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일반 외과에게 바이탈(vital)은 기본이다 (1)
“프리에어? 어디가?”
자세히 사진을 본 동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에 든 공기 아냐?”
“아니야, 잘 봐.”
“난 잘 모르겠는데. 내과 선생님이 설마 못 보셨겠어?”
“급하게 보면 놓칠 수도 있잖아.”
“확실하지도 않은데 다시 노티할 수도 없잖아. 아니면 나만 깨져, 인마.”
프리에어(free air)는 장내를 빠져나와 복강 내에 찬 공기를 말한다. 즉 장 어딘가에 구멍이 났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의 판단이 맞다면 응급 수술을 요하는 질환이었다.
김지훈이 동기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환자를 찾았다.
얼굴이 시커먼 환자가 잔뜩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환자분, 지금도 많이 아프세요?”
“많이 아프지.”
대뜸 반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참 적응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대우받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적인 관계도 아니다. 나이를 떠나 존댓말을 쓰는 것은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슬쩍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래도 환자라는 사실에 김지훈이 꾹 참으며 진찰을 했다.
“잠깐 배 좀 보겠습니다.”
“아까 2명이나 와서 봤는데, 또 봐?”
“확인할 게 있습니다. 여러 명이 보면 그만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니까 환자분에게도 좋은 일이죠.”
김지훈의 목소리가 다소 딱딱해졌다.
환자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옷을 올렸다.
청진상 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지그시 배를 누르자 환자가 배에 힘을 꽉 주면서 통증을 호소했다. 압통과 복부 경직성이었다. 김지훈이 배를 눌렀던 손을 갑자기 뗐다.
“아야!”
환자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뗄 때도 아프세요?”
“아파.”
반사통까지 있었다.
“아까 다른 선생님들이 만졌을 때는 안 아팠어요?”
“그때도 아프긴 했는데, 지금이 훨씬 더 아파. 뭔데?”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압통과 반사통, 그리고 복부 경직은 복막염의 징후다.
프리에어까지 하면 100프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하다.
외상 환자는 아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뭘까?
“환자분, 혹시 술 많이 드세요?”
“많이 먹지.”
“얼마나 드세요?”
“하루에 한두 병씩 매일 먹어.”
“평소 속 안 쓰렸어요?”
“쓰렸지. 그래서 오늘 병원에 온 거잖아.”
‘매일 술을 먹었고, 평소 속이 쓰렸다. 그리고 복막염 증세를 보인다면 궤양이 터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아파하지?’
어딘가 앞뒤가 안 맞았지만, 복막염이 의심되는 환자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 환자였다.
김지훈이 당직실로 가 유석재를 깨웠다.
“선생님.”
“으흠! 지훈이구나. 검사 결과 나왔어?”
“아직 검사 결과는 안 나왔는데요. 노티 드릴 환자가 있어요.”
“응급실 인턴 놔두고 왜 네가 노티를 해.”
유석재가 연거푸 하품을 하며 눈을 잘 뜨지 못했다.
“선생님, 노티 합니다.”
“에이! 뭔데 그래?”
1년차에게 하는 노티다. 응급실 인턴은 아니었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확실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56세 환자입니다. 평소 술을 많이 먹는 분으로 금일 복통을 주소로 내원했습니다. 현재 압통, 반사통, 복부 경직성을 보이며, 체스트상 프리에어가 의심됩니다.”
프리에어라는 소리에 유석재가 벌떡 일어났다.
“뭐? 빤뻬리(Panperitonitis:범발성 복막염)라구?”
김지훈이 다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 제가 보기엔 빤뻬리 같습니다.”
“환자 어디 있어?”
부랴부랴 찬물로 세수를 한 유석재가 환자를 찾았다.
김지훈이 물은 과거력과 병력을 또 확인하고 진찰을 하자 환자가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뭐야? 아프다고 왔는데 하루 종일 물어보기만 할 거야? 점점 더 아파진다구. 아이구! 배야.”
복통이 상당히 심해졌는지 그새 환자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X-ray는?”
