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기본은 진단 과정이다 (2)
“김지훈 선생님, 앞으로 긴장하셔야겠어요.”
긴장해야 된다고?
뭘 잘못한 게 있나?
몰려오던 잠이 달아났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요?”
“이혁민 교수님께서 응급실 부장님이 되신 지 2년짼데, 오늘처럼 인턴 선생님에게 기본을 말씀하시면 확실히 평소와는 달라지시더라구요. 웬만해서는 그런 말씀 안 하시거든요.”
“뭐가요?”
“듣던 것보다 많이 깨지실 거예요.”
“왜요?”
“글쎄요, 부장님 속을 누가 알겠어요?”
‘인수인계할 때 그런 말은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찍혔다는 건가? 이제 첫날이고, 그럴 일도 없었잖아.’
“자세히 좀 말해 봐요.”
“전 잘 모른다니까요. 열심히 하면 덜 깨지지 않겠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정체 모를 불안감에 인상을 구기던 김지훈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정갑수를 떠올렸다.
‘9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 인간은 왜 안 오는 거야. 환자 보는 게 만만해 보이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시침이 정확하게 9시를 가리키는 순간 정갑수가 나타났다. 첫날부터 정시 출근을 하다니 역시 강적이 분명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손일석이 귀신처럼 당직실에서 나왔다.
“형, 왔구나. 그럼 난 갑니다.”
“야! 인수인계는?”
손가락으로 김지훈을 가리킨 손일석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초턴들의 생생한 인수인계는 온전히 김지훈의 몫이었다.
수간호사가 당직실을 보며 중얼거렸다.
“얘들아, 고생길이 훤해 보이지?”
“그러게요. 둘 다 만만한 선생님들이 아니네요.”
수많은 인턴들을 보아 온 간호사들의 직감이었다.
과연 이번에도 정확할까?
김지훈이 응급실 차트를 들고 인수인계를 시작했다.
“형, 기본적인 건 들었으니까 이것만 명심해요. 언제 어떻게 주증상이 발생했는지 차팅한 후 간호사들에게 노티할 과만 연결해 달라고 하세요.”
“그냥 과만 말해?”
역시 예감이 맞았다.
선배들에게 인수인계할 때 이미 다 들었던 말이었지만 정갑수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간호사들에게 당직 선생님들 표가 있으니까 과만 정하시면 돼요. 일반 외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내과, 소아과가 좀 늦어요. 대부분 중환자실 때문인데, 환자나 보호자들이 그런 사정을 봐주나요? 잘 컨트롤하시구요.”
“나 혼자?”
“형! 형이 듀티고, 제가 백듀티예요.”
“그럼 넌 뭐 하는데?”
“저도 일은 하죠. 하지만 한가할 때는 형이 혼자 봐야 되잖아요.”
“야, 처음인데 몇 명은 네가 봐줘야지. 이 나이 먹으면 뭐든지 힘들다. 밤새 일할 체력도 없고 말이야.”
스물아홉이라고 해도 고작 3살 차인데?
카드나 당구 칠 때는 이삼 일을 그냥 새우던 사람이?
“형, 나 하루를 꼬박 새웠어요. 잠은 자야죠.”
“알았어, 누가 자지 말래? 그냥 몇 명만 봐주면 돼. 그다음엔 내가 최대한 다 볼 테니까 걱정 마.”
김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도 초짜라구요. 차라리 인계나 하게 환자나 빨리 와라.’
때르르릉!
때마침 환자가 왔다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하늘이 돕는 걸까?
서둘러 가운을 걸친 김지훈이 정갑수와 함께 당직실을 나왔다. 배가 아파 온 환자였다. 간호사들이 기록한 바이탈 사인(vital sign)과 체중 등의 기본 정보를 확인한 김지훈이 주증상과 병력을 물었다. 오뉴월 땡볕도 아닌데, 그래도 하루가 지났다고 상당히 침착해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과 선생님이 내려오실 겁니다.”
간호사들이 환자를 침대에 눕히는 사이 정갑수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인계를 계속했다.
“임프레션(impression:임시 진단)까지 적고 노티하시면 돼요. 성인이고, 복통이니까 내과겠죠?”
“임프레션도 적어야 돼?”
“그럼요. 그래야 나중에 진단이 나오면 내 생각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죠. 환자 많으면 정신없어서 병명은 생각도 못 해요. 하여간 여기까지 하면 오더는 1년차 선생님들이 직접 내세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해?”
“외과 쪽은 1년차하고 우리가 같이 깨진다니까 무조건 기다리시고, 내과나 소아과 쪽은 내려올 시간이 없으면 가끔은 전화 오더를 내더라구요. 그럼 그때 눈치껏 오더 내시구요.”
“쉽네. 알았어. 참! 이 환자 임프레션은 뭐야?”
“에이지이(AGE:Acute GastroEnteritis)요.”
