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화 (12/1,329)

제6화 사람 사는 세상 (2)

“외과 쪽이 다 그렇지, 뭐.”

김지훈의 말에 신현수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 수술실에서 보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지 일반 외과나 신경외과나 똑같더라.”

“그런데도 니들은 외과를 하고 싶어?”

“그럼 넌 뭐 할 건데?”

대답이 궁한지 손일석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신현수가 정형외과에서 요구하는 인턴의 일을 인계했다.

“이 정도면 대충 다 전한 것 같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 그럼 가 볼게.”

김지훈이 일어서는 신현수를 불러 앉혔다.

“현수야, 시암을 다루기가 어렵냐?”

“너, 운전면허 있어?”

“있긴 한데 장롱면허야.”

“전진하고 후진할 때 좌우가 바뀌는 것이 운전하고 똑같아. 이게 헷갈리면 오퍼레이터(Operator:집도의)를 건드리게 되니까 문제가 되지.”

“그럼 수술실에서 미리 연습할 수 있나?”

“왜, 악어한테 깨질까 봐?”

“악어는 신경도 안 써. 이왕 도는 건데, 제대로 돌고 싶어. 배워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지 않겠어?”

신현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김지훈과 신현수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이었다.

무엇 하나 바랄 것 없이 풍족하고 집안까지 화려한 신현수와는 달리, 김지훈은 의대를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그런데도 김지훈은 6년 내내 신현수와 등수를 다투었고, 친구나 선후배들과의 관계도 상당히 좋았다.

물론 의사가 된 이상 신현수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사회에서 성공에 필요한 인맥은 학생 때와는 엄연히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겠지만, 묘하게도 신현수는 지금도 김지훈을 일종의 라이벌처럼 의식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갖고 있는 지독한 근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부모 없이 혼자 힘으로 의대 6년을 다녔다.

물려받은 재산으로는 학비만 간신히 댈 정도라고 했다.

6년 동안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탓에 방학 때마다 돈을 벌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한 번도 내색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제 초반 3주가 지났을 뿐이지만 인턴이 돼서도 김지훈은 여전했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이혁민 교수가 찍었다는 사실은 물론 악어와의 일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현수의 목소리가 다소 냉랭했다.

“수술실 간호사들에게 부탁해 봐. 남들 다 잘 때 연습해야 할 테니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알았어. 안 되면 되게 해야지. 고맙다.”

신현수가 나가자 손일석이 호들갑을 떨었다.

“야, 지훈아, 너 어느 과 할 건데?”

“갑자기 그건 왜?”

“빨리 말해 봐. 어느 과야?”

“글쎄, 정형외과는 적성에 안 맞는 것 같고, 일반 외과나 신경외과를 할까 하는데.”

“그럼 신경외과 해야겠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뭔 소리야?”

“너, 언젠가 교수로 남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좋겠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그렇지. 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지. 특히 현수랑 붙으면 확률 제로다.”

“현수랑?”

상당히 궁금한지 김지훈이 손일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쟤 할아버지가 재단 이사장이고, 아버지가 우리 학교 총장님인 건 알지? 형은 교무처장이고.”

“대충은 알지.”

“그러니까 교수를 하려면 현수랑은 다른 과를 해야지. 생각을 해 봐. 답이 딱 나오잖아. 대학은 형이, 병원은 현수가 맡는 거야.”

“그래서?”

“답답한 새끼. 총장님이 쟤를 그냥 평범한 교수로 남기겠냐? 당연히 병원장으로 만들겠지. 병원장을 어느 과가 해? 외과 쪽에서 할 거고, 지금까지 일반 외과에서 쭉 해 왔잖아. 그럼 현수가 어느 과를 해야겠어? 일반 외과 교수가 돼야 응급실 부장에 진료 부장까지 할 거 아니냐. 그다음은?”

“병원장을 하겠지. 그런데 그게 왜?”

“으이구! 그게 네 한계다. 교수가 된다는 놈이 이렇게 세상 물정에 어두울 수가 있나? 교수를 몇 명이나 뽑겠어? 끽해야 삼사 년에 한 명이다. 너, 난킴(의사들 사회에서 예비역을 의미하는 말)이잖아. 현수도 난킴이야. 같은 해에 지원을 해야 한다구. 둘이 붙으면 100프로 네가 떨어진다는 소리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의사가 됐는데 벌써부터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신현수랑 맞붙어 이겨 낼 자신도 있었다. 그 정도의 자신이 없었으면 졸업도 못 했을 것이다.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에이! 재수 없는 소리하고 있어.”

“현실을 똑바로 봐, 인마. 현수가 빠지는 게 뭐가 있냐? 집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공부를 안 해, 그렇다고 노력이 부족해. 현수 저 새끼 생각해 보면 불가사의한 놈이야. 어떻게 없는 집 놈들보다 더 악착같이 공부를 해. 재수 없는 새끼. 나는 근처에도 못 가 본 장학금을 6년이나 타는 새끼가 사람이냐?”