“뷰 박스에 걸어 놨습니다.”
유석재가 흉부와 복부 X-ray를 확인했다.
“프리에어가 어디 있어?”
‘아닌가? 분명히 저건 위와 횡격막 사이에 있는 공기인데.’
김지훈이 의심되는 부위를 가리키자 유석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스테이션으로 간 유석재가 수술에 필요한 오더들을 내기 시작했다.
“간호사, 이 환자 우리가 가져갑니다.”
“그 환자 내과에서 다 봤는데요?”
“빤뻬리니까 빨리 준비해요. 방사선과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시티(CT) 찍어 달라고 하고.”
전화기를 든 유석재가 위의 연차에게 바로 노티를 했다.
잠시 후, 2년차와 함께 송동하가 응급실로 내려왔다.
“빤뻬리라구? 환자는?”
“시티 찍으러 갔습니다.”
“그래? 차트 줘 봐.”
유석재가 내민 차트를 찬찬히 보던 송동하가 눈가를 찌푸렸다.
“내과에 먼저 노티가 됐네. 어라? 오더까지 내고 갔어? 석재야, 요새 내과 애들은 검사할 거 다 하고도 빤뻬리를 못 보냐?”
“너무 급하게 본 모양입니다. 흉부 사진에도 프리에어가 정말 미세하게 떴거든요.”
“줘 봐.”
흉부 X-ray를 받아 든 송동하가 형광등에 비쳐 보다 얼굴을 찡그리며 훨씬 밝은 빛을 내는 뷰 박스로 갔다.
때마침 시티가 도착했다. 한참 동안 X-ray 필름들을 보던 송동하가 중얼거렸다.
“이거, 궤양이 미세하게 터졌나 본데. 프리에어가 시티에서도 제대로 안 보이네. 석재 아니었으면 누가 봐도 놓쳤겠다. 내가 아래 연차 복은 있어.”
송동하가 웃으며 유석재를 보았다.
“난 이혁민 선생님한테 연락할 테니 그동안 수술 준비해. 보호자하고 마취과 퍼미션(permission:동의) 빨리 받고.”
“선생님, 사실 프리에어를…….”
“석재야, 시간 없어. 이혁민 선생님 30분이면 오신다. 환자에 관한 얘기 아니면 나중에 해.”
대답도 듣지 않고 송동하가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는 수술실로 올라갔다.
유석재가 김지훈을 힐끗 보며 웃었다.
“너 대신 내가 칭찬을 받았네. 지훈아, 엘튜브하고 폴리 꼽아.”
“옙.”
힘차게 대답을 한 김지훈이 환자에게 엘튜브와 폴리를 꼽았다. 튜브가 코를 통해 목구멍에 들어가자 기침을 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 탓에 통증이 더 심해졌는지 환자가 배를 움켜잡았다.
매너가 꽝이어도 환자는 환자다.
김지훈이 더욱 신중해졌다.
‘후우! 프리에어가 확실하고, 빤뻬리가 맞단 말이지. 이게 의사를 하는 이윤가?’
환자가 그대로 퇴원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외래로 와서 결국 수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지체돼 주요 합병증인 패혈증이 발생한다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알코올 중독이 의심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이기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번 경우 역시 환자 한 명을 살린 것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김지훈을 본 간호사와 동기가 동시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지훈아, 너 아니었으면 나까지 큰일 날 뻔했다. 고맙다.”
“호호호! 선생님은 잊을 만하면 한 건씩 하시네요.”
은근히 뿌듯해진 마음에 김지훈이 미친놈처럼 혼자 히죽히죽 웃고 말았다.
이혁민 교수의 집도하에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김지훈이 써드 자리에 서서 열심히 수술을 보았다.
우연이지만 어쨌든 진단을 했기에 더욱 관심이 갔다.
수술이 거의 끝나자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선생, 오늘 당직이니까 내일 오프제.”
“예, 선생님.”
“그럼 모레까지 복막염 수술과 진단 방법에 대해서 리포트 써 와라.”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예에?”
