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기본은 진단 과정이다 (1)
응급실이 난장판으로 변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업자득이었다.
2년 전, 대전 유성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12시 이후의 심야 영업이 제한됐을 때 같은 학년 주당들과 함께 목소리를 높였었다.
‘이거야말로 독재다. 그럼 어디서 술을 마시냐? 우리에게 밤새 술 마실 자유를 달라.’
본과 3학년의 꿈인 이태원의 밤이 사라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환락의 거리.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이지만, 만 원이면 서너 명이 밤새 술을 마셔도 돈이 남는 곳.
금발과 흑발의 늘씬한 여인들.
전설처럼 들려오는 선배들의 무용담.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분개하며 정권 타도를 외쳤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6개월 후 이태원의 밤이 다시 열렸다.
발동이 걸린 날이면 호기롭게 이태원으로 몰려가 각자 천 원짜리 몇 장을 내고는 밤새 술과 벗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오가는 여인들을 품평하며 히히덕댔다.
물론 그 여인들은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술 취한 놈들에게는 즐거운 일이었다. 가끔은 육중한 몸매의 미군 소속 여군들과 합석해 되도 않는 영어를 지껄이기도 했다.
참 즐거웠었다.
그랬던 이태원이 비수로 변할 줄은 몰랐다.
당시에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태원의 밤은 무수한 환자들의 산실이었다. 그놈의 술과 매혹적인 여인은 사내들을 짐승으로 만들었다. 그 탓에 끊임없는 싸움이 벌어졌고, 패배한 자가 향할 곳은 바로 응급실이었다.
그런 이태원이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다.
안면부 열상 환자를 시작으로 패배자들이 몰려들어 왔다.
‘어이구! 내가 왜 심야 제한을 욕했을까? 여기가 술집이야, 응급실이야. 환자 중 절반이 술에 취한 사람들이네.’
진동하는 술 냄새 속에서 환자를 보아야 했다.
모조리 외상 환자들이었다.
김지훈이 정신없이 노티를 했다.
성형외과 1년차가 응급실에 주저앉았다.
일반 외과와 정형외과에 신경외과까지, 모든 외과 전공의 1년차들이 콜을 받았다.
응급실에만 매달릴 수 없는 처지들이었다.
이미 12시가 넘어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남은 1년차들이었다. 속전속결로 진단과 치료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 많은 환자들을 순식간에 처리하다니, 대단하네.’
김지훈이 부러운 눈으로 전공의들을 보았다.
단 1년을 앞선 의사들이었지만 실력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의사로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다.
‘어차피 밤을 새야 하는데, 눈 뜨고 멍하니 있으면 뭐 해. 하나라도 더 배우자.’
신환이 뜸해진 틈을 타 김지훈이 처치실로 들어갔다.
슬쩍 각 외과 1년차들의 눈치를 보다 일반 외과 1년차 앞에 앉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성격 좋기로 유명한 1년 선배 유석재였다. 당연히 선후배들과 사이가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김지훈을 아꼈었다.
“왜?”
“어시스트(assist:보조)하려구요.”
“간호사는 뭐 하고 네가 와?”
“신환이 없어요.”
“듀티냐?”
“예.”
“그럼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
“선생님도 피곤하실 텐데 정형외과 선생님 대신 봉합을 하시잖아요.”
“자식! 지금 네가 날 걱정할 때냐?”
능숙한 솜씨였다. 5분도 안 돼 여섯 바늘을 꿰맨 유석재가 재빨리 드레싱(dressing:상처 소독)을 했다.
“네 덕에 빨리 끝났네. 내가 대신 수처(suture:봉합)한 건 비밀이다. 외과 100일 당직이 뭔 줄은 알지? 2년차가 알면 쟤 맞아 죽는다.”
유석재가 정형외과 1년차를 가리켰다.
100일 당직은 외과 1년차들의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그동안 오프가 없는 것은 물론 병동과 수술실, 그리고 응급실 업무까지 맡아야 한다. 몸이 2개여도 모자랄 시기였다.
“선생님은 안 피곤하세요? 괜히 다른 과의 일로 혼나시는 거 아니에요?”
“이제 하루 지났어. 벌써 힘들면 나머지 99일을 어떻게 버텨? 정형외과는 걱정 마. 아무리 험해도 일반 외과는 못 건드린다. 그나저나 너도 첫날부터 제대로 뺑이 치는구나. 그럼 수고해.”
김지훈의 어깨를 툭 친 유석재가 바쁜 걸음을 옮겼다.
