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8화 (18/1,329)

제9화 첫 월급 (2)

한 주가 지났다.

주말 오프를 갔다 온 손일석이 정말 나이트를 갔다 왔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썰을 풀었다.

“야야, 지훈아, 다음에 시간 되면 나이트 같이 가자.”

“나이트 안 가는 거 알잖아?”

“그건 학생 때 일이고. 나이트에 딱 들어가자마자 몸매가 쫙 빠진 애가 날 보고 웃는 거야. 나 손일석을 바로 알아본 거지. 뭐, 말을 걸 필요도 없더라구. 요거 하나로 그냥 게임 끝낸 거 아니냐. 내가 하나 건져 줄게.”

손일석이 검지를 까딱거렸다.

“일석이 안 죽었네.”

“그럼 내가 누구냐. 지금은 일 때문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지만, 한때는 날렸던 사람 아니냐.”

“이게 맞춰 줬더니 개 뻥을 치고 앉았어.”

“헤헤헤! 그래도 인마, 너보단 내가 나아.”

스트레스가 풀린 손일석도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일요일 저녁, 인턴 숙소가 떠들썩해졌다.

맥주가 오고 가고, 김지훈도 손일석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캔 하나를 시원하게 마셨다. 당직이라 더 못 마시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월요병은 무시무시했다. 회진도 돌기 싫었고, 무시하고 살았던 악어의 말 한 마디에 짜증이 났다. 수술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간신히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외과 타입이긴 한 모양이네.’

나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김지훈이 수술 스케줄을 보았다. 각종 진단명에 각기 다른 수술명이 적혀 있었다.

정형외과도 정말 다양한 수술을 했지만, 김지훈에게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수술이 다르다고 인턴의 일이 달라지진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목공소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수술을 보는 것은 즐겁기만 한 일이었다.

“끙!”

언제나 무겁기만 한 환자들의 몸에 터지는 신음.

드르륵! 드르륵!

시암이 바닥을 긁는 소리.

위이잉! 삑!

슛을 할 때마다 나는 소리.

적성을 떠나 이젠 이런 소리도 정겨웠다.

어느 날부터인가 즐거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눈이 예쁜 간호사!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예쁜 눈을 찾고 있었다.

비록 눈길도 안 주었지만, 냉랭한 모습조차 예뻐 보였다.

‘예뻐, 정말 예뻐.’

할 일이 없을 때면 몰래 그녀의 눈빛을 찾곤 했다. 모든 수술이 끝나 병동으로 향할 때면 약간의 아쉬움까지 느낄 정도였다.

회진을 돌고, 잡잡이로 당직을 섰다. 수술실에 들어서면 일에 열중하다가도 크고 반짝이는 눈을 찾았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왔다.

드디어 첫 월급날이다.

자동 이체로 월급을 받기 때문에 10원짜리 한 장 만져 보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지만 짬이 나질 않았다. 부랴부랴 저녁을 먹자마자 통장을 가지러 숙소로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가장 신이 나 있어야 할 손일석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비분강개한 모습이었다.

‘이 자식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월급날까지 이래? 그것도 첫 월급인데.’

“너, 왜 이렇게 흥분을 하고 지랄이냐?”

손일석이 통장을 흔들었다.

“야, 지금 내가 지랄 안 하게 생겼냐? 넌 이걸 보면 생지랄을 할 거다. 이게 월급이냐?”

통장을 본 김지훈이 어이가 없는지 말없이 통장만 보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243,150원.

한 달을 뼈 빠지게 일하고, 보름도 넘게 당직을 섰는데 달랑 24만 3천 150원이었다.

“일석아, 이게 지금 24만 원이 맞지? 내 눈이 잘못된 거 아니지?”

“나도 기가 차서 총무과에 연락해 봤다. 본봉이 59만 얼마에 당직비가 3만 원이란다. 그걸 다 받아도 62만 원인데, 여기서 의사 협회비에 인턴 회비까지 뗐단다. 아! 세금도. 벼룩의 간을 빼먹지. 아니면 나눠서 가져가든지. 첫 월급부터 김샜다. 완전 의욕 상실이야.”

“그럼 다음 달에는 얼마래?”

“그나마 다행인 게, 다음 달에는 훨씬 낫단다. 보너스 달이잖아. 그래야 백만 원 언저리지, 뭐.”

김지훈이 답답한 눈으로 턱을 만졌다.

처음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통장에 있는 2천만 원이 전 재산이었다. 그 돈으로는 병원 근방에서 전세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적금이라도 들 생각이었다.

책이며 옷가지들까지 자취를 하는 후배에게 맡겨 놓았지만, 길어야 2년이었다. 며칠 자지도 못할 텐데, 다달이 월세까지 내 가며 방을 구할 수는 없었다.

‘더 아끼며 살았어야 했나? 답답하네.’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동기들을 보았다.

월급에 대한 반응이 딱 둘로 나뉘어 있었다.