김지훈도 6년 동안 장학금을 탔다.

장학금이 아니면 의대를 다니지 못한다는 절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운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었고, 성공은 누구나 꿈꿀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사람이 아니냐?”

“아! 너도 6년 동안 장학생이었지. 내가 왜 이렇게 재수 없는 놈들과 붙어 다닐까? 하지만 지훈아, 너는 내 술친구니까 특별히 봐준다.”

“고맙다, 눈물 난다.”

“그런데 너는 그렇다 치고, 현수가 어떻게 난킴이지? 사지 멀쩡하고 부모님 다 살아 계시는데, 우리가 모르는 하자라도 있나?”

손일석이 말을 하다 말고 김지훈의 눈치를 보았다.

김지훈이 6방(6개월 방위)을 다녀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떠오른 것이다.

평소에 내색은 안 했지만, 아직도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언젠가 술에 취해 부모님이 살아 계셔서 군의관을 가는 편이 훨씬 행복했을 거라는 말도 했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의 아들인가 보지.”

김지훈이 가벼운 목소리로 어색함을 지웠다.

따르르릉!

응급실 콜이었다.

김지훈이 가운을 입자 손일석이 투덜거렸다.

“에이! 내일 듀틴데 오늘 놀지도 못했네. 그나저나 우리 주당들끼리는 언제 술 먹냐? 정형외과 돌 때는 안 되고, 다음 텀에서나 자리 한번 만들자. 너, 그다음이 일반 외과지?”

“맞아, 넌.”

“나? 우화화화! 들어는 봤나. 임. 상. 병. 리. 정형외과만 돌고 나면 고생 끝 낙원이다.”

“거기, 지겨워 죽는단다.”

“어? 네가 그럴 어떻게 알아?”

“서연이가 그러더라.”

“서연이? 서연이를 언제 만났어? 뭐야, 둘이 나 모르게 뭔 짓이라도 하는 거야? 어떤 관계야?”

손일석이 벌떡 일어나며 김지훈을 막아섰다.

“멀쩡한 애 잡지 말고, 쓸데없는 소리도 하지 마라.”

손일석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이 자식 봐라. 우리 과 퀸카를 혼자 만나고 입을 싹 씻네. 솔직하게 말해. 둘이 뭐 했어?”

“술 마셨다, 인마. 됐냐?”

김지훈이 힐끗 손일석을 째려보며 당직실을 나갔다.

“어디 가, 인마?”

“환자 보러 간다. 손 선생님, 오프시죠? 어서 가서 노세요. 아니면 잠이나 주무시든지.”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떤 말을 하든 손일석과의 대화는 항상 즐거웠다. 아마도 6년을 쌓아 온 우정 때문일 것이다.

‘일석아, 네가 내 친구여서 정말 고맙다.’

여느 때처럼 응급실이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환자 2명이 한계인 줄 알았던 정갑수의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강해졌다. 무려 4명이나 되는 환자를 능숙하게 보고 있었다.

‘갑수 형도 고맙네요.’

환자들로 마지막 날까지 밤을 샜다.

김지훈이 그동안 함께했던 간호사들과 작별을 했다.

모처럼 주말 근무에 걸린 수간호사가 무척 아쉬워했다.

“김지훈 선생님, 응급실 또 도시나요?”

“겨울에 다시 와요.”

“그때는 펄펄 나시겠네요.”

“그렇게 될까요?”

“그럼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생님은 확실해요. 10년 넘게 응급실에서 근무한 사람의 안목이니까 믿어도 좋아요.”

어깨가 으쓱해질 말이었지만, 김지훈이 짐짓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말뿐이겠지만, 고맙네요.”

수간호사가 즐겁게 웃었다.

“이혁민 교수님도 기대를 많이 하실 거예요. 어쩌면 언제 다시 응급실을 도는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죠. 겨울에 또 봐요.”

“예, 그럼 잘 지내요.”

“김지훈 선생님, 심심하면 놀러 오세요.”

엠아이(MI:심근 경색) 환자를 같이 보았던 간호사였다.

김지훈이 큰일 날 소리라는 표정을 지으며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시원섭섭했다. 어쩌면 인턴의 꽃은 환자를 스스로 봐야 하는 유일한 곳, 응급실일지도 몰랐다.

비록 대부분 문진에 불과했지만, 자신의 손을 거쳐 간 환자들이 건강하기를 바랐다.

매점에 들러 음료수 한 박스를 샀다.

“응급실 간호사들에게 전해 주시겠어요.”

누구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직업을 떠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의료 기사들 모두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가만, 구급 기사들 문제를 잊고 있었네? 사망자를 먼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지?’