“장염이구나. 그렇지. 고맙다, 가서 자.”
의외로 시원한 답이었다.
역시 학생과 의사는 다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욕이 절로 나왔다.
설마 한계 환자 수가 두세 명에 불과하단 말인가?
딱 2명만 밀리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간호사에게 인상을 써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모든 원흉은 정갑수였다.
아무리 첫날이라지만 너무했다.
(지훈아, 환자 좀 봐줘.)
“형, 이 정도는 혼자 봐야죠. 벌써 몇 번째예요. 한 시간도 못 잤다구요.”
(새끼, 내 능력이 여기까진 걸 어떻게 해? 어차피 너 백듀티잖아. 듀티가 힘들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냐? 1년차 새끼들도 안 내려오고, 나도 힘들다.)
‘아무리 학교 후배라도 그렇지, 다운 세 번 당한 게 자랑도 아닌데 1년차 새끼가 뭐야?’
정갑수 특유의 구겨진 인상 속에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불만이 가득했다. 환자를 안 봤다가는 어째 일이 날 눈치였다.
“알았어요.”
찬물에 얼굴을 담가 억지로 잠을 쫓은 김지훈이 당직실을 나섰다. 머리가 멍해 환자의 말이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나마 가벼운 질환이었기에 다행이었다.
‘외래 놔두고 응급실에는 왜 오셨나. 빠를 것 같지만, 낮에는 여기가 더 늦어요.’
급한 마음에 응급실을 찾은 것은 알지만, 번지수가 틀렸다.
중환이 아닌 이상 낮에는 외래 환자가 우선인 곳이 바로 병원이었다. 물론 경중에 대한 판단은 초턴이 하지만 말이다.
조각 잠은 사람을 더욱 피곤하게 했다.
30분이나 1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면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머리가 멍해지며 찾아오는 두통이 꽤나 괴로운지 김지훈이 얼굴을 찌푸렸다.
36시간째 근무!
이미 체력이 바닥났지만, 12시간을 더 버텨야 오프다.
하지만 남은 12시간은 밤이다.
오늘도 이태원은 불야성을 이룰 테고, 밤이 깊어 한산해진 대로를 질주하는 차량들도 여전할 것이다.
꾸역꾸역 환자들이 밀려왔다.
누가 듀티인지 백듀티인지는 의미가 없었다.
“소아과 콜해 주세요.”
“예, 25세 남자 환자입니다. 금일 발생한 교통사고로 인해 우측 무릎에 발생한 열상으로…….”
어느새 의사들과 환자, 그리고 보호자들이 가득 찬 응급실이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러웠다.
누구 하나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든 빨리 봐달라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불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인턴들의 노티 소리.
새벽이 다가올수록 찾기 힘들어지는 당직 전공의들.
점점 피로에 지쳐 가는 간호사.
어떤 이유로든 응급실은 의료진을 한계로 밀어붙였다.
그랬던 응급실이 아침이 되자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오전 7시 30분.
시간을 확인한 김지훈이 목과 어깨를 돌리며 앉았다.
이틀째 밤도 무사히 지나갔다.
‘30분 남았다.’
지금 당장 침대에 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응급실 부장인 이혁민 교수의 회진을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 환자 보고는 듀티인 정갑수의 몫이었다.
간호사들과 환자들을 분류하고, 보고할 내용을 상의하는 정갑수를 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환자 볼 때보다 더 진지하냐. 이혁민 선생님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네. 나도 준비는 해야지.’
땀으로 떡 진 머리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눈곱은 떼야 했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복장이라도 단정하게 할 생각에 당직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귀를 쫑긋거렸다.
멀리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내원 환자가 경증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필이면 퇴근을 앞둔 이 시간에?
간호사들도 다소 짜증스러운 눈으로 응급실 문을 보았다.
병원 정문을 통과하면 당연히 멈춰야 할 사이렌 소리가 여전히 요란하게 울렸다. 응급실 문밖이 경광등 불빛으로 번쩍거렸다.
후다닥 몸을 일으킨 간호사들이 급히 스트레치 카를 끌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짜증은 사라져 있었다.
불과 이틀뿐이었지만, 처음 보는 일이었다.
김지훈의 뇌리에 선배가 한 말이 스쳤다.
‘앰뷸런스가 응급실 문 앞까지 사이렌을 울리면서 오면 중환이다. 그땐 각오 단단히 해라.’
‘왜요?’
‘생각을 해 봐. 얼마나 급하면 응급실까지 사이렌을 켜고 들어오겠냐? 조금만 시끄러워도 난리를 치는 입원 환자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이나 있는데 말이야.’
환자 상태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말이었다.
순간 머리가 쭈뼛 선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예상대로였다.
창백한 안색의 환자가 스트레치 카를 따라 힘없이 흔들렸다. 의식이 없어 보였다.