집이 살 만한 동기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고, 심지어 무관심한 놈들도 있었다. 대부분 이쪽 부류였다. 반면 몇 안 되지만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렵거나, 손일석처럼 돈에 민감한 동기들은 흥분을 하거나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주눅 들 이유도, 기분이 가라앉을 이유도 없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학교 다닐 때보다는 훨씬 낫네. 병원에서 다 먹여 주고, 재워 주는데 돈이 왜 필요해? 지금까지도 혼자 잘해 왔고, 당장 걱정할 것도 없잖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일석의 울분을 듣던 김지훈이 통장을 꺼내며 말했다.

“일석아, 그만해. 어차피 돈 쓸 시간도 없고, 다음 달에는 보너스도 나온다며. 소주 한잔할 수 있으면 됐어.”

“첫 월급인데, 기분이 그렇잖아.”

어떻게 보아도 김지훈만큼 돈이 절박한 동기도 없었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아는 손일석이었지만, 분통을 참지 못했다. 도리어 목소리를 더 높였다.

“의사 협회비나 세금은 그렇다고 쳐도, 당직비가 3만 원이 뭐냐? 그럼 하루에 얼마야? 당직 서는 날이 보름이라고 쳐도 2천 원이잖아. 애들 껌 값도 아니고, 장난하나.”

김지훈이 웃었다. 돈에 관해서는 자신의 눈치를 볼 만도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 편하고 좋았다.

부모 없는 것이 죄는 아니니까 말이다.

슬며시 숙소를 나온 김지훈이 자동 출납기에서 5만 원을 뽑았다. 그리고 병원 문을 나서 옷가게를 찾았다. 여자 직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뭘 찾으세요.”

“내복 2개 주세요. 제일 좋은 걸로 남자 거 하나, 여자 거 하나요. 아 참! 빨간색으로요.”

“사이즈는요?”

“그냥 보통 사이즈로 주세요.”

보통 사이즈?

“어느 분한테 선물하실 거죠?”

“부모님이요.”

“첫 월급을 타셨나 봐요?”

빨간 내복에 부모님 선물이라면 당연히 첫 월급이다.

직원이 웃으며 내복 2개를 내밀었다.

“남자들은 부모님 사이즈도 잘 모르죠. 혹시 작거나 크면 바로 오세요. 교환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얼마죠?”

“2개 3만 원인데, 부모님 선물이니까 3천 원 빼 드릴게요. 많이 깎아 준 거예요.”

“고맙습니다.”

옷가게를 나온 김지훈이 밤하늘을 보았다.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오늘 월급 탔어요. 계신 곳도 아직은 춥죠? 내복이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혹시라도 안 맞으시면 제가 바꿔다 드릴게요.’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김지훈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런 날에는 언제나 소주 한 잔이 생각났다.

“이모, 저 왔어요.”

“아이고! 우리 인턴 선생님이 평일에 웬일이셔.”

“월급 탔어요.”

“어머! 축하해. 내 거는 뭐 없나?”

주인아주머니가 골뱅이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내밀며 넉살을 떨었다. 김지훈이 웃으며 주인아주머니를 보다 갑자기 내복을 내밀었다.

억센 손마디가 오늘따라 유달리 눈에 박혔다.

‘아버지, 어머니, 제게 정말 잘해 주시는 분이에요. 드려도 되죠? 서운해하지 마세요. 필요하시면 제가 또 사 드릴게요.’

“어머머머!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호들갑을 떨며 내복을 받아 든 주인아주머니가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머니도 저랬을 것이다. 김지훈이 소주를 따르며 붉어진 눈가를 감췄다.

“그런데 2개네?”

“하나는 아저씨 거예요.”

주인아주머니가 하던 일을 멈췄다.

갑자기 눈물을 보이며 코를 풀었다.

“고마워. 바깥양반도 정말 좋아할 거야. 술장사 10년에 이런 선물은 처음 받아 보네.”

“그런데 왜 우세요?”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좋아서 그러는 거야. 나도 너 같은 자식이 있었는데, 지금쯤이면 너하고 같은 나이…….”

주인아주머니가 말을 하다 말고 가스 불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한 방울의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이모에게 자식이 있었나? 설마 중간에 잃으신 거야?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자식 얘기를 들은 적이 없네.’

마음이 착잡해졌다.

가슴속에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나 보다.

부모를 잃으면 하늘이 무너지지만, 자식을 잃으면 간과 내장이 끊어진다고 했다. 김지훈이 그런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얼마나 아플지는 알 수 있었다.

한참 만에 나타난 주인아주머니가 술 한 잔을 따랐다.

“부모님 거는 샀지?”

“그럼요. 당연하죠.”

“지훈이 부모님은 참 행복하시겠어. 너 같은 아들이 있으면 부러울 게 없으실 거야.”

“정말 행복해하시겠죠?”

“그럼.”

100촉짜리 백열등만이 조용히 빛났다.

아무 말도 없이 둘이 한 병을 마셨다.

“갈게요.”

“더 안 먹고?”

“내일 또 일해야죠. 잘 먹었습니다.”

“조심해 가. 고맙다, 지훈아.”

주인아주머니의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골뱅이 한 접시만 남았다.

“에구! 안주를 하나도 안 먹었네. 주책 맞게 갑자기 간 놈 생각은 왜 이리 나누.”

포장마차에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병원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자! 아자! 힘내자!