100일 당직에 들어간 외과 전공의 1년차가 다른 과 일을 대신해 주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형, 예전에도 멋있었지만 지금은 더 멋있네요. 어쩌면 형 밑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전공으로 외과 쪽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느 과를 택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유석재의 모습에서 일반 외과의 멋을 본 것 같았다.
모처럼 기분 좋은 얼굴로 처치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깜짝 놀라 접수대로 달려갔다.
손일석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볼게.”
“다 봤어. 그런데 지훈아, 이러다 백듀티가 밤을 샐지도 모르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지 않냐?”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긴 하겠지. 하지만 봐준다. 아무래도 너, 내일까지 뺑이 칠 것 같아서 말이야. 사실 걱정도 좀 된다.”
“왜?”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일 날 놈이네. 나 오늘 오프인 건 알지?”
“알지.”
“넌 듀티를 섰으니까 백듀티고. 그럼 다음 듀티는 누구?”
누군가를 떠올린 김지훈이 멍하니 입만 벌렸다.
“갑수 형.”
“그래. 너, 제대로 걸린 거야. 첫 근무부터 듀티, 듀티, 오프라는 게 빤히 보이잖아. 하루도 이렇게 힘든데, 이틀 동안 듀티면 거의 죽음 아냐? 앞으로도 백듀티는 없을 거다.”
김지훈이 부랴부랴 벽에 붙은 인턴 스케줄 표를 확인했다.
정말 암울한 일정이었다. 김지훈이 절망적인 표정을 짓다 말고 손일석을 노려보았다.
‘저 자식은 듀티일 때만 갑수 형을 만나네. 내가 첫 듀티를 한다니까 갑수 형부터 오프 가라고 할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여우같은 자식. 에휴! 아무리 배우는 것도 좋지만, 이건 심하잖아.’
“너, 우리 스케줄 짤 때 이미 계산하고 있었지?”
“사람 잡지 마라. 내 머리가 그 정도는 안 된다.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그래서 갑수 형한테 오프부터 가라고 했어?”
“그거야 연장자니까 대우를 한 거지. 그리고 너랑 첫 근무를 같이하고 싶었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날 좋아하다고? 징그러운 놈.’
의심은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
이제 와 스케줄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인턴인데,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인간이? PK(임상 실습) 때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달라지겠냐? 차팅 정도는 하겠지.”
김지훈의 조그만 기대가 무참히 짓밟혔다.
거의 24시간을 꼬박 근무했다. 간간히 잠을 잔 손일석의 눈도 빨간데, 김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젠 슬슬 다리의 감각까지 무뎌지는 것 같았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48시간을 내리 근무하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급을 세 번 당한 선배, 정갑수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시간 날 때 조금이라도 자야겠다.”
문득 불안해진 김지훈이 환자들을 살핀 후 당직실로 들어갔다. 손일석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너, 인턴 스케줄이 왜 이 모양이냐?”
“뭐가 또?”
“아니, 어떻게 마이너가 하나도 없어. 응급실만 네 번에, 중환자실까지 골고루 험한 과만 돌아다니네. 우리 동기 중 가장 재수 없는 인턴이 바로 너였구나. 아주 일복이 터졌다.”
“그래서 뭐 보태 준 거 있어?”
“걱정돼서 그렇지. 이러다 인턴도 못 마치고 골로 가는 거 아니냐? 잘 먹고 다녀라.”
“걱정 마. 그리고 난 솔직히 내 스케줄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고? 이 자식이 밤을 새더니 맛이 갔네.”
“맛이 가긴. 난 써전(Surgeon:외과 의사)이 될 거야. 아직 과는 정하지 못했지만, 괜찮은 의사라는 소리라도 들으려면 이 정도의 수련은 해야 하지 않겠어? 가능하면 최고라는 말을 듣고 싶다.”
대답 대신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만 들렸다.
자신의 속내를 비쳤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자동이구나. 어떻게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그냥 잠이 들지? 정말 불가사의한 놈이야.’
김지훈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긴장이 남아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머리만 멍했다. 한참을 뒤척거리다 가물가물 잠이 들 무렵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환자 왔어요.)
한 번 누웠다 일어나려니 더 힘들었다.
찬물로 세수를 하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지훈이 당직실을 나섰다.
다행히 단순 환자였지만 새벽 5시였다. 이제 두세 시간 정도 잤을 1년차들이 쉽게 눈뜨지 못할 시간이었다. 더구나 내과 환자였다.
