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첫 월급 (1)
다음 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이 이어졌다.
무난히 하루가 지나가고, 오후 전공의 회진까지 끝났다.
그런데 4년차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라는 말도 없이 모두 병동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인턴이나 아래 연차에게는 정말 불편한 일이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차트만 만지작거리며 병동을 서성였다.
“왜들 안 올라가지? 무슨 일 있나? 저녁이나 빨리 먹고 갔으면 좋겠다.”
무슨 일은?
김지훈과 악어의 일을 이대로 묻을 리 없었다.
골치가 아픈지 김지훈이 눈을 비비며 한숨을 쉬었다.
“곧 터지겠지.”
드디어 김대성이 김지훈을 불렀다.
“김지훈 선생, 의국으로 들어와.”
손일석이 툭툭 등을 치며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악어는 정형외과고 난 인턴인데 누구의 편을 들겠냐. 그나마 4년차가 아니라 김대성 선생님이 불러서 다행이다. 악어 때문에 X 됐어.’
의국에 들어서자 김대성이 말없이 의자를 내밀었다.
의자에 앉은 김지훈이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기다렸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일단 악어가 사정도 안 듣고 그 난리를 친 건 잘못한 일이야. 하지만 넌 인턴이고, 악어는 학교 선배에 2년차야. 너도 잘못한 점이 있어. 내 말이 맞지?”
“예.”
“그럼 사과하고 깨끗이 끝내자.”
적어도 정형외과 내에서는 이렇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자세한 말은 안 했지만, 김대성이 중간에 서서 꽤 노력을 했을 것이다. 입이 10개라도 김대성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래. 악어를 들여보낼 테니 무슨 욕을 먹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해. 여기서 일이 더 커지면 악어가 아니라 지훈이 네 잘못이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 상황에서 악어와 주먹질이라도 한다면 누군가는 정말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누가 나가야 할지는 분명했다. 병원은 당연히 2년차를 보호할 것이다.
“예.”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린 김대성이 나갔다.
악어가 들어왔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의자에 떡하니 앉아 김지훈을 비웃고 있었다.
인턴 주제에 뭘 어쩔 건데 하는 표정이었다.
“잘못했습니다.”
“뭘 잘못했는데, 이 새끼야.”
역시 욕부터 날아왔다.
입에 걸레를 물었어도 이보단 덜할 것이다.
선배인 악어에게 반말을 하고 대든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악어를 보니 사과할 생각이 싹 사라졌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팔 놈, 내 이럴 줄 알았어. 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지? 서울에서만 날 볼 것 같냐? 너, 구미, 천안 파견 갔다가 다시 서울 오는 거 다 알고 있어. 확실하게 해 줄게, 이 시팔 놈아. 개피 보지 않으려면 네 스스로 옷 벗는 게 나을 거다. 다른 병원 많잖아? 그리로 가, 이 개새끼야.”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울컥울컥 뭔가가 또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지금 덤비면 정말 옷 벗고 병원을 나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 왜 또 개겨 보지. 여기까지 오니까 겁나냐? 병신 같은 새끼. 하여간 가정 교육이 안 된 새끼들은 어쩔 수가 없어요. 하긴 이 시팔 놈은 가정 교육이란 게 뭔지도 모르겠네.”
가정 교육이 뭔지도 몰라?
설마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비꼬는 걸까?
‘아니겠지. 아무리 악어라도 설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겠지.’
김지훈은 주먹을 쥐며 손이 떨리는 것을 참았다.
기분 나쁜 눈빛으로 위아래로 훑어보던 악어가 코웃음을 치며 나갔다.
“알아서 옷 벗는 게 낫다는 내 말, 명심해라. 아니면 내 손에 죽는다. 시팔 놈, 부모…….”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부모 다음에 어쩌고저쩌고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당장 악어의 멱살을 잡고 뭐라고 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 순간, 그리운 이들의 얼굴과 김대성이 떠올랐다.
여기서 참지 못하면 모두를 실망시킬 뿐이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악어 때문에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악어, 너 정말 가만 안 둔다.’
김지훈이 의국 문손잡이를 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악어가 4년차들과 웃으며 병동을 나섰다.
