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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1화 (11/1,329)

제6화 사람 사는 세상 (1)

주인아주머니의 눈가가 쫙 찢어졌다.

“악어? 정형외과 악어 말이야?”

“예, 그 악어요.”

“알았어, 내가 혼내 줄게. 어디 우리 지훈이를 괴롭혀. 내 이놈을 잡아다가 가죽을 확 벗겨 버릴까 보다.”

소매를 걷어붙이며 콧김까지 내뱉는 모습에 김지훈이 웃었다. 이럴 때는 정말 이모처럼 느껴졌다.

“이모, 설마 내 이름 나오는 건 아니죠?”

“어머머! 날 어떻게 보는 거야. 눈치가 백 단이다.”

“그럼 이모의 뜨거운 맛을 좀 보여 주세요. 확실하게.”

주인아주머니의 눈초리가 이상해졌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왜요?”

“평소 너답지 않게 말이 많아서. 반가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네 얼굴을 보니까 조금 이상하네.”

“아무 일 없어요.”

김지훈이 잔을 비웠다.

그동안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단 두 잔에 얼굴이 뻘게졌다.

“피곤해 보인다. 천천히 마셔.”

문득 골뱅이 한 접시를 내놓는 주인아주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피부와 굵어진 손 마디마디에 억척같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 속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웃으며 힘차게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항상 웃으시지만, 이모도 정말 힘들게 살아오셨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겠지. 이겨 내자, 힘내자.’

김지훈이 불쑥 잔을 내밀었다.

“이모, 내 술 한 잔 받으실래요?”

“나 한 잔 준다고? 지훈이가 주는 거면 당연히 받아야지.”

김지훈이 빈 술잔을 머리 위에서 흔들며 씩 웃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잔을 비우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쑤시개로 잘 삶아진 골뱅이 속을 쏙 빼 입에 넣은 김지훈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역시 이모네 골뱅이가 최고네. 이렇게 맛있는 거를 왜 무쳐 먹는지 몰라.”

“힘들긴 힘든가 보네.”

“이 정도에 취할 김지훈이 아니잖아요.”

“술 앞에 장사가 어디 있어?”

주인아주머니의 핀잔에도 김지훈이 웃으며 잔을 비웠다.

그때 누군가 반색을 하며 김지훈을 불렀다.

“지훈아.”

동기인 윤서연이었다.

“응? 서연이구나. 오래간만이다.”

동기 여자들 중 가장 늘씬하고 예쁜 윤서연이었다.

170이 넘는 키에 글래머라 할 수 있는 몸매까지, 군침을 흘리는 동기나 선배들이 꽤 많았다. 게다가 집안까지 빵빵하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야말로 미모와 학력에 집안까지 갖춘 완벽한 엄마 친구의 딸이었다.

“정말 오랜간만이네. 혼자 뭐 해?”

“술 먹는다.”

“나, 한 잔만 줄래?”

윤서연이 대답도 듣지 않고 옆자리에 앉자 김지훈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너, 뭔 일 있어?”

“왜, 무슨 일이 있어야 술 한 잔 줄래?”

“그건 아니고. 이모, 여기 잔 하나 줘요.”

김지훈이 두꺼비가 살짝 고개를 내밀 정도로 소주 한 잔을 따랐다.

주인아주머니가 식은 골뱅이를 따뜻하게 데웠다.

김지훈이 술만 들이켜자 윤서연의 눈가가 살짝 찢어졌다.

“지훈아, 너 응급실 돌지?”

“응. 넌?”

“임상 병리.”

“편하냐?”

“편하긴 한데,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야. 가끔 복사 심부름하러 나오는 게 좋다니까.”

“그럼 당직은?”

“없어.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야.”

“그럼 퇴근이네. 집에 안 가?”

“지금 가라고? 왜, 술이 아까워?”

“너, 술 잘 못 먹잖아.”

“상대에 따라 다르지. 괜찮은 사람이랑 먹으면 술도 덜 취하지 않아?”

“그래? 여자들도 우리랑 비슷하네.”

남자 동기들이나 선후배들과는 여건이 되면 술자리를 했지만, 여자 동기들과는 거의 자리를 하지 않은 김지훈이었다. 윤서연도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구나 병원 얘기가 나온 탓에 응급실 환자가 다시 생각났다.

“넌 오래간만이라면서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

“뭐가?”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아주머니가 가슴을 쳤다.

‘어이구! 저렇게 눈치가 없으니 아직도 여자 친구가 없지.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겠네.’

“우리 같이 한잔할까?”

“이모가 술을 먼저 권하고, 웬일이에요. 좋죠.”

