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운칠기삼 (1)
병력 청취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무식함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기본에 더 충실해야 했다.
“혹시 평소 앓고 있는 질환이 있거나, 특별한 약을 복용하시지는 않나요?”
“당뇨가 있어요. 약도 복용하시고, 인슐린도 아침저녁으로 맞고 계셨죠.”
‘당뇨와 인슐린?’
인슐린 의존형 당뇨병의 합병증이 가물가물하게 스쳐 지나갔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좀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평소 식사는 잘하셨나요?”
“그동안 별문제는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식욕이 없다고 제대로 드시지는 못했어요.”
인슐린을 맞는 사람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순간 뭔가 감을 잡은 김지훈이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 여기 간이 혈당 체크기 있죠?”
“네.”
“빨리 혈당 체크하고 랩 찾아와요.”
부리나케 혈당기를 가져온 간호사가 혈당을 체크했다.
고개를 들이밀며 혈당기를 보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간호사를 보았다.
LOW!
‘뭐야, 잘못 나온 건가?’
“다시 한 번 체크해요.”
결과는 같았다.
임시 혈당기는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혈당이 떨어졌다는 의미였다. 다른 간호사가 급히 찾아온 랩을 내밀었다.
32mg/dl.
저혈당성 쇼크였다.
부실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인슐린까지 맞은 탓이었다.
“노티는?”
“아직 연락이 안 됐어요.”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노티도 안 됐는데 처치를 해도 될까?
‘깨질 때 깨지더라도 환자가 우선이다. 코마 환자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문제잖아.’
저혈당성 쇼크일 때 해야 할 처치를 떠올렸다.
일시적으로 고농도의 당을 투여하는 경우에는 당뇨 환자에게 새로운 문제가 생길 여지가 없다고 배웠다.
김지훈이 망설이지 않고 오더를 냈다.
“디더불유(10% Dextrose Water:10프로 포도당) 10프로짜리로 바꾸고, 20프로 20시시 슈팅해요.”
혈관을 따라 고농도의 포도당이 흘러들어 갔다.
초조한 시간이 지났다.
김지훈이 힐끗힐끗 시계를 보았다.
1분, 2분, 3분.
‘당이 보충되면 드라마틱하게 깨어난다고 배웠는데, 부족한가? 더 줘야 하나? 내가 지금 잘못한 게 있나? 왜 눈을 안 뜨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잘못된 처치를 한 것이 아닌지 덜컥 겁이 난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때 환자가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당을 투여한 지 정확히 5분 후였다.
잠시 후,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정말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끄응! 여기가 어디여?”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며 환자의 손을 꼭 잡았다.
‘다행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점점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다.
혈색이 돌아오고, 맥박 수가 떨어졌다.
환자의 입에 물을 축여 주자 발음까지 또렷해졌다.
보호자가 반색을 했다.
“어머님, 이젠 괜찮으세요?”
“왜 그래? 도대체 여기가 어디여?”
“아유! 얼마나 놀랐다구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못미더운 눈치를 보이던 보호자가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알 수 없는 뿌듯함에 김지훈이 환자의 손을 놓지 못했다.
마치 꺼져 가던 목숨을 살린 것 같았다.
오전 8시.
오늘도 정확하게 응급실 문이 열리며 이혁민 교수가 들어섰다.
“별일 없었노?”
“예. 총 내원 환자 132명에 입원 환자 27명입니다. 그리고…….”
코마 환자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모르는 정갑수가 머뭇거리자 수간호사가 재빨리 나섰다.
“부장님, 방금 전 코마 환자가 한 명 들어왔네요.”
“코마 환자? 몇 시에?”
이혁민 교수의 억양이 묘해졌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수간호사의 말투가 바뀌었다.
“7시 35분에 내원했습니다.”
“내과에 연락은 됐나?”
“아직 안 됐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표정까지 변했다.
“수 선생, 전반기에는 이 시간에 중환이 오면 바로 연락하라고 내 분명 말했지. 다른 환자도 아닌 코마 환자가 노티도 안 됐는데 뭐 하는 짓이고?”
수간호사가 고개를 숙인 채 답을 하지 못했다.
“차트 줘 봐라. 환자는 어디 있노?”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였다.
정갑수가 재빨리 앞서다 한 소리를 들었다.
“환자는 누가 보고 있나?”
“김지훈 선생이 보고 있습니다.”
“혼자서?”
“예.”
“그래? 니들은 코마 환자가 와도 자신 있는 갑제. 초턴들끼리 잘하는 짓이다.”
화를 내면서도 차트에서 눈을 떼지 않던 이혁민 교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간호사를 보았다.
“노티도 안 됐다면서 오더는 누가 냈나?”
