자예요?”

“교통사고 환잔데, 배가 아프대.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까 그냥 복부 둔상이겠지.”

“다른 과 문제없으면 입원시키고 관찰인가요?”

유석재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너, 참 인턴답지 않다.”

“왜요?”

“인턴 때 복부 둔상 환자의 치료 원칙을 아는 놈이 어디 있겠냐? 그렇게 외상 환자를 많이 본 애들도 모르는데.”

김지훈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야마만 잘 외워도 그 정도는 알죠.”

“야마도 제대로 모르는 놈이 태반이야. 가자, 빨리 보고 오프 가야지?”

“그런데 선생님은 오프 언제 가요?”

“서울에서는 없지. 엄밀하게 따지면 세 달이지만, 어쨌든 100일 당직이잖아.”

“꼭 그럴 필요가 있나요?”

“의미가 있겠지. 의미 없는 걸 하지는 않을 거 아냐. 근데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하하하!”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김지훈도 따라서 웃었다.

응급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석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교통사고 환자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 보였고, 배에 가스가 찬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바이탈은?”

“내원 당시에는 정상이었는데, 지금은 90에 60이에요.”

혈압이 떨어지고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유석재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시티 빨리 찍고, 시비시(CBC:일반 혈액 검사) 다시 내보내요.”

‘어째 환자 상태가 불안하네.’

김지훈도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시티가 나오자마자 유석재가 필름을 뷰 박스에 걸었다.

“어후! 헤모페리토네움(hemoperitoneum)이네.”

헤모페리토네움(hemoperitoneum)!

복부 내 장기나 혈관이 손상돼 복강에 피가 찼다는 말이다.

응급 수술을 요하는 상태였다.

김지훈과 유석재가 노티와 수술 준비로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사이 환자의 혈압이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호사, 피 2개 빨리 달고, 3개 더 준비해. 지훈아, 정갑수 선생도 내려오라고 해.”

“예.”

곧 송동하를 비롯해 정갑수까지 응급실로 내려왔다.

가장 굵은 바늘로 수혈을 하고, 양팔에 모두 수액을 달았지만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혈압도 오르지 않았다. 보충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출혈한다는 신호였다.

“갑수 형, 짜야겠다.”

김지훈이 혈액이 담긴 비닐 주머니를 짜기 시작했다.

“지훈아, 오더도 없이?”

“형, 혈압이 안 오르는데 무슨 오더를 기다려요. 이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죠.”

그래도 정갑수는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환자만 보았다.

환자를 살피러 온 송동하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정갑수, 피 안 짜고 뭐 해? 환자 혈압도 안 오르고 창백한 거 안 보여? 배워라, 배워. 좀.”

짜증을 확 낸 송동하가 김지훈을 보며 입맛만 다셨다.

‘이렇게 알아서 하면 얼마나 좋아.’

빠르게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그때 모니터가 삑삑,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혈압이 뚝뚝 떨어지며 심장 박동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환자의 의식까지 흐릿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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