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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5화 (15/1,329)

제8화 두 번째 인투베이션 (intubation:기관 내 삽관) (1)

일찍 잠자리에 든 김지훈이 몸을 뒤척였다.

몸은 피곤한데,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특히 아침에 근 한 시간을 멍하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아무리 인턴이라도 명색이 의산데, 꿰다 놓은 보릿자루도 아니고.’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슬슬 잠이 몰려왔다.

잠결에 손일석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씨팔. 하는 일도 없이 왜 붙잡아 놓는 거야? 자냐?”

손일석이 김지훈을 흔들었다.

가물가물 잠에 취하던 김지훈이 눈을 비볐다.

“왜, 인마. 몇 시야?”

“12시 반이다. 성질나서 잠도 안 오네. 오프는 밥 먹고 가고, 당직은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할 때만 부르면 되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런 식으로 괴롭히면 좋나?”

“원래는 안 그렇대?”

“넌 인수인계 때 뭐 했어? 귀 좀 열고 다녀라. 현수 돌 때는 딱딱 퇴근 시키고, 당직이라고 따로 부른 적도 없다고 했잖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3주만 참아. 미안하다, 괜히 수처는 해 가지고.”

“악어가 이상한 거지, 네가 미안할 일이 뭐가 있어? 자라.”

손일석이 욕을 해 대며 자기 자리로 갔다.

미안했다. 수처한 것도 문제겠지만, 그보다는 악어에게 개긴 일 때문이 분명했다.

미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루던 김지훈이 뻐근한 목을 돌리며 일어났다.

대책이 없었다.

한 번 더 덤볐다간 생난리가 날 것이다.

사실 항의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원칙대로 하자.’

악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알았다.

슬슬 말려 죽일 거라는 신현수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자존심을 꺾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 편해질까?

몽둥이를 휘두른 사람에게 사과할 수는 없었다.

‘3주를 이대로 돌아야 하나? 가만, 내가 괴로워하면 할수록 악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잖아. 반대로 내가 즐기면 악어가 어떻게 나올까?’

사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즐길 수 없는 일이이었다. 하지만 유용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오히려 악어가 자신을 도와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 히죽 웃었다.

잠자리가 한결 편해졌다.

다음 날 아침.

한 시간 일찍 나온 김지훈이 회진 준비를 마치고 뷰 박스 앞에 섰다.

드레싱을 마친 1년차들이 회진 준비를 하기 위해 X-ray를 걸고 있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시간을 빼앗지 않으며 요령껏 이것저것 물었다.

다들 선배들이다.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후배의 질문에 답을 해 줬다.

악어가 빼앗은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셈이었는데, 첫날부터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애들은 반드시 양쪽을 다 찍어야 하는 거 알지?”

“예. 성장판과 골절을 정확하게 감별하기 위해서라고 배웠습니다.”

“맞아. 특히 관절에 외상을 입은 경우에는 성장판을 다쳤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해. 애들은 골절이 있어도 대부분 수술을 요하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는 꼭 수술을 해야 하거든. 성장판의 골절을 놓치면 어떻게 돼?”

“다친 쪽이 안 자라니까 결국 기형이 되나요?”

“막말로 의사가 멀쩡한 애 병신 만드는 거지.”

소아 환자의 X-ray를 보며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공을 불문하고, 일반 X-ray 판독은 의사에겐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많은 환자가 방사선 촬영을 요했고, 일차적인 판독은 의사들의 몫이었다. 특히 외상은 발생 빈도가 높고, 의료 사고를 막기 위해 미세한 골절까지 볼 수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한 방법은 하나였다

이론만으로 능숙해지는 의사는 없다. 오로지 보고 또 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였다.

1년차들 뒤에서 몇 장의 필름을 더 보며 질문을 던진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가끔씩 하품을 하면서도 필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병동으로 오던 악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뭐가 좋아 입을 벌리고 있어?”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악어 네 덕에 많이 배울 것 같다. 고맙다.’

생각을 바꾼 덕인지, 그날 수술실에서도 일진이 좋았다.

시암이 원하는 대로 척척 움직였다.

4년차들과 김대성은 물론 스태프까지 칭찬을 했다.

