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운칠기삼 (2)
국물까지 깨끗이 사라졌지만, 포만감은 없었다.
악어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었다.
그래도 웬만큼 배도 채웠으니 잠을 더 자고 싶었지만 숙제가 남아 있었다.
‘당뇨 환자 쇼크에 대한 리포트를 쓰려면 해리슨(내과 교과서)이 있어야 하는데. 에이씨! 내가 학생도 아니고, 인턴에게 무슨 리포트를 쓰라고 하냐.’
은근히 짜증이 났지만 교수의 오더다. 더구나 응급실 근무를 위해서는 확실하게 알아 두어야 할 질환이었다.
김지훈이 내과 병동 의국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전진우 선생님.”
김지훈이 반색을 하자 내과 1년차인 전진우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지훈이구나? 여긴 웬일이야?”
“죄송한데, 해리슨 좀 빌리러 왔어요.”
“해리슨을 왜?”
“이혁민 교수님이 당뇨 환자의 쇼크에 대해 리포트를 써 오래요. 응급실 인턴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전진우가 말없이 웃으며 두툼한 원서를 내밀었다.
“이혁민 교수님이 리포트를 내 줬다고? 자식 아무나 찍는 분이 아닌데, 초장부터 제법이네. 나도 볼일이 꽤 있으니까 빨리 쓰고 가져와. 좋겠다.”
“이게 뭐가 좋아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 네 탓이야, 인마. 응급실에서 뭔가 한 모양이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엑설런트한 인턴들만 찍어. 아마 지금까지 이틀 만에 찍힌 인턴은 없었을걸. 야아! 김지훈, 너 다시 봐야겠다.”
전진우가 다소 과장된 감탄을 터뜨렸다.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잖아. 근무 열심히 해라. 대충 하다가는 제대로 깨질 수도 있어. 가 봐, 나 일해야 돼.”
“예, 리포트 쓰는 대로 가져다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내과 병동 의국을 나온 김지훈이 히죽 웃었다.
‘엑설런트한 인턴만 찍는다고? 흐흐흐, 이혁민 교수님이 사람 볼 줄 아시네.’
우쭐해진 김지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이내 인상을 구겼다. 역시 원서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 때처럼 야마나 요약본을 베낄 수는 없었다.
환자를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꿋꿋하게 원서를 읽고 리포트를 작성했다.
“갑자기 웬 공부냐? 지랄을 해라.”
“어! 역시 장학생은 달라. 인턴이 돼서도 원서를 끼고 사네. 해리슨? 내과 할 생각이냐?”
“여러분! 드디어 인턴 하나가 미쳤어요.”
동기들이 지나가며 툭툭 던지는 말에 김지훈이 한숨만 푹푹 쉬었다. 손에 볼펜을 들고 책을 보는 인턴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어느새 오프인 동기들이 모두 사라지고 당직인 동기들이 하나둘 기어 들어와 코를 골았다.
‘나, 오늘 오픈데.’
리포트 작성은 끝났지만, 이미 밤이 깊었다.
응급실 근무를 생각하면 소주 한잔할 시간도 없었다.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창가에 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이 밝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 인턴 첫 근무 잘 보냈어요. 최고의 써전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창밖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오프일 때의 시간은 근무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잠깐 눈을 감고 떴을 뿐인데 오전 7시 30분이었다.
김지훈이 부랴부랴 씻고는 응급실로 향했다.
7시 50분이었다.
정갑수는 물론 떡이 된 손일석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9시부터 근무잖아.”
“알아요.”
“그런데 왜 벌써 왔어?”
“리포트 제출하러요.”
잠시 후, 이혁민 교수가 나타났다.
정말 시계처럼 정확했다.
응급실 보고를 받고 회진을 돈 후 리포트를 받아 든 이혁민 교수가 물었다. 리포트 때문에 한 시간이나 일찍 출근했다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소변 검사의 의미를 알았나?”
“예.”
“선배들이 습관적으로 검사를 내는 것 같아도 아무 의미 없이 하는 검사는 없다. 모두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필요한 거니까 항상 신경 써라. 나중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기다.”
이혁민 교수가 손일석에게 리포트를 내밀었다.
“손 선생도 공부하레이.”
