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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화 (7/1,329)

제4화 가혹한 한 주 (1)

새벽부터 출장 준비를 한다고 바삐 움직이다 팔에 열상을 입은 환자였다.

다행히 정형외과 1년차와 연락은 됐다. 완전히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100일 당직 중 이제 2주가 지났을 뿐이었지만 정신적, 체력적 한계에 몰린 것이다. 그동안 오프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우측 팔에 발생한 열상으로 내원한 환자입니다. 길이는 10센티미터 정도 되고, 서브큐(subcutaneous:피하 조직)는 깊지 않습니다.”

웅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잘 안 들립니다.”

(그러니까… 흐음, 사진 찍고… 으응! 뭐냐, 수처해.)

술에 취한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어떻게 하라구요?”

(으음… 일단… 사진 찍고. 어, 뭐냐, 네가 수처하라구.)

“사진 찍고 제가 수처하라구요?”

(그래.)

“선생님,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뚜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다시 잠든 모양이었다.

다른 과도 아닌 외과 1년차가 노티를 받고도 내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인턴에게 수처까지 하라고 하다니,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간호사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거 어떻게 하죠?”

“일단 사진부터 찍고 다시 노티 해야죠.”

“그래야겠죠? 그럼 포암(forearm) 에이피 라테랄(AP & Lat)부터 찍어요.”

이런 경우 차팅은 금물이었다. 김지훈이 버발(verbal:구두) 오더를 내자 간호사들도 요령껏 시간을 끌었다.

천천히 환자를 옮기고, 방사선 필름도 최대한 늦게 찾아왔다. 그래야 30분 정도였다. 일단 환부를 임시로 소독만 한 김지훈이 다시 노티를 했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질질 늘어졌다.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노티 드린 환자 X-ray 나왔습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다 전화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 받던 자세 그대로 졸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X-ray 나왔다구요!”

김지훈이 전화기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지르자 잠시 후 짜증 섞인 답이 돌아왔다.

(네가 수처해.)

“그러다 큰일 납니다.”

(아! 몰라, 씨발. 일단 네가 수처해.)

“차팅은요?”

(몰라, 기다려.)

정형외과 1년차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쩌지?”

경험이 있는 간호사들도 말을 하지 못했다.

김지훈이 초턴인 것도 문제였지만, 외과 1년차들이 100일 당직 기간이라는 사실이 더 큰 문제였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1. 1년차가 내려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 약간의 욕을 먹고, 1년차만 작살이 난다.

2. 수처를 한다. 걸리면 1년차와 함께 박살이 난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안 걸리고 마무리만 깨끗이 하면 문제가 없다.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5시 45분이 조금 넘었다.

이 시간에 정형외과 이삼 년차들이 응급실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최소한 한 시간 이상의 여유가 있었다.

‘할까, 말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때 환자가 침대에서 내려와 다가왔다.

“환자분,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정형외과 선생님이 오실 겁니다.”

“그래요? 제가 오늘 출장을 가야 해서 6시 반에는 나가야 합니다. 빨리 안 될까요?”

정중한 말투였지만, 무척 급한 눈치였다. 그 점이 김지훈을 더욱 난감하게 했다.

간호사에게 눈짓을 하자 고개를 저었다.

1년차와 연락이 안 된다는 소리였다.

‘후우! 팔이 찢어진 채로 출장 가라고 할 수도 없고, 꿰매자니 걸리는 게 많네. 윗년차들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솔직히 욕심도 났다.

서울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삼겹살에 대고 수백 바늘도 넘게 봉합 연습을 했다.

외과 1년차들이 봉합할 때마다 유심히 살피며 시늉을 내곤 했다. 제대로 꿰맬 자신이 있었다.

갈등하던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써전의 기본인 수처를 할 기회다. 하자. 한 번이라도 더 해 봐야 능숙해지지. 재수 없이 걸리면… 그냥 내가 책임지지,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수처 준비해요.”

간호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처하시려구요?”

눈빛이 묘했다. 초턴이 감히 수처를 한다고 나서는 것도 놀랍지만,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눈빛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은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은 몇 번 준비할까요?”

“나일론 3번, 4번 준비해요.”

실은 맞게 골랐다.