“이번 인턴도 쓸 만하네. 신현수 못지않아. 이런 인턴들만 오면 수술이 꽤 수월하겠어. 인턴 선생, 이름이 뭐지?”

“김지훈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 아주 활기 차. 딱 외과 스타일이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김지훈이 신나게 일을 했다.

시암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자 수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술 방법은 달라도 기본은 똑같다. 스태프들의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손놀림을 보면서 김지훈이 외과의 꿈을 키워 나갔다.

메스를 잡는 방법.

뼈까지 드러난 팔과 다리의 상처를 수처하는 법.

그뿐인가?

마취과 의사들이 인투베이션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정말 배울 것이 끝도 없었다.

한결 여유가 생긴 탓일까?

눈빛 하나가 자꾸만 보였다.

‘정말 눈 하나는 끝내주게 예쁘네.’

힐끔힐끔 눈이 돌아갔다.

눈이 예쁜 간호사도 김지훈의 눈길을 의식했는지 결국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에 김지훈이 딴청을 부리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간호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갔다.

문득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훈이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잘 시간도 부족하고, 악어가 점점 조여 오고 있는 이 판국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오늘은 김지훈이 당직이었다.

병동 스테이션에 앉아 목을 빼던 김지훈이 뷰 박스로 향했다. 최성훈이 드레싱을 끝내고 환자 X-ray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묻자 최성훈이 김지훈을 빤히 쳐다보았다.

“너, 정형외과 할 거야?”

“왜요?”

“지금 네 행동이 그렇잖아.”

“솔직히 정형외과가 멋있기는 하지만,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적당한 아부성 멘트에 최성훈이 웃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응급실 돌 때 보니까 외상 환자가 제일 많더라구요. 나중에라도 실수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는 기본으로 깔아야 하지 않나요?”

최성훈이 새로운 X-ray를 걸며 말했다.

“너 같은 후배가 내 밑으로 왔으면 좋겠다. 적성 그거 별거 아니다. 하다 보면 다 적응하게 돼 있어. 설마 악어 때문은 아니지?”

김지훈이 웃기만 했다.

악어가 아니더라도 목공소 스타일은 아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악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지 심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야! 인턴, 이리 와.”

“예, 선생님.”

“이거, 토요일에 발표할 거니까 인원수에 맞게 복사해 와.”

환자에 대한 리포트였다.

낮에 병동 담당인 손일석에게 시켰어야 할 일을 미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차피 인턴의 일이었고, 상관도 없었다. 웃으면 웃을수록 악어도 약이 오를 것이다.

“40부 정도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평상시와 전혀 다름이 없자 악어의 얼굴이 더욱 못마땅해졌다.

정형외과 의국에서 복사를 한 후 다시 병동으로 오자 악어가 새로운 심부름을 시켰다.

“담배 하나 사 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순간 다가온 생각이었지만, 김지훈은 치미는 화를 꾹꾹 눌렀다. 부딪쳐 봐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그래, 일석이 말대로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무슨 담배요?”

“88라이트.”

악어가 복사해 온 리포트를 보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돈은요?”

이제야 악어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700원도 없어?”

당연히 있다. 하지만 돈까지 써 가며 담배 심부름을 할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악어가 기가 차다는 듯 천 원짜리 한 장을 던졌다.

“돈 달라는 새끼는 처음 보네. 빨리 갖다 와.”

‘나도 담배 사 오라는 놈은 처음 봐요. 사람 참 못됐네.’

웃으려고 해도 웃음이 안 나왔다. 후배지만, 나중에는 결국 동료가 된다. 나이가 들면 2살 차이는 차이도 아닐 것이다. 악어가 재수를 안 했으면 한 살 차이일지도 몰랐다.

병동 의국을 나온 김지훈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자 최성훈이 물었다.

“어디 가?”

“담배 사러요.”

최성훈도 고개를 흔들며 말을 잃었다.

담배를 사 오기가 무섭게 악어가 새로운 심부름을 시켰다.

“볼펜 하나 사 와.”

“이것도 복사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잔심부름에 12시까지 잠시도 앉아 있지 못했다. 김지훈이 결국 한숨을 쉬고 말았다.

‘정말 쪼잔함의 극치네. 치사한 새끼, 이런 식으로 날 괴롭히면 기분이 좋나?’