얼떨결에 리포트를 받아 든 손일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갑수는 궁금하지도 않은지 퇴근을 서둘렀다.
“형, 9시 교대예요.”
“일석아, 지훈이가 왔잖아. 그럼 된 거지? 수고해라.”
뻔뻔한 인간.
손일석이 투덜거렸고, 김지훈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게 속 편한 일이었다.
“지훈아, 그런데 이건 뭐냐? 설마 너, 오프 때 이거 작성한 거야?”
“맞아.”
“너, 뭐 잘못했어? 이건 벌이야, 벌. 그것도 아주 가혹한 벌이지. 황금 같은 오프 시간에 리포트가 뭐냐.”
이혁민 교수에게 깊은 뜻이 있다지만, 할 말이 없었다.
‘이게 엑설런트한 인턴에게만 주는 선물이란다.’
“그건 그렇고, 일석이 너 고생 좀 한 모양이다.”
“고생? 내가 저 인간하고 앞으로 상종을 하면 인간이 아니다. 아니, 손에 장을 지진다. 어떻게 자는 꼴을 못 보냐.”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그래도 넌 하루잖아.”
“에휴! 그래, 내가 너보단 낫다.”
손일석이 한숨을 푹푹 쉬며 당직실로 들어갔다.
오늘도 응급실 근무는 변함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환자들로 북적였다.
김지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차트를 들여다보았다.
수간호사의 관심이 쏠렸다.
“김지훈 선생님,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차트요?”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요? 뭘 보시는 거냐구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진단하고 오더 좀 봐요.”
“나중에 전공을 택하시면 대부분 볼 필요가 없는 환자일 텐데, 뭐 하게요?”
김지훈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많이 알면 좋은 거 아닌가?”
“선생님 같은 사람 처음 봐서 그래요.”
“X-ray까지 보면 놀라 쓰러지겠네요.”
한마디 툭 던진 김지훈이 궁금했던 환자들의 X-ray 필름을 뷰 박스에 걸었다. 어떤 방사선 검사를 했는지, 무엇을 확인했는지 전공의들의 생각을 유추해 보았다.
아무리 경증의 환자라도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책으로 배운 것과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보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진단을 위해 어떤 검사가 필요한지는 물론, 어떻게 환자에게 접근해야 하는지도 매우 어려웠다.
환자를 보면 볼수록 점점 더 큰 한계가 느껴졌다.
차팅과 노티만이 익숙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응급실 근무가 이어졌다.
오프 때면 어김없이 이혁민 교수의 오더가 떨어졌다.
“내일은 흔히 맹장염이라고 부르는 아뻬(Appendicitis:급성 충수 돌기염)에 대해 제출해라.”
“예.”
“니 얼굴이 안 좋네. 이제 겨우 다섯 번짼데, 뭐 불만 있나?”
‘겨우 다섯 번째요? 선생님, 조금 있으면 응급실 근무도 끝납니다. 그 전에 저도 오프 좀 확실하게 가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정말 아뻬뿐이죠?’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김지훈의 목소리가 힘차게 울렸다.
“아닙니다.”
“그래, 수고해라.”
손을 흔들며 응급실을 나서던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김지훈 선생, 그런데 양이 너무 적지?”
“아닙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간절한 마음을 담은 눈빛을 전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지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아뻬에 관한 리포트라면 한 시간 내에 끝난다. 더구나 한글판 외과 책까지 있는 마당이니 더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음까지 전해진 걸까?
“아! 한글판 보지 말고, 새비스톤(Sabiston:외과 원서)을 참조하레이. 아직 한글판은 미약하다.”
인상을 구기던 김지훈이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서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리포트의 양이 적었다.
3주간의 근무 동안 일곱 번뿐인 오프 중 다섯 번째 만에 반 정도는 건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런데 이게 기뻐해야 할 일인가?’
오프만 갔다 오면 뽀송뽀송해지는 정갑수와 손일석이 부럽기만 했다.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여전했지만, 인턴 김지훈도 사람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빨간 라벨에 그려진 두꺼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김지훈이 침을 꿀꺽 삼켰다.
***
어느새 마지막 주가 다가왔다.
이제 6일만 지나면 응급실을 벗어난다.