“김지훈 선생님이 내셨습니다.”
“처치까지 다?”
“네.”
“그래서 지금 환자는 어떻노?”
“의식은 회복했고, 내과에서 확인만 하면 됩니다.”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콧소리를 냈다.
환자가 있는 침대에 다가서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환자분, 인슐린을 맞으시는 분이 식사를 제대로 안 하시면 어떻게 해요. 다음부터는 꼭 식사하시고 맞으세요.”
“그동안은 괜찮았는데.”
“괜찮지 않아서 응급실에 오셨잖아요. 그러다 큰일 나요. 조금 있으면 내과 선생님이 내려오실 테니, 하라는 대로 하셔야 합니다.”
“입원하라고?”
“그건 제 소관이 아니네요. 하지만 그러셔야 할지도 몰라요.”
“의사 선생님이 모르면 누가 그걸 알아?”
“그러게요.”
김지훈이 아직도 환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얼굴을 보이자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힐끗 눈길을 준 이혁민 교수가 환자에게 현재 상태를 설명하며 환자와 보호자를 안심시켰다.
“할머니, 저혈당성 쇼크가 오셨네요. 지금까지는 적절하게 처치를 했으니 안심하시고 기다리세요. 내과 선생이 곧 올 겁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럼 치료 잘 받으세요.”
김지훈이 환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이혁민 교수의 뒤를 따랐다. 약식 회진을 마친 이혁민 교수가 스테이션이 아니라 당직실로 향했다.
“김지훈 선생, 나 좀 보자.”
“예, 선생님.”
김지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환자를 제대로 본 것인지, 혹시 실수는 없었는지 불안해졌다. 솔직히 인턴 주제에 함부로 환자를 진료했다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당직실에 들어가자마자 김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나?”
“회진에 늦었고, 오더도 없이 환자를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는 건가?”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외적인 경우에 대한 판단은 이혁민 교수의 몫이었다.
“김지훈 선생, 내 말 잘 들어라. 앞으로 김 선생이 미안해할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다. 실수를 해도 의사에겐 사과만 하면 끝나지만, 환자에겐 목숨을 달린 일일 수도 있다. 의사에겐 첫째도 환자, 둘째도 환자야.”
이혁민 교수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이번 환자 진료에 대한 또 다른 책망일지도 몰랐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 인투베이션(intubation:기관 내 삽관)은 할 줄 아나?”
“해 본 적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 겁도 없이 코마 환자를 봤어? 깡 좋네.”
고개를 숙인 김지훈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맞았다.
가장 기본적인 사항인 ABC는 알고 있지만, 정작 A(Air way)인 기도 확보부터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스스로도 답답한 일이었다.
“인투베이션이 필요한 환자가 오면 어떻게 할 셈이고? 전공의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간 환자 잡는데이.”
응급실에서는 그런 상황이 반드시 벌어진다.
어떻게든 환자의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응급실 당직 의사의 임무였다.
“일단 기관 내 삽관을 시도하겠습니다. 제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면 턱을 들어 올려 기도를 확보하고, 앰부(Ambu:공기주머니)로 호흡을 유지하겠습니다.”
“시간을 벌긴 하겠네. 하지만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
“예.”
힐끗 시계를 본 이혁민 교수의 말이 빨라졌다.
“하나만 더 묻자. 소변 검사 결과는 확인했겠지.”
“예, 확인했습니다.”
“특별한 점이 없었나?”
“특별한 이상은 없었습니다.”
“당뇨 환자의 소변 검사가 정상이란 말이제.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김지훈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소변 검사는 루틴(routine)으로 내보내는 검사인 데다, 정상 소견을 두고 무슨 해석이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저혈당에서만 쇼크가 오나? 제대로 배워라. 능력이 부족하면 결국 사람을 죽인데이. 김 선생, 니는 지금 운칠기삼으로 환자를 보고 있는 기다. 니가 환자를 살린 게 아니라 환자가 니를 살렸단 말이다. 더 노력해라.”
운칠기삼?
화투 칠 때 쓰는 말이었지만, 적절한 비유였다.
김지훈 스스로도 실력이 3이나 될지조차 의문이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럼 내일까지 저혈당성 쇼크와 고혈당성 쇼크에 대해 리포트를 제출해. 하는 김에 코마 환자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같이 작성해라.”
“예?”
“다시 말해야 하나.”
“아닙니다. 내일 회진 도실 때 제출하겠습니다.”
“그럼 일 봐라.”
이혁민 교수가 당직실을 나섰다.
김지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내가 뭘 놓친 거지?’
하지만 이내 급속도로 잠이 몰려왔다.
코마 환자를 무사히 보았다는 뿌듯함도 피곤에 묻혔다.