처치실로 들어가 환자를 앞에 둔 김지훈이 잠시 숨을 골랐다. 은근한 긴장과 흥분이 다가왔다.

수술용 장갑을 끼고 상처를 소독했다.

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난 포를 이용해 상처만 노출시켰다.

“리도카인(국소 마취제).”

5시시 주사기를 이용해 환부를 마취시켰다.

상처가 깊지 않아 3번보다 가는 나일론 4번을 선택했다.

드디어 첫 바늘이다.

칼처럼 날이 선 바늘이 피부를 가볍게 뚫었다.

1센티미터 간격으로 1바늘씩 10바늘을 봉합했다.

예쁘게 봉합된 상처를 보며 김지훈이 웃었다.

‘내가 봐도 잘 꿰맸네.’

다시 소독을 하고 거즈를 덮은 다음 압박 붕대를 감았다.

봉합은 무척 간단한 술기였지만, 이제 갓 의사가 된 초턴들에겐 어려운 일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이 일어나다 말고 멈칫했다.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정형외과 3년차가 빤히 보고 있었다.

학생 때부터 잘 아는 선배였지만, 김지훈을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김대성 선생님.”

“왜 인턴 선생이 수처를 해? 1년차는 어디 갔어?”

김지훈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노티는 됐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수처를 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1년차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됐습니다.”

“그런데?”

“환자분이 시간이 없다고 하셔서, 제 임의대로 수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김대성이 아무 말 없이 스테이션으로 가 차트를 뒤적였다.

의사들의 차팅은 환자에 관한 것뿐이지만, 간호사들의 기록은 달랐다. 노티를 한 시간부터 환자에 대한 치료가 끝날 때까지 벌어진 일은 모두 기록을 했다.

1년차에게 노티 됐으나, 전화상으로 X-ray 오더 내고 수처하라고 함.

딱 걸렸다.

김대성이 다시 물었다.

“인턴 선생, 정말 오더 없이 수처했어?”

“예. 곧 내려오신다고 했는데, 제가 기다리질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어.”

평소 웃음이 많던 김대성이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병동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큰일 났네. 어떻게 3년차가 이 시간에 나타나?’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김지훈 선생님, 금방 들킬 거짓말은 왜 하세요.”

“거짓말이라니요?”

“분명히 노티를 했고, 전화상으로 오더 받았잖아요. 김대성 선생님이 그걸 모를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간호 기록까지 보고 갔어요.”

아차! 간호 기록을 생각하지 못했다.

전후 사정을 모두 알았을 테니, 1년차와 함께 깨지는 일만 남았다.

“그래도 김대성 선생님이 실밥을 풀지는 않았네요.”

“무슨 소리예요?”

“밑의 연차들이 수처한 게 마음에 안 들면 바로 풀어 버리고 본인이 다시 하는 선생님이에요. 유명한데, 몰랐어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봉합을 잘했다는 소리였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 손일석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잠이 떨 깼는지 연거푸 하품을 하며 물었다.

“하암! 자도 자도 졸리네.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왜 그래?”

“사고 쳤다.”

“무슨 사고?”

잠이 확 달아났는지, 손일석의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사정을 들은 손일석이 혀를 찼다.

“너, 미쳤구나. 수처를 왜 해? 1년차만 깨지면 되는 일에 왜 끼어들어서 같이 깨져. 정형외과가 말로 끝낼 과도 아니잖아.”

“난리 나겠지?”

“난리뿐이겠어? 들리는 말로는 쇠파이프로 때린다더라.”

“쇠파이프로?”

김지훈이 깜짝 놀라자 손일석이 손을 저었다.

“설마 진짜 쇠파이프로 때리겠냐. 그냥 과가 험하니까 하는 소리겠지. 에이! 솔직히 말해서 수처한 게 잘못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말로 위로가 될 상황이 아니었다.

이혁민 교수가 회진을 돌 때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더니, 딱 맞는 말이네. 아우! 신경 쓰여. 부를 거면 빨리 부르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김지훈은 깜짝 놀랐다.

봉합 한 번 하고, 하루 종일 안절부절못할 줄은 몰랐다.