어느 과를 가도 지금보다 편할 것이다.
‘리포트도 두 번만 내면 끝이구나. 아니, 마지막 오프가 끝나면 정형외과로 가니까 한 번 남았네. 에휴! 오프면 뭐 하나. 응급실 인턴 하면서 리포트 7개를 내는 놈은 나밖에 없을 거다.’
김지훈이 내심 투덜거리면서도 이혁민 교수에게 고마움을 감추지 못했다. 초턴으로서 지금도 모든 것이 서툴렀다. 하지만 리포트 덕에 그래도 제법 수월하게 볼 수 있는 환자가 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응급실에서 가장 많이 보는 질환들이나, 필수적인 처치 방법에 대한 과제를 받았다. 다음 응급실 근무는 지금보다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미에서는 더 잘할 수 있겠지?’
은근한 자신감이 솟구쳤다.
김지훈이 부러운 눈으로 정형외과 1년차를 보았다.
능숙하게 상처를 봉합한 후 환자에게 약 복용과 외래 방문에 대해 설명했다.
“상처가 깊으니까 약 잘 드시고, 모레 외래로 방문하세요. 아니면 개인 병원에서 소독하셔도 됩니다. 실밥은 2주 후에 뽑으니까 건드리지 마시고요.”
“2주나 기다려야 합니까?”
“그 전에 뽑으면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설명을 끝낸 1년차가 바삐 병동으로 향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응급실 근무 끝나기 전에 수처(suture:봉합)라도 해 보고 싶네. 그냥 몰래 한번 할까? 에휴! 그러다 날 잡겠지? 죽고 싶으면 뭘 못 하겠어.’
상처 봉합 정도는 의사라면 누구나 기본으로 익혀야 하는 술기다. 하지만 오더도 함부로 못 내는 인턴에게는 봉합조차 꿈도 못 꿀 일이었다.
PK때 삼겹살이나 천 쪼가리에 대고 봉합 연습을 했지만, 사람의 살은 질적으로 달랐다. 딱 한 바늘 꿰매 봤지만, 그때의 긴장감과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긴 부러운 것이 봉합뿐이겠는가?
한시라도 빨리 인턴 수련을 마치고 전공의가 되고 싶은 것이 모든 인턴들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같은 고생을 해도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환자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어제부터 배가 아픈데, 이게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아요. 사람 환장할 정도로 아프다니까요? 식은땀이 나고, 심할 때는 허리도 못 펼 정도로 아픕니다.”
응급실에 내원한 환자는 대부분 자신도 모르게 증상을 과장되게 표현하곤 했다. 의사는 환자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을 리가 있어요? 지금도 아파 죽겠습니다.”
얼굴은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이 좋았다. 이런 방식이 환자와 라뽀(rapport:유대감) 형성의 시작일지도 몰랐다.
“많이 아파 보이시네요. 힘드시죠. 배부터 보게 일단 침대에 누우세요.”
환자가 군말 없이 누웠다.
신중하게 복부를 촉진한 후 청진을 시행했다.
장 소리가 약간 증가됐을 뿐 나머지는 정상 소견을 보였다.
아마도 단순 장염에 장 경련이 동반됐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장염으로 보이는데, 장 경련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장 경련은 다리에 쥐가 나는 것보다 더 아프니까요. 내과 선생님에게 바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새벽이라서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빨리 좀 봐주세요.”
“걱정하지 마시고, 많이 아프시면 바로 말씀하세요.”
새벽 5시였지만 다행히 노티가 됐다.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난 1년차가 차트에 진단명을 썼다.
AGE(acute gastroenteritis):장염.
가장 흔히 보는 질환이었지만 왠지 뿌듯했다.
‘루틴 랩 내고, 심플 업도맨(simple abdomen:단순 복부 촬영) 찍고, 수액은 5프로 디더블유(5% DW). 복통 호소하면 부스코판(진경제) 하나 주고. 오케이!’
김지훈이 머릿속으로 내린 오더와 1년차의 오더가 일치했다. 이젠 장염 정도는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이 붙었다.
마지막으로 투약 오더까지 확인한 후 당직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제 막 내원한 환자를 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정형외과 환자였다.
‘새벽 5시인데 1년차 선생님에게 노티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