“건배. 우리 서연 씨도 건배?”

술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단숨에 술을 털어 넣은 윤서연의 얼굴이 빨개졌다.

“서연아, 너 그러다 취한다. 집에 가라.”

“지금 가라고?”

“그래, 취하면 곤란하다. 나도 이것만 먹고 들어갈란다.”

김지훈이 반도 안 남은 소주를 흔들었다.

갑자기 코웃음을 친 윤서연이 화제를 돌렸다.

“현수 다음 스케줄이 응급실이지?”

또 응급실이다. 김지훈이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신현수? 그런가.”

“넌 텀도 끝나 가는데, 다음에 누가 오는지도 몰라?”

“애먼 일이 많아서 신경을 못 썼네. 인수인계 잘하면 되잖아. 현수가 오면 응급실 잘 돌아가겠네.”

“그치? 우리 동기 중에 제일 엑설런트하니까 잘할 거야. 정형외과에서도 꽤 칭찬을 하더라.”

“현수가 정형외과 돌아? 난 응급실 다음이 정형외관데, 잘됐네.”

‘악어가 문제지.’

김지훈이 악어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매 맞은 게 뭐 좋은 일이라고 입에 담기도 싫었다. 기분만 더 꿀꿀해졌다.

“걔는 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 어쩜 그렇게 일을 잘하는지 몰라. 정형외과에서 칭찬받기가 쉽지 않잖아.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고, 공부도 잘하고. 왜 여자 친구가 없는지 몰라. 나라면 꽉 잡고 놓지 않을 텐데 말이야.”

“맞아, 난놈이지. 아까우면 네가 잡지 그래.”

윤서연이 묘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술 이것만 마실 거면 커피라도 할래?”

“나, 커피 안 좋아해.”

김지훈이 단박에 말을 잘랐다.

아무리 동기라지만 여자다.

윤서연의 자존심이 무참히 뭉개졌다.

“알았어. 나, 갈게.”

“응, 잘 가라.”

김지훈은 의자에서 엉덩이도 떼지 않았다.

윤서연이 눈을 흘기며 말도 없이 사라졌다.

주인아주머니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쳤다.

“에이구, 이렇게 눈치가 없나? 지훈아, 너 이래서 결혼이나, 아니 연예나 하겠니?”

“왜요?”

“윤서연이라고 했지? 너한테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도 모르겠어? 저런 여자를 어디서 구해? 빨리 따라가서 최소한 버스 타는 거라도 보고 와. 다른 놈들이 침 바르기 전에.”

“무슨 소리예요?”

주인아주머니가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널 앞에 두고 현수인지 누군지 칭찬할 때 딱 감을 잡아야지. 그리고 눈빛 못 봤어? 이럴 때 보면 너도 참 답답해.”

김지훈이 웃었다.

이런 판국에 무슨 여자란 말인가?

그것도 동기를 말이다.

“이모, 내 눈에 쟤는 여자로 안 보여요.”

“아이구! 눈이 그렇게 높으셔? 내가 보기엔 과분하다 못해 넘치네요.”

“과분하긴 하죠. 저도 갈게요. 다음 오프 때 또 올까요?”

“그때는 예쁜 색시 하나 옆에 앉혀 봐.”

“그러죠, 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자들이 그냥.”

“그냥 뭐?”

“그냥요. 하하하.”

김지훈이 마지막 잔을 비웠다. 술과 함께 응급실 환자도 떠나보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모,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의사되더니 내 걱정을 다 하네. 오래오래 살 테니 걱정 마. 고맙다, 지훈아.”

소주 한 병에 꽤나 취기가 올랐는지 김지훈이 비틀거렸다.

손을 흔들며 윤서연이 사라진 방향이 아니라 병원으로 가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혀를 찼다.

김지훈은 더욱 환자에게 집중했다. 환자들의 상태를 더욱 세심하게 살폈고, 그에 따른 적절한 치료와 필요한 검사를 알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직도 환자의 죽음에 대한 기억은 생생했지만, 그때의 감정은 차츰 희미해져 갔다. 새로운 환자들이 무사히 응급실을 나설 때마다 마음의 상처가 지워지고 있었다.

의사만이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도 의사를 치료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곧 평상시와 다름없이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결코 흐르지 않을 것 같던 응급실의 시간도 흘렀다. 그리고 드디어 응급실 마지막 근무를 맞이했다.

회진을 마친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불렀다.

“다음에는 어느 과를 도나?”

“정형외과를 돕니다.”