“인턴 하나 때문에 이런 일을 만들어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살살해. 인턴하고 이게 뭐니? 쪽팔리게.”
“그러게 말입니다, 선생님. 가시죠.”
악어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김지훈이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악어만 보면 화가 치밀었지만, 그럴수록 정형외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배웠다. 지치지도 않는지 악어의 욕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예 귀를 막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자기 힘들었다.
재수가 없으면 별일이 다 일어난다.
하필이면 수술실에 악어가 들어왔다.
환자 드레싱하는 것부터 시작해 시암 조작까지 온갖 트집을 잡았다. 악어에게서 멀리 떨어지다 보니 수술실 문에 바짝 붙어 있어야 했다.
‘내 더러워서 피한다.’
슬며시 악어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문밖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야,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정형외과 도는 인턴 말이야.”
“누구?”
“지금 수술실 안에 있잖아. 내가 어제 우연히 수 선생님들 회식에 갔었거든. 그런데 초턴들 얘기만 나오면 한숨만 쉬던 응급실 수 선생님이 얼마나 칭찬을 하던지 깜짝 놀랐다니까?”
“왜?”
“어레스트 난 환자를 살렸대. 내과 전진우 선생님이라던가? 하여튼 그 선생님이 응급실에 내려와서도 잘한다고 그냥 보고만 있었다던데.”
“에이! 설마. 말턴도 아니고, 초턴이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대단한 거지.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수 선생님한테 물어봐. 어제 같이 계셨으니까 더 자세히 아실걸? 그뿐인 줄 알아?”
“다른 일이 또 있어?”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악어하고 한판 붙었대.”
“악어? 너, 정형외과 악어 말하는 거 맞지?”
“그럼 악어가 또 있어? 하여튼 뭔지는 모르지만, 어젯밤에 7층 병동이 난리가 났었단다. 인턴 선생이 욕까지 했는데, 악어가 한 대도 못 때렸대. 대단하지 않아?”
“어머! 정말이야? 말만 들어도 고소하네. 악어는 정말 더 당해야 해. 평소에도 얼마나 못됐니. 난 악어가 3년차 됐을 때 정형외과 수술실 들어가라고 하면 그만둘 거야.”
수술실 복도에서 소곤대는 간호사들의 말에 김지훈이 점점 더 바짝 문에 귀를 붙였다.
삐거덕!
힘 조절 실패다.
여닫이문인 수술실 문이 김지훈의 머리에 밀리며 특유의 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간호사들이 시치미를 뚝 떼며 다른 수술실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우리 인턴들만 악어를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에휴! 말뿐이지만, 그래도 고맙네. 사실 욕은 안 했는데.’
부글부글 끓던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왠지 간호사들도 같은 편인 것 같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악어는 최소한 간호사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환자를 살렸다는 말은 조금 듣기 그랬다.
아직은 갈 길이 먼 인턴인데,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마지막 수술까지 악어가 1st 어시스트(assist)를 섰다. 정말 재수도 지지리 없는 날이었다. 더구나 5분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드레싱을 10분이나 넘게 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일이었다.
후들후들 떨던 김지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내가 무슨 로보트 태권 브이도 아니고, 10분이 넘게 닦고 앉았는데 무슨 수로 버텨? 치사한 놈.’
한계에 다다른 팔이 아우성을 쳤다. 결국 환자 다리가 내려갔다. 악어가 잡아먹을 듯이 인상을 썼다.
“이 새끼야, 다리 안 올려? 확! 그냥.”
때마침 스태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더 험한 욕이 더 쏟아졌을 것이다. 스태프를 본 악어의 태도가 삽시간에 돌변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상당히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목소리마저 달라졌다.
“준비 끝났습니다, 선생님.”
“시작하자.”
수술하는 중에도 듣기 민망할 정도로 아부를 떨고 있었다.
“선생님 손은 정말 빠르고 정확하십니다. 이런 거를 배우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김지훈은 한숨만 쉬었고, 마취과 선배와 간호사들도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들의 말 때문에 살짝 좋아졌던 기분이 완전히 망가졌다.