48시간 동안 거의 잠도 자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반쯤 감긴 눈으로 응급실을 나왔다.
“지훈아, 오프 잘 보내.”
손일석의 목소리가 가물가물하게 들렸다.
인턴 숙소는 응급실이 위치한 본관의 9층에 있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어 던진 김지훈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죽은 듯이 잠에 빠졌던 김지훈이 눈을 뜬 시간은 오후 3시였다.
더 자고 싶었지만, 씻지 못한 탓인지 몸이 찝찝했고, 무엇보다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구내식당은 닫았을 테고, 빨리 씻고 라면이나 먹어야겠다.’
부랴부랴 샤워를 하고 몸을 말린 김지훈이 휴게실로 향했다.
끼니를 놓친 인턴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라면 3개를 꺼냈다. 평소 2개는 부족하고 3개는 약간 버거웠지만, 지금 상태면 4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운한 몸과 마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냄비에 물을 붓던 김지훈이 입을 꾹 닫았다.
인상만으로는 조폭 부럽지 않은 선배가 등장한 것이다.
‘악어네. 정형외과 2년차가 인턴 숙소에는 왜 온 거야?’
“안녕하세요.”
“어! 인턴. 너, 지금 라면 끓이는 거지?”
‘그럼 그렇지, 악어가 선생이란 말을 붙일 리가 없지.’
“예.”
“그럼 끓이는 김에 내 것도 끓여.”
역시 악어란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인상은 그렇다고 쳐도, 성격까지 지랄 맞은 데다 후배들을 발톱에 때쯤으로 여기는 선배였다. 정형외과 의국을 놔두고 인턴 숙소에 온 이유도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몇 개나 끓일까요?”
약간을 떨떠름한 목소리였지만 악어는 개의치 않았다.
탁자에 떡하니 발을 올린 채 소파에 누워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렸다.
“5개.”
“5개요? 점심 안 드셨어요?”
“먹었지. 안 먹었으면 그걸로 되겠냐?”
얼핏 많이 먹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말 위대한 인간이란 소문이 맞았다. 김지훈이 투덜거리며 가장 큰 냄비를 찾아 한가득 물을 부었다.
“그 정도는 먹어야 간에 기별이 가지. 인턴, 너는 별로 배 안 고픈 모양이구나. 어디 도냐?”
“응급실인데요.”
“나 같으면 10개는 먹었겠다. 일 좀 해라. 하긴 제대로 돌았으면 지금쯤 뻗어 있겠지. 자식, 벌써부터 농땡이를 부리냐.”
참 말을 해도 재수 없게 말을 했다.
가슴에서 뭔가 불끈 솟았지만, 말대꾸를 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몽둥이뿐일 것이다. 정형외과 내에서 폭력으로 유명한 악어를 건드려서 좋을 일이 없었다.
8봉지의 라면이 어느새 다 끓었다.
김지훈이 탁자 위에 냄비를 놓았다.
“수저, 젓갈.”
‘아무리 선배지만 정말 가지가지 하네.’
속으로 투덜거리며 수저와 젓가락을 악어 앞에 놓았다.
그릇을 들고 라면을 입에 넣던 김지훈이 멍하니 악어를 바라보았다.
이건 먹는 게 아니었다.
거의 폭풍 흡입 수준이었다.
‘며칠 굶어도 저러진 않겠다. 인간이야, 짐승이야?’
순식간에 비워지는 냄비를 본 김지훈이 허겁지겁 라면을 입에 넣었다. 씹는 둥 마는 둥 대충 몇 번 씹고는 넘겼다. 그러나 채 두 그릇도 비우기 전에 라면이 모두 사라졌다.
악어가 이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인턴아, 배고프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악어 혼자서 6개 넘게 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배가 허전할 리가 없었다.
“예.”
“그럼 식당에서 밥 좀 가져와. 우리 밥 말아 먹자. 라면엔 찬밥이 최고 아니냐.”
라면 6개에 밥까지?
상상 초월이었다.
“식당 닫았을 텐데요.”
“배식만 안 하지, 밥은 줘. 대접에 가득 달라고 해.”
“가득이요? 알겠습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이렇게 먹고 저녁을 또 먹나?’
지하에 위치한 구내식당에 들러 밥을 달라고 하자 식당 아주머니들이 군소리 없이 밥을 내줬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대접에 밥이 한가득이었다.
“정형외과 선생님이 시킨 거죠? 오늘도 어김없이 오네요.”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식당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탄 김지훈이 눈치를 보았다.
가운은 안 입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의사인데 환자들 사이에서 밥 대접을 들고 있자니 왠지 창피했다.
김지훈이 후다닥 숙소로 향했다.
대접을 놓자마자 악어가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