“거기서도 열심히 해라. 무슨 과를 하든 다 도움이 될 거다. 그동안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면 응급실 근무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기관 내 삽관 같은 술기는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외래로 향하는 이혁민 교수를 보며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날 밤, 응급실을 찾아온 신현수가 김지훈을 보자마자 웃었다. 김지훈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떡이 진 머리에 이러저런 얼룩으로 지저분해진 가운과 까만 때가 묻은 와이셔츠의 목깃.

이제 막 목욕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단정하고 말끔한 신현수와는 정말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하긴 학생 때부터 단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신현수였다.

“응급실이 힘들긴 힘든 모양이다.”

“힘들지. 정형외과는 안 힘드냐?”

“그럭저럭 할 만해.”

김지훈이 콧소리를 냈다. 신현수가 할 만하다면 만만치 않다는 소리였다. 악어와의 일까지 겹쳤으니 고생길이 확실했다.

“일석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일석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당직실에 들어왔다.

“현수야, 내일 인수인계하면 얼마나 좋냐. 꼭 내가 오프인 날 저녁에 해야겠어?”

“미안하다. 시간이 지금밖에 없네. 나도 지금 지훈이한테 응급실 인계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럼 내가 먼저 받을까?”

김지훈이 응급실을 돌며 틈틈이 적은 것을 내밀었다.

“별거 없다. 환자 보고 노티만 잘하면 돼. 딱 하라는 것만 하면 문제없고, 하지 말라는 거 하면 나처럼 맞을 수도 있어. 환자들 보면서 주의해야 할 점은 다 적었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인계장을 보던 신현수가 웃었다.

“역시 김지훈답다. 너무 자세하게 적어서 특별히 더 물어볼 것도 없겠다.”

“현수야, 나도 한몫했어.”

“일석아, 너도 고맙다. 그런데 악어랑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훈아, 너 정말 오더도 없이 수처했어?”

“오더가 없긴.”

손일석이 나서자 김지훈이 서둘러 입을 막았다.

뒤늦게라도 오더를 받은 사실을 악어가 알면 정형외과 1년차인 최성훈이 더 큰 곤욕을 치를지도 몰랐다.

“맞아, 오더도 없이 수처했어. 그 덕에 열 바늘이나 꿰맸다. 나중엔 지겹게 하겠지만, 좋긴 좋더라.”

“지겹게? 너, 외과 할 거냐?”

신현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응. 과는 못 정했지만, 일단 외과 쪽을 선택하려고. 넌?”

“나도 외과를 할 생각이야.”

“너도 외과 스타일이긴 하지. 그건 그렇고, 정형외과에서 우린 뭘 하냐?”

신현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일석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지훈이부터 병동을 맡을지, 수술실을 맡을지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악어가 단단히 벼르고 있어. 인턴 이름도 안 부르는 선배가 네 이름에 다음 텀으로 오는 것까지 다 알고 있더라.”

손일석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악어가 지훈이 죽인대?”

“비슷하지 않겠어? 실실 비웃으며 말려 죽이겠지. 아무튼 복불복이지만 병동에서는 악어를 자주 봐야 하고, 수술실에서는 아주 가끔 보겠지만 훨씬 더 심할 거야. 정형외과 수술실 분위기가 어떤지 너희들도 잘 알잖아.”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신현수의 말을 들으니 악어라는 별명이 왜 생겼는지 알 만했다.

한 번 물면 결코 입을 벌리지 않는 짐승.

‘그래 봐야 3주다. 한 번 더 물면 나도 물지, 뭐.’

“일석아, 너 좋을 대로 해. 설마 너까지 건드리겠냐.”

“과연 악어가 그럴까? 아무 일 없어도 괴롭힐 텐데, 너랑 돌면 당연히 나도 건드리겠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김지훈의 영원한 친구 손일석 아니냐. 악어가 자주 출몰하는 병동은 내가 지켜 주마.”

손일석이 주먹을 불끈 쥐며 호들갑을 떨었다.

워낙 친한 사이였지만, 김지훈은 내심 미안했다.

“괜찮겠어?”

“지훈아, 내 생존 능력 알지? 그냥 꾹 참고 비벼 대면 편안한 법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손일석이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고맙다. 그럼 내가 수술실 맡을게. 현수야, 수술실에서는 뭐 해야 하냐?”

“PK 때 봤으니까 일단 힘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시암(C-arm)을 잘 다루는 거야. 수술이 잘 안 되는데 인턴까지 버벅대면 스태프 선생님들도 이리터블(irritable)해진다. 재수 없으면 망치 날아와.”

“에휴! 정형외과는 왜 그런대.”

손일석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차피 전공으로 택할 생각이 아니면 피해 가고 싶은 과였다. 물론 적성이 맞는 사람에겐 그마저 멋있어 보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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