수술이 끝나고 병동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표정이 아침보다 더 나빠졌다. 그때 생판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달려와 김지훈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혹시 3일 전 밤 1시쯤에 응급실에 오셨던 선생님 아니신가요?”
어레스트(arrest:심장 정지)가 난 환자를 본 날이었다.
“3일 전이면 그때 제가 있긴 했는데요.”
“그 선생님이 맞네. 아이고! 여기서 선생님을 보네요. 우리 남편을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환자의 부인이었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전 한 일이 없어요. 내과 선생님하고 응급실 의사들 덕분이죠.”
“그런 말 마세요. 전진우 선생님이, 선생님 아니었으면 우리 남편 죽었을 거라며 얼마나 칭찬을 하셨는데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갑작스러운 일에 김지훈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가기가 좀 그랬다. 솔직히 환자 상태도 무척 궁금했다.
“환자분은 괜찮으세요?”
“지금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내일 봐서 괜찮으면 병실로 올라간대요.”
“정말 다행이네요.”
울적했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첫 환자는 살리지 못했지만, 두 번째 환자는 살린 것이다.
물론 전진우의 노력 때문이겠지만, 김지훈이 아니었다면 노력을 기울일 환자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가만,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선생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환자 부인이 부리나케 중환자실에 딸린 보호자실로 들어갔다 나왔다. 양손에 봉봉 두 박스가 들려 있었다.
“이거 드세요.”
“아닙니다. 전 많이 먹고 있습니다. 환자분 돌보시려면 힘드실 텐데 도로 가져가세요.”
“제 성의예요.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해요.”
환자 부인이 한사코 만류하는 김지훈의 손에 박스를 쥐어 줬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우리 남편 퇴원하기 전에 꼭 다시 찾아뵐게요.”
도리어 미안해하던 보호자가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보호자 대기실로 돌아갔다.
멍하니 봉봉 두 박스를 들고 서 있던 김지훈이 복도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회진까지는 여유가 조금 있었다.
김지훈은 1층으로 내달렸다.
‘이거 병동 가져가 봐야 악어가 다 먹을 거야. 그건 내가 못 본다.’
응급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봉봉 박스를 내밀었다.
간호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봉봉이에요?”
“3일 전에 보았던 환자 보호자분이 주셨어요.”
“아! 선생님이 살린 그 환자요?”
김지훈의 얼굴이 살짝 발개졌다.
듣기에 참 쑥스러운 말이었다.
“내가 살리긴 무슨. 그런 말 하지 말고, 이거나 드세요. 하나는 당직실에 주시고.”
“인턴 선생님이 촌지도 받으시고 좋으시겠어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손을 들며 인사를 한 김지훈이 병동으로 향하려다 말고 머리를 톡톡 쳤다. 전진우가 생각난 것이다.
‘전진우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무슨 약을 쓸지도 몰랐을 테고, 전기 충격은 생각도 못 했겠지? 에휴! 그리고 보호자에게 쓸데없는 칭찬은 왜 하셔.’
봉봉 한 박스를 산 김지훈이 내과 병동이 있는 별관 5층으로 냅다 달렸다. 전진우게게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본관 7층으로 향했다.
간신히 회진 시간에 늦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얼굴이 시뻘게진 김지훈이 헐떡거렸다. 손일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너, 왜 그래?”
숨이 턱까지 차오른 김지훈이 손만 저었다.
환자도 의사를 치료한다는 말이 맞았다.
악어와의 일이 저 멀리 사라졌다.
밥 먹을 때도, 병동에서도, 심지어 숙소에 와서도 헤죽헤죽 웃는 김지훈을 본 손일석이 가슴을 쳤다.
“이게 아까부터 왜 이래. 뭔 일이야?”
“몰라도 돼.”
“아이! 자식이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이 무슨 만행이야? 솔직히 말해. 뭐 때문에 미친놈처럼 몇 시간을 혼자 웃고 있는 거야?”
김지훈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자라, 일석아. 형은 간만에 숙면을 취해야겠다.”
“야야, 정말 말 안 할 거야?”
답답함을 못 이긴 손일석이 부르르 손을 떨며 신음까지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