드디어 정형외과에서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마음이 통하는 손일석은 오프를 갔고, 서로 말도 잘 하지 않는 정갑수가 듀티였다.

“갑수 형, 정형외과 좀 갔다 올게요.”

“빨리 내려와라. 곧 환자들 몰려올 시간이다.”

참 매정한 인간이다.

김지훈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정형외과 의국으로 향했다. 본관 7층이 가까워질수록 한숨만 나왔다.

의국 앞에서 1년차를 만났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제가 잘 처리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내가 미안하지. 악어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날 무척 싫어하거든.”

“왜요?”

“학생 때 악어한테 개긴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일지도 몰라. 거의 싸울 뻔했거든. 넌 그냥 사실대로 말해. 그러면 아무 일 없을 거야. 들어가자.”

학생 때라지만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악어와 맞장을 뜰 뻔했다니, 1년차도 성깔이 꽤나 있는 모양이었다. 제법 선배들을 많이 아는데, 이런 선배를 몰랐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런 일을 잊을 악어가 아니지. 선생님도 고생길이 활짝 열렸네요.’

함께 한숨만 푹푹 쉬다 들어갔다.

악어다!

최악의 경우였다.

김지훈과 1년차를 번갈아 노려보는 악어의 눈빛이 살벌했다. 여차하면 주먹부터 날릴 기세였다.

“너였냐? 네가 정말 수처했어?”

“예.”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네. 노티 했어, 안 했어?”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1년차 저 새끼가 너보고 수처하라고 오더를 냈다는 말이네.”

“아닙니다.”

“어쭈, 그럼 뭔데?”

악어는 전후 사정을 확실하게 모르는 것 같았다.

김지훈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초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술기를 한 것은 사실이었다.

“환자가 급하다고 해서 제가 수처했습니다.”

악어가 콧방귀를 뀌었다.

“지랄하네. 솔직하게 말해. 그럼 넌 빼 줄 테니까. 저 새끼 때문에 너까지 맞을 필요는 없잖아. 오더 받았지?”

“아닙니다.”

“내가 기회를 줄 때 잡아라. 저 새끼가 사고 칠 줄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넌 사실대로만 말해. 인턴 주제에 우리 의국 일에 끼어들다 뒈지게 맞지 말고.”

악어가 몽둥이로 탁자를 탁탁 치며 웃었다. 어차피 1년차는 내 손에 죽었다는 표정이었다. 왠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인턴 주제에? 인턴은 의사 아니냐? 아무리 우리가 인턴이고, 밑의 연차지만 말끝마다 새끼가 뭐야? 선배면 다가 아니잖아. 솔직히 말하면 난 빼 준다고? 사람 갖고 노네.’

악어의 말과 행동에 화가 났다.

1년차의 오더를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한다고 빼 줄 인간도 아니었다. 오기 비슷한 것이 발동했다.

“아닙니다, 제가 수처했습니다.”

악어가 흥분했다.

“이 새끼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네. 너, 내가 우습게 보여?”

“아닙니다.”

“아냐? 좋아, 네가 수처를 했다 이거지. 이 씨발 놈아, 인턴이면 100일 당직이 뭔 줄은 알 거 아냐? 정형외과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인턴 따위가 오더도 없이 마음대로 수처를 해? 이 새끼들, 오늘 내 손에 둘 다 죽었어.”

험한 욕이 터졌다.

악어가 팔을 걷어붙였다.

“엎드려.”

80년대 의대는 무척이나 권위적이었다. 체대 못지않게 구타가 횡행했다.

김지훈이 본과 4학년이 됐을 때, 동기들과 함께 자체적으로 후배들에 대한 구타를 금지했다. 하지만 위의 학번들은 여전히 학생 때의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거기에 정형외과 의국의 살벌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위계가 엄격한 사회라고는 하지만, 같은 의사끼리 이럴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항의를 해야 했지만, 김지훈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꽉 눌렀다.

‘더러워도 참자. 여기서 덤비면 병원 생활 못 한다. 그럼 내 꿈도 사라진다.’

최고의 써전이 되고자 하는 목적에는 모교의 교수로 남고자 하는 희망도 있었다. 선배와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전공의 수련은 다른 병원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교의 병원에 남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김지훈이 엎드리며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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