응급실로 몸을 돌리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시며 숙소로 향했다. 인턴은 물론 전공의들도 행정적인 문제까지 관여할 위치가 아니었다.

***

3주 만에 빨래를 했다.

6년이 넘도록 해 온 일이었다. 능숙하게 때가 덕지덕지 묻은 속옷과 와이셔츠를 빨고, 마지막으로 가운까지 빨았다.

까맣게 변한 물을 보며 김지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소리겠지.’

개운하게 목욕까지 하고 난 김지훈이 저녁 무렵 수술실을 찾았다. 서울은 응급 수술이 많지 않은 데다, 정규 수술이 없는 일요일인 탓에 수술실이 조용했다.

빨간 호출 버튼을 눌렀다.

삐이이! 삐이이!

인터폰에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인턴입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부탁이요?)

“다음 주부터 정형외과를 도는데, 시암 좀 볼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 문이 열렸다.

우측에 스태프들과 인턴, 그리고 전공의들의 탈의실이 보였다.

좌측에서 수술실로 연결되는 문이 열리며 간호사 한 명이 나왔다. 수술용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해 눈만 보였다.

“시암을 보신다구요?”

“예. 가능하면 조작까지 해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요?”

“저야 길수록 좋죠.”

간호사가 잠시 고민을 했다.

수술실의 기구나 장비들에 문제가 생기면 일차적으로 간호사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더구나 상당히 고가여서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장비들이었다.

“그럼 30분 정도만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탈의실에서 수술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들어오세요.”

김지훈이 탈의실로 들어갔다.

파란 수술복과 모자, 그리고 옅은 푸른색 마스크.

‘내년에는 나도 수술복을 입고 이곳을 밥 먹듯이 드나들겠지?’

아직은 먼 일이었지만, 수술실로 들어가는 김지훈이 은근한 흥분을 느꼈다.

시암(C-arm)은 X-ray 장비다.

바퀴가 달려 이동이 가능한 본체에 C 자 모양의 팔이 달려 있다. C 자의 위쪽에서 방사선을 쏘면 환부를 지나 아래쪽에서 받아 모니터에 영상을 만들어 준다.

주로 정형외과에서 골절 환자를 수술할 때 제대로 수술이 됐는지 알기 위해 사용했다.

C 자 모양의 팔은 본체의 한 축에 고정돼 360도 회전이 가능하고, 상하로도 움직였다. 문제는 C 자 사이에 항상 환부를 두고 본체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겁기도 무거웠지만, 전진할 때와 후진할 때 핸들 조작 방향이 다르다는 기본적인 사실이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현수가 운전면허를 땄냐고 물어본 이유가 이거였구나.’

끙끙거리며 시암을 운전하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어느새 약속한 30분이 훌쩍 지났지만 영상을 보지 못한 탓에 제대로 조작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간호사실로 향했다.

“여기요.”

난데없는 목소리에 간호사들이 급히 마스크를 착용했다.

‘내가 얼굴 보면 큰일이라도 나나? 왜들 이래.’

김지훈을 보며 일어서던 간호사가 힐끗 시계를 보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어머! 벌써 한 시간이 지났네. 다 하셨어요?”

“아니요. 미안한데, 시암의 전원 좀 켜면 안 될까요?”

“왜요?”

“모니터가 안 되니까 정확하게 조작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전원을 켜고 조금 더 할 수 없을까요? 부탁할게요.”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도 정형외과를 돌기 전에 시암을 미리 연습하려는 인턴들이 가끔은 있었다. 열정은 좋지만, 늦은 밤에 혼자서 기계를 만지는 것만큼 따분한 일도 없을 것이다. 대개 30분도 채우기 전에 말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전원을 켜 달라는 부탁도 처음이었다.

간호사들이 곤란한 눈빛을 보였다.

“내일 아침에 바로 정형외과에서 사용해야 하는데, 시암 고장 나면 난리 나요. 곤란해요.”

“내일 아침에 시암 조작해야 할 사람이 바로 접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어떻게 하지?”

간호사들이 서로만 쳐다볼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많이도 필요 없어요. 딱 10분만 스위치 켜고 해 보면 됩니다. 더는 부탁 안 할게요.”

“10분이요?”

잠시 망설이던 간호사가 앞장서며 다짐을 받았다.

“딱 10분만이에요. 더는 절대 안 돼요.”

“고마워요.”

“그런데 혹시 정형외과 하실 건가요?”

“왜요?”

“한 시간도 넘게 시암을 만지는 선생님은 처음이라 그래요. 전원 켜 달라는 것도 그렇고요.”

“그건 아니고, 그냥 깨지기 싫어서 그럽니다.”

김지훈이 웃으며 답을 하자 간호사의 마스크가 살짝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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