“왜, 네가 프리에어 발견했다며. 운이 되지 않으려면 공부해야 하지 않겠나.”
어느 틈엔가 유석재가 사실대로 말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유석재가 딴청을 피웠다. 이런 결과가 초래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송동하 선생, 내 대신 확인하고, 대충 했으면 확실하게 태우레이.”
“예, 아주 죽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살려야 써먹을 거 아이가.”
“그럼 반만 죽일까요?”
“그래, 그게 좋겠다. 모두들 수고했다. 마무리 잘하고.”
송동하 이하 전공의들과 김지훈이 힘차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목소리 좀 죽여라. 환자 깨겠다.”
수술실을 나서는 이혁민 교수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송동하가 어깨를 툭툭 치며 나갔고, 유석재만 남았다.
“선생님, 진짜 리포트 써야 하나요? 난 학생도 아닌데.”
“지훈아, 죽고 싶으면 네 마음대로 해. 아니구나. 반만 죽이신댔지. 하하하!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네가 무지하게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다.”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회복실로 환자를 옮긴 후, 김지훈이 물끄러미 유석재가 차팅하는 것을 보았다.
진단명: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
(Diagnosis:Panperitonitis due to ulcer perforation)
수술명:1차 봉합술과 대망 접합
(Op name:Primary repair with Omental patch)
‘써드를 섰는데 왜 내가 수술한 거 같지?’
무난히 수술을 마친 환자가 입원실로 향했다.
마치 고맙다는 듯 김지훈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물론 느낌일 뿐이었지만, 왠지 수술하는 맛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리포트만 아니면 일반 외과 인턴 생활이 정말 즐거울 텐데.’
슬슬 잠이 몰려온 김지훈이 수북한 입원 환자 차트를 앞에 두고 있는 유석재에게 인사를 하고 숙소로 향했다.
차트 정리만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도대체 1년차는 언제 잠을 자는 걸까?
그래서 1년차들이 수술실에서 그렇게 조는지도 몰랐다.
다음 날, 김지훈은 더욱 힘차게 아침을 시작했다.
수술실로 가기 전, 몰래 지난밤 수술한 환자를 찾았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체력이 있는지 벌써 앉아 있었다.
환자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일반 외과는 이런 맛에 수술하나 보다. 정형외과는 몸만 불편해지지만, 일반 외과는 안 하면 죽잖아.’
생명과 직결되는 바이탈(vital)을 다룬다는 것은 상당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의사들도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를 내외산소라 부르며 메이저 과목으로 인정할 것이다.
바이탈(vital)!
김지훈이 계단을 내려가며 수없이 바이탈을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일에 몰두했다.
한 가지는 빼고 말이다.
눈이 예쁜 간호사가 문제였다.
어느 날부터인가 김지훈이 그녀를 찾고 있었다.
일에 열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보이면 하루가 즐겁고, 못 보면 왠지 힘이 빠졌다.
‘아후!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데이트라도 신청해 볼까. 그러다 괜히 창피만 당하는 거 아냐. 아니지, 마스크 뒤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모르잖아. 눈만 예쁘고, 나머지는 완전 꽝이면 정말 곤란한데.’
아무 일이 없으면 시도 때도 없이 반짝이는 눈이 생각났다. 결국 사달이 났다.
토요일은 수술이 없어 아침부터 병동 일을 한다.
다음 주 수술 환자를 준비할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X-ray 판독이었다. 만일 폐에 문제가 있다면 전신 마취를 걸 수 있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김지훈이 두툼한 X-ray 필름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인턴에게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다음 주엔 주말 오픈데 뭐 하지? 오래간만에 수원에 가서 친구들이나 만날까?’
토요일 1시부터 월요일 아침 일과 전까지가 주말 오프다.
정말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마음도 편한데, 결코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김지훈은 그리 급할 것이 없는지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1층에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누군가가 휙 하고 지나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의사들 중 가장 밑에 있는 인턴들은 인사를 받으면 본능적으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인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로 볼 때 젊은 여자였다. 하지만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2층 계단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