‘설마 코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의식이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환자를 앞에 둔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코마의 원인 질환들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이놈의 고질병!
환자를 접한 의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설픈 진단이 아니라 진단을 위한 적절한 과정을 수행하는 것이다.
분명 코마 환자에 대한 대처법은 배웠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지금 당장 기댈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YAMA(You Are My Assistant:족보)!
본과 시험 때마다, 그리고 국가 고시를 앞두고 달달 외웠던 야마에 답이 있었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환자분!”
귀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김지훈이 환자의 팔을 들어 얼굴에 떨어뜨렸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얼굴을 때렸다.
있는 힘을 다해 발톱을 눌렀다.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다면 눈을 뜨거나, 소리를 지를 정도로 심한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까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동공 반사는 살아 있었지만 느렸다.
뇌 손상은 심각하지 않다는 징후였지만, 코마는 분명했다.
김지훈이 환자에 대한 기본 사항을 체크했다.
“혈압, 맥박, 호흡수는?”
“혈압은 110에 80이고, 맥박은 분당 120회가 넘어요. 호흡은 30회 정도예요.”
혈압이 정상인데 맥박 수는 빠르다니,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가질 때가 아니었다. 환자에 대한 기본 점검이 우선이었다.
A(Air way:호흡 통로 확보).
B(Breathing:호흡 유지).
C(Circulation:혈액 순환 유지).
‘자발 호흡을 유지하고, 혈압은 정상이다. 에이비시는 괜찮고, 다음은 뭐지?’
기관 내 삽관이나 인공호흡은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다른 환자였다면 바로 노티를 해야겠지만, 눈앞에 있는 환자는 코마 상태였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뇌 손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초턴에게도 예외적인 상황이었다.
“정갑수 선생님에게 내과에 노티하라고 해요.”
“네.”
간호사들이 당연하다는 듯 다음 오더를 기다렸다.
김지훈이 정신을 집중했다.
“산소 주고, 심전도 모니터링해요. 루틴 랩(routine Lab:기본 혈액 검사) 내보내고, 비지에이(aBGA(aterial Blood Gas Analysis):동맥혈 가스 분석)준비해요. 아! 포터블(portable:이동용 X-ray 진단기)도 부르고.”
“선생님, 뭐 달아요?”
‘수액? 외과 환자는 아니니까 핫덱(Hartmann dextrose:전해질과 포도당이 포함된 수액)을 다는 게 원칙이지.’
“핫덱 천(1,000밀리리터).”
간호사들이 급히 움직였다.
수액을 달며 동시에 채혈을 해 혈액 검사를 내보냈다.
비지에이를 위한 유리로 된 주사기를 받아 든 김지훈이 신중하게 환자의 요골 동맥(엄지 쪽 손목으로 지나는 동맥)을 찾았다.
심장이 피를 내뿜을 때마다 툭툭 움직이는 동맥이 느껴졌다. PK때 몇 번 해 본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결코 실수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수직으로 피부를 뚫고 들어간 바늘에서 약간의 저항이 감지됐다. 살짝 힘을 주자 유리 실린지에 붉은 피가 차올랐다. 정확하게 동맥을 천자한 것이다.
선홍색을 보이는 것이 색깔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실린지를 건넨 김지훈이 환자를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지 다시 생각했다.
‘야마에 있는 항목은 다 했나? 일단 빠진 것은 없는 것 같네. 그런데 몇 분이나 걸렸지?’
김지훈이 시계를 보았다.
7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충 5분에서 10분 정도 걸렸다.
이 정도면 최소한 환자를 눈앞에서 죽이진 않을 것이다.
문득 보호자의 눈길이 느껴졌다.
노티는 정갑수의 일이었지만, 환자를 본 의사는 김지훈 자신이었다.
‘코마의 원인이 뭘까?’
한숨을 돌린 김지훈이 보호자를 불렀다.
“어머님은 괜찮으신가요?”
보호자의 목소리에 불안이 가득했다.
“검사 결과가 나와 봐야 알 것 같습니다. 환자분이 언제부터 이랬죠?”
보호자의 얼굴에 약간의 불신이 감돌았다. 환자의 상태는 위중한데, 고작 20대 중후반에 불과한 의사가 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 얼굴에 초턴이라고 쓰여 있나?’
이해는 하지만, 나도 의사라는 자존심에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오늘 새벽에 갑자기 메슥거린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시더라구요. 그러더니 점점 사람도 못 알아보시고, 헛소리까지 하셔서 바로 119에 연락을 했어요.”
“언제 정신을 잃었죠?”
“오는 동안 저렇게 변했어요.”
‘구역, 구토, 식은땀, 의식 혼미. 이게 어떤 질환의 증상이지? 에이! 감도 못 잡겠네.’
역시 의사라고 다 의사가 아니었다.
무식함 앞에서 김지훈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