그래야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다.

숙소로 들어선 김지훈이 맥주 캔을 들고는 활짝 웃었다.

“일석아, 맥주 사 왔다.”

“오! 역시 지훈이야. 첫 월급을 내게 상납하는구나. 으하하하! 그럼 내게 잘 보여야지. 그래야 네가 편해진다.”

손일석이 김지훈의 머리에 팔을 두르고 흔들었다.

“숨 막혀, 인마.”

“안 죽어, 이 자식아.”

맥주 냄새를 맡은 동기들이 모여들었다.

순식간에 맥주가 사라졌다.

어쨌든 첫 월급을 받은 날이었다. 이대로 지나가기에는 서운했다.

“가위, 바위, 보.”

“오케이! 일석이 당첨.”

“일석아, 안주도 사 와.”

“돈 없어, 이 자식들아. 지훈이 저 자식은 맥주 몇 개 사 오고는 날 아예 거지로 만드네.”

인턴 숙소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비록 캔 맥주 몇 개에 멸치가 다였지만, 다들 웃고 떠들기에 바빴다. 김지훈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일석아, 네 덕분에 웃고 산다. 정말 고맙다.’

함께 술 한 잔 나눌 친구가 있어 정말 좋았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내복을 드릴 수 있는 이모가 있어 행복했다. 문득 눈이 예쁜 간호사가 생각났다.

김지훈이 머리를 흔들며 맥주를 비웠다.

***

첫 주말 오프다.

인턴을 시작한 지 5주 만에 받은 주말 오프였지만 할 일이 없었다. 후배들도 모두 집에 가 만날 사람도 없었다. 황금 같은 주말을 함께 보내 줄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결국 당직인 손일석과 주말을 보내야 했다.

“쯧쯧쯧! 날씨도 좋은데 여기서 뭐 하니?”

“그러게 말이다. 여자라도 하나 만들어야 하나?”

“네 재주에? 아서라. 임상 병리 돌 때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형만 믿고 기다려.”

“널 믿느니 헌팅을 하겠다.”

“얼라? 이 자식이 날 물로 보네. 내가 윙크만 날려도 껌벅 죽어, 인마.”

“놀고 있네. 그런데 너 여기 있어도 괜찮냐?”

“악어가 오프잖니. 얼굴만 안 보는 건데,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

“좋겠다. 난 전주에 하루 종일 병동에 있는데 죽는 줄 알았다. 담배 심부름이 반갑더라니까.”

“악어도 피해야 할 사람 정도는 안다는 얘기지.”

“이게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아침부터 계속 헛소리야.”

“헛소리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

구내식당에서 대충 끼니를 때운 김지훈이 숙소로 돌아와 TV를 틀었다. 일요일 오전이라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침대에 누웠다가 숙소만 헤맸다.

‘에휴! 정말 애인이라도 한 명 구해야겠다.’

한숨만 푹푹 쉬던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빛 하나를 떠올렸다. 이상하게도 수술실에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했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비쩍 말랐으면 곤란한데.’

유난히 마른 여자를 싫어하는 김지훈이 수술복에 가려진 간호사의 몸매를 상상했다.

콜라 병 위에 육감적인 몸매가 겹쳤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에 병원에 처박혀 있어서인지 별의별 상상이 다 떠올랐다.

‘어, 이건 서연인데? 욕구 불만인가? 왜 얘가 나타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젊은 사내의 본능이 사라지자 반짝이는 눈빛이 다시 돌아왔다.

“예쁘긴 예뻐.”

“누가? 누가 예뻐?”

어느 틈엔가 나타난 손일석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생각을 들킨 것도 아닌데 김지훈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이야. 기척 좀 해라.”

“이건 혹시 말로만 듣던 과민 반응? 수상한데. 너, 누가 예쁘다는 거야. 어서 이실직고하렷다.”

“내가 언제 그랬어?”

“이 두 귓구멍으로 똑똑히 들었는데 지금 오리발 내미는 거야? 형한테 툭 터놓고 상의해. 바로 해결해 준다.”

“어우! 이 새끼는 누가 안 잡아가나. 악어한테나 확 물려라.”

“으으윽! 네놈이 감히 묵성사신인 내게 지상 최고의 욕으로 비수를 꼽다니. 두고 보자. 반드시 복수하마.”

손일석이 가슴을 잡고는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김지훈이 머리를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묵성사신? 무협 영화 좀 그만 봐, 인마. 툭하면 흉내 내고 지랄이야.”

“그래, 알았어, 인마. 너 혼자 놀아.”

손일석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이내 심심해졌다.

“수원에나 갈걸 그랬나? 에이! 그러면 어제 갔어야지.”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친구들까지 바글바글한 수원을 놔두고 뭐 하는 짓인지 몰라 한심했다. 술로 떡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몸을 사린 게 죄라면 죄였다.

침대에 누워 투덜거리던 김지훈의 눈이 슬슬 감겼다.

새까만 밤하늘에 별빛 2개가 반짝였다.

그 위로 육감적인 몸을 가진 여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이 밤새 반짝이는 별빛과 사내의 본능 사이를 헤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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