메디컬(medical) 파트지만 메이저 과인 내과의 수련 역시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전화벨이 스무 번도 넘게 울리고 나서야 졸음에 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응급실? 김지훈 선생, 지금 몇 시야?)
“5시입니다.”
(뭐, 5시? 씨팔, X 됐다.)
노티도 받지 않고 전화를 끊은 내과 1년차가 어느새 응급실 문을 열고 있었다. 급히 환자를 보고 오더를 낸 후 병동으로 향했다.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은 김지훈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선배 의사들이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각 병동을 보던 김지훈이 기지개를 폈다.
‘큰 실수 없이 무사히 지났네. 첫 근무치고는 잘했다는 소리겠지? 갑수 형이 일을 안 하면 내가 하면 되지. 잠이야 오프 때 실컷 자면 되고.’
피곤이 온몸을 짓눌렀지만, 무사히 첫날을 보냈다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전 8시.
칼처럼 응급실 문이 열렸다.
반코트에 목도리를 멋지게 두른 세련된 신사가 들어섰다. 응급실 부장 보직을 맡고 있는 일반 외과 이혁민 교수였다.
김지훈이 24시간 동안 본 환자들의 차트를 스테이션 위에 가지런히 놓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응급실 인턴 김지훈입니다.”
“손일석입니다.”
“별일 없었노.”
살짝 섞인 경상도 특유의 억양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환자를 볼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다가왔다.
“예. 응급실 보고 드리겠습니다. 총 내원 환자 124명, 입원 24명입니다. 특이 사항 없었습니다.”
“우리 과 환자는 없었나?”
“입원 환자 중에는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따로 정리한 환자 리스트를 훑어본 이혁민 교수가 응급실을 한 바퀴 돌았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바짝 긴장된 모습으로 뒤를 따랐다.
아직 귀가하지 못했거나, 입원 대기 중인 환자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며 약식 회진을 돈 이혁민 교수가 맨 뒤에 있던 수간호사를 불렀다.
“수 선생, 다른 일은 없었나?”
“네, 별일 없었습니다.”
이혁민 교수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수간호사를 보았다.
“평소 톡식(toxic)한 사람이 오늘은 꽤 부드럽네. 할 만했나 보네.”
수간호사가 미소를 보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주간이나 야간이나 모두 특별히 힘들었단 소리는 안 들리네요. 그런데 오늘은 부장님께서도 부드러우신데요?”
“그래? 첫날인데 생각보다 깔끔해서 기분은 좋네.”
다시 스테이션으로 돌아온 이혁민 교수가 수간호사가 내민 일지를 살폈다.
“이게 뭔 소리고?”
“읽으신 그대로예요.”
“그래? 좋은 일이네.”
무엇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이혁민 교수가 다소 즐거운 표정으로 김지훈과 손일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초턴들이재.”
“예, 선생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겠지만, 기본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치료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 진단하느냐를 배우는 시간이라는 걸 잊지 말고. 알았나.”
“예, 선생님.”
힐끗 김지훈을 본 이혁민 교수가 시계를 보며 응급실을 나섰다. 시간이 촉박한지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이 풀린 손일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내가 직접 보고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떨리네. 지훈아, 너도 떨렸지.”
‘그럼 첫 근무 보고를 하는데 당연히 떨리지, 설마 안 떨렸겠냐? 그래도 신사라고 소문난 이혁민 교수님이 응급실 부장님이라 천만다행이다.’
김지훈이 내심과는 달리 짐짓 여유로운 표정으로 지었다.
“떨리긴, 이 정도는 기본 아니냐?”
“꽁 까고 있네. 이마에 땀이나 닦아, 인마. 그런데 갑수 형은 왜 안 와? 설마 9시 땡 쳐야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뭔가 호들갑스러웠다.
오늘 자신이 오프라는 강력한 어필이었다.
그래도 이제부터 근무 교대는 9시다.
“아직 30분 남았다.”
손일석이 가자미눈을 떴다.
“친구를 위해 30분도 양보 안 하는 매정한 놈.”
“아이고! 죄송합니다. 억울하시면 부장님께 직접 말씀하시죠. 아니면 들어가 쉬시든가요, 손 선생님.”
김지훈이 손일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씩 웃었다.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당직실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환자도 없고, 긴장까지 풀린 탓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사실 26시간 동안 이어진 응급실 근무는 웬만한 체력으로는 버티지 못할 중노동이었다.
‘아! 졸리다. 갑수 형, 빨리 좀 옵시다.’
그때 수간호사의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