웬만하면 욕을 하지 않는 김지훈이었지만, 악어만 보면 욕이 나왔다. 악어 덕에 인턴들이 가장 질겁하는 신세가 됐다.

잡잡이!

잡다할 때의 잡(雜).

일을 뜻하는 잡(Job).

잡다한 일만 하는 인턴을 뜻하는 최악의 별명이었다.

앞으로 당직 때는 꼼짝없이 잡잡이가 될 판이었다.

숙소로 향하며 마음을 다스린 김지훈이 억지로 웃었다.

‘피스(peace)!’

인상 써 봐야 손해만 볼 뿐이었다.

어느 과든 적응이 돼 익숙해지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이 이어진다.

달리는 인턴.

시암을 움직이는 수술실 인턴과 병동 인턴.

잡잡이.

손일석이 울분을 참지 못했다.

오늘도 악어 때문이었다.

“참아, 이제 반 남았어. 분위기가 험해서 그렇지, 다른 선생님들은 좋잖아.”

“아직도 반이나 남았어? 너, 어젯밤 일 모르지? 1년차들 죄다 깨졌다. 살벌하게 때리더라. 이거 불안해서 살겠냐?”

“뭐 때문에?”

“이유가 한두 가지냐? 사소한 것들 모아 모아서 한 방에 터뜨린 거지. 악어는 몽둥이질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없나 봐.”

김지훈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김대성의 말대로 하루 이틀 내에 고쳐질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분위기가 더 나빠지면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정신 바짝 차리자. 요새 우리를 보는 악어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고 있어. 삐끗하면 우리도 때릴지 몰라.”

손일석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때리기만 해 봐라. 가만 안 있는다, 내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이왕이면 안 맞고 지나가는 게 낫지. 이번 주말 오프 때 싹 풀고 와.”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나이트나 가야겠어.”

“나이트? 같이 갈 사람은 있고?”

“그게 문제지. 여자들은 왜 날 못 알아볼까. 마음만 맞으면 풀코스로 쫙 쏠 텐데 말이야.”

실없는 소리였지만 손일석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친구란 이런 것인지도 몰랐다.

“돈도 없는 놈이.”

“짜샤! 그 정도는 있다. 그리고 다음 주에 월급 나오잖아.”

김지훈의 귀가 번쩍 뜨였다.

월급!

드디어 사회에 나와 첫 월급을 받는 날이 멀지 않았다.

힘들게 졸업을 하고 의사가 돼 월급을 받는다니,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직하는 내내 온갖 잡다한 심부름을 다 했다.

마지막 심부름을 하고 나니 12시 5분 전이었다. 그런데 악어가 두툼한 논문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복사해 와.”

복사기는 4년차들이 있는 의국에 있다.

이 밤에 복사하러 올라갔다가는 욕만 된통 먹을 것이다.

아니, 인턴에겐 절대적인 금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의국에서는 안 될 텐데, 이 시간에 어디서 복사를 합니까?”

악어가 실실 웃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12시 5분 전이었다.

“원칙대로 하자. 복사하고 퇴근해.”

김지훈의 등 뒤로 컴퓨터 오락 소리만 들렸다.

머리를 쥐어뜯던 김지훈이 손을 튕겼다.

‘원무과!’

얼굴에 철판만 깔면 되는 일이었다.

부랴부랴 응급실 바로 옆에 있는 원무과로 내려간 김지훈이 사정을 했다. 원무과 직원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복사기를 가리켰다.

위이잉! 철컥! 위이잉! 철컥!

멍하니 논문을 복사하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도 복사는 멀었고, 종이까지 떨어졌다.

원무과 여직원이 눈을 흘기며 A4용지를 가져왔다.

‘나이가 한두 살도 아니고, 악어도 참 가지가지 한다. 이놈의 복사기는 왜 이렇게 느려.’

복사기까지 말썽이었다.

1시가 거의 다 돼서야 복사가 끝났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원무과를 나온 김지훈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다 걸음을 멈췄다. 응급실이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고함 소리에 낯익은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현수 목소리인 것 같은데. 저 자식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 놈이 아닌데.’

혹시 시비라도 붙은 걸까?

신현수의 성격에 그럴 리도 없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 김지훈이 응급실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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